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속에서 만난 결혼식

[여행]by 머니투데이
산 속에서 만난 결혼식

산 속 마을에서 만난 결혼식과 17세 신부.

외국에 갈 때마다 장구경이나 뒷골목 탐방을 빼놓지 않지만, 또 하나 기회만 있으면 꼭 보려고 하는 게 그곳의 결혼식 풍경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비슷비슷한 절차로 진행되는 것 같아도 나라나 지역에 따라, 혹은 동네마다 조금씩 다른 풍습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특히 종교의 영향이 크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시골로 갈수록 결혼식이 마을 전체의 축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 현장에 섞여있으면 그곳 사람들이 간직해온 문화와 살아온 역사까지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대개는 나그네에게 인심도 후해서 밥 한 끼 정도는 문제없이 해결할 때가 많다.


살구로 유명한 터키의 중부 도시 말라티아 갔을 때는 불행이 가져다준 행운을 톡톡히 맛봤다. 그날은 레벤트 협곡이라는 곳에 갔다가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맸는데, 그곳에서 가장 ‘터키다운’ 결혼식을 구경할 수 이었다. 산꼭대기에서 길을 찾으며 내려오고 있는데 느닷없이 마을이 나타났다. 설마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싶었는데, 여러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고 나름대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산속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뭔가 흥미로운 일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 때 그냥 지나가면 여행자로서 자격미달이다. 가까이 가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방금 결혼식이 끝나서 돌아가는 중이란다. 이렇게 외떨어진 곳에서 결혼식을? 조금 일찍 왔으면 좋은 구경을 했을 텐데 하필 끝날 때 올 건 뭐람. 아쉬움에 혼자 투덜거렸지만 뭔가 볼거리가 남아 있을 것 같았다. 터키의 결혼식은 꽤 화려하다. 3일 동안 춤추며 즐긴다. 군무도 추는데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양을 몇 마리 잡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혼식의 규모를 따진다. 옛날 우리네도 부잣집들은 혼사를 치를 때면 돼지를 몇 마리씩 잡아내고는 했다.


명색이 잔치인데 그냥 돌아서긴 아쉬워 자꾸 안쪽을 기웃거렸다. 느닷없는 동양인의 등장에 금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결혼식 구경 실컷 하고 났더니, 이건 또 웬 구경거리냐는 표정들이었다. 마침 손님을 배웅하러 나왔던 신랑과 마주쳤다. 다짜고짜 축하 인사부터 던지고 이것저것 묻었다. 어려보이는 신랑은 신이 나서 묻는 대로 곧잘 대답했다. 신부는 멀리 흑해지방에서 시집왔다는 것이었다. 그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어떻게 이런 산골까지 왔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터넷의 힘이었단다. 밤바다 인터넷 채팅으로 사랑을 속삭였다는 것이다. 신랑이 말을 하다 말고 이방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못이기는 척 따라 들어가 우선 신부가 있는 방부터 들여다보았다. 긴 잔치로 지칠 법도 하련만 신부는 여전히 생생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식은 끝났지만 잔치는 계속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방안에 그득했다. 신부의 나이는 열아홉 살, 신랑은 스물 둘이란다. 터키는 여자 열다섯, 남자 열일곱 살이면 합법적 결혼이 가능하다. 조혼풍습에 대한 반대운동도 거세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신부를 구경하고 나오니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 중 하나가 잡아끄는 대로 따라갔더니 방바닥에 잔치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이방인 손님을 대접하려는 그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언제 이렇게 준비했담. 사람들이 둘러앉아 구경을 하든 말든 맛있게 먹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차라 음식은 꿀맛이었다. 밥과 콩죽, 그리고 빵이 전부였지만 어떤 진수성찬보다 화려했다.

산 속에서 만난 결혼식

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하여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는 아이.

밥을 먹고 나니 이번엔 특별 공연이 펼쳐졌다. 그 집의 최연소 꼬마가 한국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춤을 추었다. 비록 유행은 지났지만, 깊은 산골까지 강남스타일 열풍이 덮쳤을 줄이야. 놀랍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예상치 못한 한국 손님을 맞아 밥을 차려내는 것은 물론 기쁘게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공연까지 준비한 그들. 옛날 인심 좋았던 우리네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환대에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쇠로 만든 인간이겠지. 그날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사진 몇 장 찍어준 게 전부였다. 축의금도 내지 못했다.


웃고 떠들고 한바탕 잔치가 이어졌다.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터키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너와 나를 가리기 위해 쌓아놓은 벽이라는 게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 풍경이 삭막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따뜻해지는 것일까. 그날은 도시의 풍요로움이 품기 어려운 따뜻함 속에 푹 빠져버렸다. 다음 일정이 아니었으면 하루쯤 묵어가길 청했을지도 모를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산 속에서 만난 결혼식

이방인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마을사람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재촉하여 마을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흙이 녹아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며 한참 따라 나와 전송하는 주민들.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이별의 절차는 길었다. 산골에서 우연히 만난 마을, 그리고 따뜻했던 결혼식과 친절했던 사람들… 지금 다시 찾아가라고 하면 자신 없지만, 기억 속에는 깊숙하고도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9.05.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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