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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안반데기로 떠나는
가을여행

by머니투데이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맞이하는 초가을
안반데기로 떠나는 가을여행

안반데기의 배추밭/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지금 이곳을 소개하기에는 조금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가을 여행지’를 언급하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안반데기.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말과 가장 어울리는 마을. 굳이 설명을 하자면 배추밭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산 속 마을이다. 떡메로 떡쌀을 칠 때 밑에 받치는 것을 안반이라고 하는데, 마을의 모양이 바로 안반처럼 우묵하면서도 널찍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안반데기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 안반데기의 행정주소지만, 그곳을 찾아간 사람들은 지상이 아니라 하늘 어디쯤에 있는 마을이 아닐까 혼돈스러울 때도 있다. 가끔은 구름 속을 거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금 그곳에 가면 행복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다. 도시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생량머리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감싸준다. 안반데기를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진가들이다. 그들은 하늘 가득 흐르는 별을 찍기 위해, 배추 밭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찍기 위해, 어둠 속에 해발 1,100m의 고원까지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안반데기를 다녀온 것은 지난주였다. 마침 동해 쪽에 볼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강릉에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안반데기는 강릉 시에 속하지만 횡계에서 가는 게 더 가깝다.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도 횡계 쪽이 훨씬 더 아가자기하다. 차를 갖고 갔지만 해발 1,100m까지 오르는 길이 그리 수월할 리는 없다. 길은 끊임없이 길을 낳으며 산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그러다 세상의 끝이 아닐까 싶을 때쯤에서야 안반데기에 닿는다.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카페 앞에 차를 세운다.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서 카페 겸 화전민사료전시관으로 쓰고 있는 곳이다. 차 문을 열자 바람이 먼저 달려와 반긴다.

안반데기로 떠나는 가을여행

안반데기 마을. 28가구가 고랭지 배추농사를 짓고 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아! 눈을 드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깊은 곳에 이런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가파른 구릉 위로 배추밭이 치마폭처럼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희게 바랜 길들이 능선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 하늘에는 온갖 형상의 구름이 마을을 기웃거리며 지나간다. 밭에서는 배추 수확이 한창이다. 안반데기에서는 모판에 배추씨를 뿌리고 20일쯤 지난 6월말~7월초에 모종을 내고 60일이 지나면 수확한다. 따라서 추석 전에는 대부분의 배추밭이 텅 비기 마련이다. 배추를 거둔 뒤에는 호밀 씨를 뿌려 친환경 퇴비로 쓴다.

 

대체 이 깊은 골짜기에 어떻게 이런 마을이 생겼을까. 처음에 누가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을까. 카페 앞 안내판에서 마을의 내력을 읽는다. 안반데기의 행정지명인 대기리는 큰 터가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한터’ ‘큰 터’ ‘대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1917년 강릉시 왕산면 관할이 되었다. 처음에는 대기3리까지만 있었지만, 1967년에 고루포기산 안반데기를 개간하면서 확장돼서 지금의 안반데기가 대기4리가 되었다. 개간을 한 뒤 감차‧약초 등을 재배하다가, 1995년 경작자들에게 농지를 불하하면서 현재는 28개의 농가가 거주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고랭지 배추 산지가 되었다.

 

배추밭 사이로 걸어간다. 돌 틈마다 담홍색 구절초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여름을 달궜던 태양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늘에 들어서면 품을 파고드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선득하다. 햇볕을 듬뿍 머금은 배추들이 푸른 보석처럼 빛난다. 수천, 수만 개의 보석이 구릉을 가득 메운 그림이라니. 작은 존재들이 어우러져서 연출하는 풍경 앞에서는 아름답다는 표현조차 궁색해진다.

 

밭에는 미처 캐내지 못한 돌들이 뾰족뾰족 몸체를 드러내, 얼마나 척박한 땅이었을지 웅변하고 있다. 돌도 배추와 함께 자라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오래 걷지 않아 멍에전망대에 이른다. 여기서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시야가 환하게 트이고 가슴이 시원해진다. 잠시 귀 기울여 정자와 나무의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밭에서 나온 돌로 쌓은 돌담에서 먼저 살다 간 사람들의 땀과 눈물을 본다. 초목을 베고 비탈을 곡괭이로 파고 소와 한 몸이 되어 밭을 일구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을까. 서늘한 바람이 자꾸 옷깃을 헤집는다. 오른 길을 천천히 되짚어 내려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땀이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긴다.

안반데기로 떠나는 가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