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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류주연 연출의 '경남 창녕군 길곡면'

2009-2018,
의도하지 않은 살인

by웹진 <문화 다>

순식간에 행복이 무너졌다. 그 자리에 현실이 턱! 하니 자리했다. 결혼 3년 차 부부인 선미(김선영 분)와 종철(이주원 분)이 꿈꿨던 필리핀 최고급 리조트에서의 여유로운 휴가, 월풀에서의 반신욕, 그리고 스테이크 옆 파의 아스파라거스화 등 이 부부의 행복한 하루하루는 상상과 꿈, 그리고 소소한 행복을 주는 최면에 의해 지속된다. 앙피르란 129만 9천 원짜리 고급 서랍장을 무리하게 사긴 하였으나 응집력 강한 행복한 상상들로 인해 이 신혼부부는 냉혹한 현실에서 휘청거리지 않고 살 수(혹은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선미와 종철의 삶에서 서울 혹은 그 근교에서 살아감에도 도시적 삶이 주는 치열함, 냉혹함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부부는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그들만의 행복을 오롯이 보존하고 향유할 수 있는 어떤 낙토에서 살아가는 듯하다. 그리고 무대는 이에 응답하듯 그들의 삶을 사실성으로부터 잠시 비껴나간 연극적 공간 속에 세팅해 놓는다. 관객은 ‘잠시’ 연극을 본다.

2009-2018, 의도하지 않은 살

현실 앞에서

프란츠 크사버 그뢰츠Franz Xaver Kroetz의 <오버외스터라이히Oberösterreich>를 번안한 <경남 창녕군 길곡면>(이정준 번역, 류주연 연출)은 마트 판매원 선미와 같은 직장의 배달원 종철. 이 두 인물로 극이 전개되는 총 3막 5장의 2인극이다. 빡빡한 생활이 쉬이 예상되는 이들의 삶이지만 선미와 종철은 연극 무대에 갇혀 큰 욕심 부리지 않으며 신혼부부로서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현실의 냉혹함은 그들의 공간을 ‘아직’ 침범하지 않는다. 무대 바닥에 흰 테이프로 구획된 선 안쪽에서, 그리고 그들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회전 가능한 커튼의 보호를 받으며 앞서 말한 행복한 환상을 즐기며 그들의 낙토를 구축해간다. 그런데 가만, 암전마다 시계초침 소리가 제법 큰 소리로 들린다. 뭔가 불길하다. 낙토의 공간과 현실의 시계초침. 이 둘은 조화를 이루기보다 충돌로 무대를 어색한 분위기로 긴장시킨다. 그럼에도 선미와 종철의 삶은 ‘아직’ 행복하다.

2009-2018, 의도하지 않은 살

관객들은 연극적 환영과 인물에 대한 동화가 아닌 철저하게 연극임을 증명하는 무대와 두 배우가 연기하는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관람한다. 이 부부의 달달한 신혼생활, 끊임없이 오고 가는 위트 있는 부부의 일상적인 대화들, 두 배우의 찰진 호흡과 검증받은 연기력 등을 즐기며 관객들은 <경남 창녕군 길곡면>이라는 ‘연극’을 즐긴다. 무대 속 배우들도,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밖과 단절된 어두운 극장 안에서 현실의 치열함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극 초반 객석의 분위기는 관객들의 끊이지 않는 웃음으로 유쾌하다. 연극은 여기까지이다. TV드라마에 나온 반가운 얼굴의 선미/김선영이 종철에게 임신을 고백함으로써 작품은 연극에서 현실로 이동한다.

 

행복한 환상은 임신으로 흔들린다. 임신은 축복보다는 현실을 마주케 한다. 고백만으로 아직 환상/연극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환상/연극은 돈이 출현하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무대 밖을 빠져나간다. 종철의 180만원의 월급은 이들을 낙토가 아닌 서울로 호출시킨다. 탁자에 놓인 계산기는 이 부부에게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현실 앞에 선 선미와 종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겨 보지만 답이 없다. 답 없음으로 인한 부부의 갈등, 그 과정에서 어떤 예고도 없이 이들의 삶은 흰 테이프 선 밖으로 삐져나온다. 매우 기습적으로 침범한다. 환상, 행복한 상상, 낙토가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 앞에 일순 무너진다.

공포의 확산

종철의 낙태권유와 이에 대한 선미의 강력한 거부가 오가는 사이에 이 둘의 갈등은 선미가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고집함으로써 타협 아닌 타협을 한다. 이 타협의 과정에서 종철과 선미는 자신의 위치를 세상으로부터 확인받는다. 고졸이라는 학력, 이 학력이 부딪혀야 하는 사회적 시선과 편견, 그리고 닫혀 버린 가능성의 벽과 이에 따른 임금의 한계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선미는 모성의 힘으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품는다. 종철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어차피” 자신들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2009-2018, 의도하지 않은 살

선미와 종철이 겪은 고통은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 사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다. 아내 이모 씨(29세)를 살해한 김모 씨(31세), 살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낙태에 찬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우리 형편에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는데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때 신경이 폭발했습니다.” 이어 부인을 살해한 김모 씨는 말한다. “전 살인자, 살인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으니까요.”라고. 궁핍한 형편은 의도적이지 않은 살인자를 만든다.

 

막연한 희망이기에,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서 일어난 김모 씨의 살인 사건이 있기에, 선미와 종철의 타협은 희망과 불행 사이에 걸쳐 있다. 지금/여기의 일상적인 형편이 마주하게 되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행위들은 현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의 공포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2009년 초연 이후 지금도 이 공포는 서울에서 경남으로. 그리고 또 다른 지역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 중이다.

2009-2018, 의도하지 않은 살

이주영(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