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어떻게 모두의 기억이 되었나

[컬처]by 웹진 <문화 다>

공통의 기억, 공통의 정서

지금은 은퇴한 지 오래된 80년대의 어느 교수님, 강의할 때마다 힘주어 우리 민족 문화의 특징이라며 청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않는 색채인식론이나 진도의 다시래기처럼 사람 죽으면 잔치 벌이는 전통을 거론했다. 그것만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사례들이 그것이었는데, 사실 외국 유명대학에서 무려 박사 학위씩이나 받으신 권위 있다는 교수님이 그런 말을 하니 넋놓고 강의를 듣던 무지몽매한 학생들이야 그런가보다 할밖엔.

 

한 세대가 훌쩍 자랄 만큼의 시간이 흘러 우리 사회가 ‘세계’를 알게 되면서 청색과 녹색에 대한 미분화적 인식은 알고 보니 고대로부터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며, 사람 죽으면 연희를 벌이는 문화 역시 다양하게 존재한(했)다는 사실들을 손쉽게 알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해야 할까, 더 넓은 세계와 만나지 못하고 지식과 정보를 축적시키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인간은 꽤나 엉뚱한 생각을 당당히 말하곤 한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와서 고기를 못 먹었어. 그래서 오죽하면 소꼬리로 곰탕을 다 만들었겠어~”

가난은 어떻게 모두의 기억이 되었나

소꼬리까지 음식으로 먹은 것은 그만큼 재료에 대한 이해가 높았음을 의미한다. 어떤 부위는 먹어도 되고, 혹은 안 되는지, 또 특정 부위를 어떻게 조리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를 오랫동안 고민하고 시험해 본 결과가 한 지역의 음식문화라면, 다양한 재료를 다양하게 조리해먹었다는 것은 우리의 가난을 설명하는 온전한 사례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의 전통적 식단과 요리법이 풍요로왔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의미한다. 이것을 구태여 음식문화의 폭과 깊이가 남달랐다는 식의 자문화중심적 설명이나 자기비하적 열등감을 부추기는 언설들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난 세기 이 땅의 문화론은 그 둘로 나뉘었다. 일부의 유난했던 고유함 예찬은 대다수가 피부로 느끼던 자기비하, 곧 가난에 대한 과도한 자기 동일시와 함께 신생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상반된 두 관점을 국민 만들기(nation-building)의 중요한 두 날개로 삼은 것은 남북이 하나였다. 세월이 지나 고유함에 대한 예찬은 ‘세계의 재발견’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져가고 있지만 자기비하의 집단적 기억과 경험은 아직도 현실적으로 폭력적 정치와 정치적 폭력을 상호 수반하며 일상을 배회하고 있다.

옛날엔 먹을 게 정말 없었어

15년 전, 지방의 한 문화원으로부터 지방 촌로들의 생애사와 그들의 인생 회고담을 ‘사진으로 보는 지역 현대사’라는 기획 의도에 맞게 글로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연히 지방 촌로들이 소중히 보관해 온 빛바랜 사진들과 20세기 지역사의 의미 있는 장면이 될 만한 사진들이 기본 자료가 되었다.

 

문화원이 선정하여 소개해준 지역의 촌로들은 당시 이미 여든이 넘은 분들이었다. 그러니까 대략 1920년대 초에 태어나 40년대 중반이나 후반에 결혼하고 이후 중년의 시기에 조국근대화의 말단을 실제로 책임지고 막 태어나기 시작하던 손주들을 안고 올림픽을 보던 세대인 셈이다. 문화원이 선정한 지역 촌로들이 모두 남성들이었다는 한계가 있지만, 여하튼 청탁받은 원고를 마무리하고 넘겨줄 무렵 불현듯 묘한 궁금증이 들었다.

가난은 어떻게 모두의 기억이 되었나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그리고 누구나 별 의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오고 있는 그 말을 촌로들도 역시나 힘주어 말했다. “옛날엔 정말 먹을 게 없었어, 정말 가난했고 배가 고팠지.” 그들이 젊어서 겪은 과거의 고난은 이 말 한 마디로 모두 설명되었다. 그 옛날이 대략 어느 기간인지, 먹을 게 없었다는 말이 먹거리의 양을 말하는 것인지, 종류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바쁘게 일하다 보니 입에 맞는 별미들을 먹을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인지 등등의 의문은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가난, 현재의 풍요”라는 절대성을 부여받은 인식의 틀 앞에서 감히 내보일만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불티나게 팔린 바로 그 이유 - 나는 그때 거기에 있었고, 너는 없었잖아.

 

그런데 문제는, 수많은 자료에 의해 국가적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 증명되는 배고팠던 “옛날”의 그 가난을 살아온 촌로들이 꺼내어 보여주던 젊은 날의 사진 속 그들은 지금 젊은이들의 얼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한눈에 파악할 만큼 말이다. 지금도 구한말 한국, 또는 100년 전 한국을 찍은 사진들, 또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의 얼굴과 체형을 보면 정말 먹을 게 없었을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외국인이 찍어둔 각종 사진첩들, 새로 발굴되어 언론에 나오는 숱한 과거의 사진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한 사진들, 하다못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진을 보라.

 

본인의 절절한 가난과 굶주리던 젊은 시절의 가혹한 노동을 말하면서도 1940년대 초에 결혼하면서 색시에게 파마시켜준 사진을 보여 주던 한 영감님은 둘 다 볼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결혼사진까지 보여줬다. 그와의 대화 도중 틀어놓은 TV에서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북한 어린이의 사진이 나오고 있었다. 화면을 본 그 영감님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북한에 퍼줘 봤자 죄다 군량미로 쓰고 인민들 굶어 죽어가. 우리는 안 굶잖아, 이게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야~!”

가난은 어떻게 모두의 기억이 되었나

아, 맞다. 이게 다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다. 가난을 구제한 게 그의 덕분이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먹을 게 없을 만큼 가난했다고 생각하게 된 게 말이다. 집권의 근거를 경제 개발에서 찾다 보니 한국은 가난해서 배고픈 나라여야 했다. 그러나 당시는 식민모국이었던 몇 나라를 제외하면 전 인류의 대부분은 다들 사는 게 비슷비슷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른다. 마치 우물란 개구리였던 80년대의 어느 교수처럼. 사실, 나무위키의 ‘한민족의 식사량’ 항목을 보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듯 우리 조상님들은 참으로 많이 먹고 살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먹을 게 없어 배고팠던 과거를 ‘기억’한다. ‘웨스트월드’ 속 사이보그들의 심어진 기억처럼 말이다.

겨레의 기억이 된 일부의, 일시적 경험

“옛날”이 과학기술이 발전한 지금보다야 식량자원의 절대 생산량이 적었을 수 있지만, 반면에 인구도 역시 적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20세기 초반보다 거의 4배 가까이 증가한 인구를 감안하고, 생산된 음식의 상당량이 버려지며, 많은 음식들이 배고픔과는 무관하게 기호나 그밖의 목적으로 과잉생산 과잉소비 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밥을 굶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면, ‘배고픔’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자원의 생산 문제가 아니라 효과적인 분배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결국 빈부 격차와 계급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식량 생산의 절대량이 오늘날보다 크게 적고 심각한 수탈 상황이었음에도 민족 전체가 상시적으로 기아 상태에서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절대 빈곤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물론 분배의 문제가 반드시 사회적 격차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늘 먹을 음식과 내일 먹을 음식을 나눠놓는 것도 분배의 문제가 될 터인데, 음식이 모자라지 않더라도 제때 못 먹는다면, 몸은 모진 기억으로 그 경험을 남겨 둔다. 반면에 아무 곳에서나 쉽게 음식을 구할 수 있다면 몸은 그것을 풍요라고 느낀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가난은 상대적 개념이다.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내가 가난한지 가난하지 않은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정우성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정우성이 잘 생겼는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비교 대상이 있어야 가난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비교한다. 우리는 과연 그러한 비교 대상의 선정이 과연 타당한가를 검토해 본 적은 있는가? 가난과 배고픔을 비교하려면 동시대의 다른 나라들의 같은 계급의 사람들과 비교해야 우리의 상태가 특별히 그들보다 못한지, 비슷한지가 드러난다. 과거와 현대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미국의 중산층이나 그 이하 사람들도 100년 전 보다야 지금이 더 풍요롭다고 느낄 것이다. 영국의 중산층이나 그 이하 사람들도 당연히 100년 전보다 지금이 더 풍요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나라들의 노인 세대들이 현재의 풍요를 과거의 어느 총리, 어느 대통령 한 사람 덕분이라며 맹목적인 신봉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럽다.

 

인간은 누구나 노동자이자, 소비자다. 노동자와 소비자가 따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노동하던 사람도 노동이 끝나면 소비자가 되며 소비자도 일터에 가면 노동자가 된다. 생산 과정은 그 자체로 소비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동자와 소비자가 따로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착한 사람이 따로 있고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는 지배층이고 누구는 피지배층으로 나뉘는 것도 같지만 그것도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현상이고 개념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배고픔과 가난도 어쩌면 일부 사람들의 상시적인 경험이거나, 또는 모든 사람들의 일시적인 경험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언뜻언뜻 느끼는 빈곤감, 때때로 배고플 때 바로바로 손쉽게 배를 채우지 못한 기억들이 사회 전체의 흐름과 맞물려 공통의 기억이 되고, 그것에 불을 붙여 경제 발전의 공을 권력 독점과 연장의 정당성으로 치환시킨 지도자가 존재했다.

 

이것은 가난과 배고픔의 경험이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보다는 어떤 세력이 선과 악처럼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개념이자 삶의 편린과도 같은 현상들이 모두에게 반복되던 일상 경험으로 기억되게 할 만큼 강력한 주술을 걸었으며, 우리는 왜 아직도 그 주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김선우(문화 칼럼니스트)

2017.08.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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