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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하나에 1000만원 '그라폰
파버카스텔'…라거펠트가 사랑한 필기구

by매경이코노미

“파버카스텔 없이는 어떤 것도 디자인하고 싶지 않다.”

샤넬의 전성기를 이끌다 최근 세상을 떠난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한 말이다. 칼 라거펠트는 파버카스텔 필기구 마니아로 유명했다. 평소 디자인 스케치 작업을 할 때 애용했다고. 지난 2016년에는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한정판 색연필 세트 ‘칼박스(Karl Box)’를 선보이기도 했다. 2500세트가 한정판으로 제작됐으며 국내에서는 350만원에 판매됐다. 칼 라거펠트 외에도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도널드 덕’으로 유명한 미국 만화가 칼 바크스, 미국 배우 시에나 밀러 등이 파버카스텔 필기구 애호가로 알려졌다.

하나에 1000만원 '그라폰 파버카스

파버카스텔은 필기구 외에도 펜꽂이, 레터 오프너, 메모지 보관함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든다.

하나에 1000만원 '그라폰 파버카스
하나에 1000만원 '그라폰 파버카스

‘클래식 퍼남부코’ 만년필과 볼펜, 수성펜. 슈퍼리치가 선물용으로, 혹은 일상생활에서 가볍게 쓰기 위해 자주 구매하는 제품이다.

슈퍼리치 필수품 ‘그라폰 파버카스텔’ 올해의 펜 300만~1000만원대

파버카스텔은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 브랜드 중 하나다.


1761년 독일에서 설립돼 9대째 이어져오고 있다. 캐비닛 제조업자였던 카스파르 파버가 나무 막대기 두 개 사이에 흑연심을 넣은 최초의 연필을 선보이며 시작됐다. 이후 회사를 물려받은 그의 후손 오틸리에 폰 파버가 알렉산더 카스텔 뤼덴하우젠 백작과 결혼하며 회사 이름이 파버카스텔로 바뀌었다. 가족경영을 지속해오다 2017년 처음으로 외부 인사를 영입했다. 스와치그룹 부사장을 지낸 다니엘 로거. 그는 현재도 CEO를 맡고 있다.


파버카스텔은 다양한 제품을 만든다. 연필과 색연필, 수성펜, 만년필을 비롯한 필기구는 물론 펜 케이스, 지갑 등 가죽을 활용한 제품까지 종류도 여럿. 각 카테고리별 가짓수도 많다. 그중 슈퍼리치가 특히 관심을 보이는 제품 라인은 ‘그라폰 파버카스텔’이다.


슈퍼리치가 애용하는 상품답게 그라폰 파버카스텔은 가격대가 상상을 뛰어넘는다. 샤프너(연필깎이)와 지우개가 달린 일체형 연필인 ‘퍼펙트 펜슬’은 한 자루에 33만~55만원이다. 소형 샤프너는 15만원, 지우개는 20만원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기로쉐 펜슬’ 시리즈는 3자루에 3만원, 즉 1자루에 1만원인데 이 역시 연필 한 자루 값치고는 만만치 않다. 슈퍼리치가 선물용으로, 혹은 일상생활에서 가볍게 쓰기 위해 자주 구매한다는 ‘클래식 퍼남부코’ 시리즈는 샤프와 볼펜이 42만원, 수성펜 55만원, 만년필 80만원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가격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매년 초 한정판으로 만들어지는 ‘올해의 펜(Pen of the Year)’은 가격을 듣고 나면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가장 저렴한 상품이 300만원대, 비싼 제품은 1000만원을 훌쩍 넘는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을 테마로 만든 2018년 에디션은 450만~600만원에,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브룬 궁전을 모티브로 만든 2016년 에디션은 450만~1000만원에 판매됐다. 이 밖에 2001년 파버카스텔 창립 240주년을 기념해 99자루만 한정 생산한 퍼펙트 펜슬은 1500만원에 판매된 바 있다.


물론 비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라폰 파버카스텔 제품은 만들 때 비싸거나 구하기 어려운 소재를 많이 쓴다. 가오리 가죽이나 상어 가죽, 스네이크우드, 말총, 매머드 상아 등이 대표적인 예다. 2억년 이상 석화된 나무로 제작된 펜도 있고 백금으로 도금한 제품도 있다. 가죽 제품 역시 캐시미어, 알칸타라 가죽, 이탈리아산 송아지 가죽을 비롯한 고급 소재로 만든다.


수제라는 점도 가격이 비싼 이유다. 그라폰 파버카스텔 제품은 모두 장인이 손으로 직접 만든다. 그래서 제품에 ‘Made in Germany’라는 표현 대신 ‘Handmade in Germany’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희소성도 가격을 높이는 요소다. 흔치 않은 소재를 쓰는 데다 손으로 만드는 제품이다 보니 공급되는 수량이 많지 않다. 파버카스텔 관계자는 “대중을 타깃으로 하는 제품 라인이 아니고 만드는 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 대량생산을 하기 쉽지 않다. 특히 인기가 많은 모델은 중고시장에서 원래 판매 가격보다 더 비싼 값에 팔리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

하나에 1000만원 '그라폰 파버카스

디지털 시대에도 필수품, 희소성·퀄리티 다 갖춰

여기에서 드는 의문 하나. 보고서, 계약서 등 대다수 문서를 컴퓨터로 만드는 시대임에도 슈퍼리치가 파버카스텔 필기구를 찾는 이유는 뭘까.


파버카스텔코리아 관계자는 “슈퍼리치 중에는 취향이 까다로운 사람이 많다. 만년필은 쓰다 보면 개인의 필기습관, 펜 잡는 스타일 등에 맞게 펜촉이 바뀐다. 나무로 만든 제품은 들고 다니다 보면 손때가 묻으면서 색이 바뀌기도 한다. 세상에 똑같은 만년필은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자신의 스타일, 습관 등이 묻어나 유니크한 물건이 된다는 점이 까다로운 슈퍼리치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단순히 필기구가 아니라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품질이 뛰어나다는 점도 인기 요인이다. 제품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고급 소재로 만드는 만큼 퀄리티는 당연히 최상이다. 만년필 펜촉에는 잉크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홈이 있는데 홈을 기준으로 펜촉 양옆 5 대 5가 가장 이상적인 비율이라고 알려져 있다. 파버카스텔 관계자는 “그라폰 파버카스텔 제품은 5 대 5 비율을 정확하게 지키기로 정평이 났다. 만년필 마니아 사이에서도 인정받는다. 희소성과 퀄리티를 중시하는 슈퍼리치 입맛에 딱 맞는다. 다른 브랜드 필기구를 쓰다가 그라폰 파버카스텔으로 바꾸는 사람은 많다. 반면 그라폰 파버카스텔 필기구를 쓰다가 다른 브랜드로 ‘갈아타는’ 슈퍼리치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파버카스텔은 고객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VIP 고객이 누구보다 먼저 신제품을 만나볼 수 있도록 신제품 론칭 행사 등에 초청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 밖에도 매장 매니저가 VIP 고객을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고객으로부터 들은 제품 관련 피드백을 반영해 제품을 개선하기도 한다. 제품 수리(AS) 의뢰를 받았을 때 국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라면 독일 본사로 제품을 보내 고친다. 만약 고칠 수 없다면 새 제품을 제공한다.


적게는 수백만원, 많게는 1000만원을 훌쩍 넘는 그라폰 파버카스텔 제품을 사가는 사람들은 누굴까. 필기구와 펜 케이스, 펜꽂이 등이 주력 제품이다 보니 책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주요 고객이다. 직업으로 보면 의사와 변호사를 비롯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대기업 CEO나 임원도 상당수라고. 나이로 보면 과거에는 40~50대 남성이 주를 이뤘다. 최근에는 30대 고객도 늘어나는 등 연령대가 차츰 낮아지고 있다. 여성 고객도 증가하는 추세다. 파버카스텔코리아 관계자는 “주요 고객층이 변하는 만큼 제품 특성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검은색, 갈색 등 다소 어두운 색상을 주로 사용했다. 최근에는 파란색, 주황색 등 밝고 눈에 잘 띄는 색상을 채택한 제품도 많이 선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기진 기자 kjkim@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