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집엔 누가 살고 있나요"

[컬처]by moca

지금부터 달력을 보고 생각해보세요. 이번 달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나'만 생각하며 보낸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나요? 학교, 학원, 회사, 집안 일, 각종 경조사에 모임까지... 단 하루도 꼽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혼자 있으면 '나'에 충실해집니다. 지금 뭘 먹을까, 어디를 갈까, 뭘 할까. 언제나 주체는 '나'입니다. 작은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다 보면 나는 어떻게 살고싶은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예순 살의 세일즈맨이 해고 통지를 받는 하루를 그린, 아서 밀러의 희곡입니다. ‘자본주의의 고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를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저는 주인공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초점을 맞춰보았습니다.


윌리는 25년 주택부금의 마지막 납입을 앞둔, 예순을 넘긴 외판원입니다. 아버지는 아무 연고도 없는 알래스카에 가서 사업을 했고, 형 역시 아버지의 기질을 빼닮은 모험가입니다. 세일즈맨인 윌리는 세 부자 중 가장 나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윌리가 세일즈맨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일종의 자기 세뇌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집엔 누가 살고 있나요"

주인공 윌리(오른쪽)과 형 벤(왼쪽)

“호텔에서 세일즈맨 한 사람을 만났어요. 팔십 먹은 노인이었는데, 서른 한 개 주에 판로를 개척한 사람이었어요. 이 노인네가 방에 올라가서 녹색 벨벳 슬리퍼를 신고... 수화기를 들고 바이어에게 전화를 해서는, 방을 뜨지도 않은 채 영업을 하더란 말입니다. 나이 여든 넷에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사랑 받는 것보다 더 흐뭇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처럼 살고 싶었던 윌리는 자신이 해야 할 결정을 형에게 맡깁니다. 1막에 떠나는 형을 붙잡고 두 아들을 한번 봐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1분 남짓한 시간, 두 아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형은 “애들이 아주 튼튼하네. 좋아” 라고 하는데, 그 한마디에 윌리는 크게 안도하며 기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형은 윌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자랑스러운 존재이지만, 정작 내면에서는 그가 미처 채우지 못한 반쪽을 상기시키는 열등감의 환영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던 윌리에게 큰 사고가 납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어느새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일할 나이가 지나버렸습니다. ‘여든에 호텔 방에서도 물건을 파는 세일즈맨이 될거니까’ 윌리는 당당하게 내근직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사장은 단칼에 자리가 없다고 거절합니다. 회사를 위해 수 십 년을 바쳤다는 호소에도 사장의 태도가 변하지 않자 윌리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폭발합니다. 화가 난 윌리는 사장에게 고함을 치고 결국 해직 통보를 받습니다.


윌리는 현실속으로 쿵 떨어집니다. 전국에 판매망을 가진 성공한 세일즈맨이 되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기대했던 큰 아들은 서른이 넘었지만 여전히 변변한 직업 없이 방황할 뿐입니다. 당장 이번 주 보험료를 내야 하는데, 돈을 빌려줄 사람은 자신이 깔보던 친구 뿐입니다.


“시간을 맞추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은 인생이 되어버렸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달은 윌리는 과거로 도망칩니다. 성공에 대한 기대, 촉망 받는 아들의 미래, 정부와의 달콤한 사랑.

"당신의 집엔 누가 살고 있나요"

윌리를 걱정하는 가족들

윌리의 아내는 아무 조건 없이 윌리를 이해하는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이었고, 큰 아들 역시 아버지와의 뒤틀린 관계를 바로잡고 싶어하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윌리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돌려 세우려 했지만, 먼 곳만 보며 달려온 그는 원시안이 되어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로의 도피는 한계가 있습니다. 남은 건 미래 뿐입니다. 그가 유일하게 또렷이 볼 수 있는 것. 비록 보이는 게 낭떠러지일지라도 그는 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극 초반 윌리가 집을 보며 농담처럼 내뱉는 대사가, 막이 내린 후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생각해봐. 집을 사려고 평생을 살았어. 마침내 내 집이 생겼는데, 그 집에 아무도 살지 않는 거야”

"당신의 집엔 누가 살고 있나요"

달리고 있을 땐, 주변을 자세히 볼 수가 없습니다. 풍경은 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저 멀리 종착지만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다 멈추는 순간, 우리는 둘러볼 여유가 생깁니다. 정지해 있을 때에만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멈춰서 들여다보면, 삶은 기대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흙탕 위에 서있는 날도, 뒤에서 무서운 괴물이 쫓아오고 있는 날도 있을 겁니다. 불안함의 그늘이 드리우는 밤이면, 용기 내 억지로라도 브레이크를 당깁니다. 그래야 언젠가 노란 신호등을 만나 멈춰야만 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 커다랗게 자란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을 테니까요.

 

글 moca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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