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수는 왜 비난받는가: 방탄소년단과 축구 대표팀의 공통점

[컬처]by 웹진 <문화 다>

축구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수비수 장현수가 애석하다. 둘 다 패한 스웨덴과 멕시코와의 대전에서 각각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는다. 멕시코전에서는 태클을 잘 못해서, 스웨덴전에서는 패스를 잘 못해서 연쇄반응 끝에 실점으로 이어졌다는 논리다.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은 구름같이 들고 일어섰다. 스포츠 평론가들은 이를 책망하다 지쳐 두 손 들었다. 외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소식을 전했다. 많은 네티즌들은 경질, 탄핵, 급기야 사형까지도 요구하고 나섰다.

 

반대로 영웅도 탄생했다.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공격수 손흥민, 여러 선방을 펼쳤던 조현우 골키퍼 등등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스포츠 팬덤의 지나친 호오 극단은 모두 개인중심주의를 딛고 벌어진다. 스포츠 개인영웅주의는 왜곡된 신자유주의를 만나 강화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월드컵과 같은 국가 간 경기를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장현수는 왜 비난받는가: 방탄소년단과

‘조국’에 대한 상반된 관점

한국근현대사를 다룬 박건웅 화백의 장편만화 『꽃』(새만화책, 2004)에서 험한 지리산 산골을 도피 중이던 빨치산 여대원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이라는 이 노래는 시인 전동우가 작사한 북한노래로, 『조국과 청춘』 1집(1992년)에도 실려 있어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대가 한그루 나무라면은 이 몸은 가지에 피는 잎사귀
찬 바람 불어와 떨어진데도 흙이 되어 뿌리 덮어주리라
아~ 나의 조국아 흙이 되어 뿌리 덮어주리라

반 세기가 넘은 지금 어느 소설 한 구절은 '헬조선'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켜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2015, 170면)

자신이 속한 국가에 대한 이토록 상반된 태도는 ‘조국’에 대한 '헌신' 즉 희생하며 돕는다는 보수적 가치의 유무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전자는 헌신적이라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전자에서 국가와 국민이 '나무와 잎사귀' 즉 종속관계에 있다면 후자는 쌍방이 맺는 계약관계다.

 

국가에 대한 이렇게 상반된 관점은 대한민국에만 특유한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 국가의 위상은 세계 어디서나 유럽 지성사에서 정립된 공화주의(civic republicanism)와 자유주의(liberalism) 간의 반복되는 경합으로 특징지어졌다. 페리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한나 아렌트 등으로 대변되는 전자 대 로크, 프랑스 인권선언 등의 후자 간의 대결이다. 식민과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 대한민국의 좌우는 정확히 이와 대응되지는 않는다.

 

다만 외침과 전쟁으로 내부 결속력이 컸던 20세기 중엽을 지나 이제 세계 10위 경제대국 속의 ‘모순’에 절망하는 21세기로의 변천은 대한민국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를 위와 같이 꽤나 드라마틱하게 변화시켰다. 어떤 모순인가? 시민권을 다른 목적을 위해 취사선택하는 것쯤으로 여기게 된 상황을 두고 평론가 소영현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일상을 미시적으로 장악해가면서 발생한 부수효과" (「헬조선에서 탈조선을 꿈꾼다는 것」, 『창작과 비평』 2016년 여름호, 306면)라고 분석했다. 맑시즘적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 파괴와 횡행하는 각자도생의 규준은 20세기 후반부터 전세계를 장악한 신자유주의의 여파인 셈이다.

‘국민’을 창출하는 월드컵

‘헬조선’과 이어지는 ‘탈조선’ 담론은 ‘한국인’(≠한인) 됨을 계약으로 인식하는 변화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월드컵의 국가주의와 영웅주의가 보여주는 파괴적인 생명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일단 신자유주의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는 '집단 대 개인'의 이분법적 시각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집단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다. 계약적 시민권 아래에서도 이런 시민이 국가에 부여하는 소속감의 신성성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월드컵이라는 스포츠부터 ‘국민’을 상정한다. 4년 마다 장소를 옮겨가며 지구상 거의 모든 국가별로 팀을 이뤄 경쟁한다. 즉 경쟁의 주기, 경쟁의 장소, 경쟁의 주체가 국가 정체성을 상정하고 정의된다. 이는 역시 4년 주기로 올림픽 축제가 처음 열렸던 기원전 8세기 그리스 도시국가의 상황과 상통한다. 당시 올림픽은 각 도시국가 단위를 넘어 공통적으로 최고신인 제우스를 숭배하는 행사였다. 당시 열렸던 달리기 따위 몇몇 운동 종목들은 종교의례를 넘어 각지에서 모여든 도시국가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즉 도시국가연합이라는 대규모 집단을 확인함으로써 소규모 도시국가 결속을 도모하는, 두 정체성 사이의 상호작용이 특정 인간의 몸 움직임을 각본 없이 시연하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 주기적으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규칙이 지배하는 경기 속 생동하는 몸들에 초점을 맞출 때 국가들로 구성된 세계를 확인하고 그 속에서 나의 자리를 국가라는 단위로 정립하는 것이다.

장현수는 왜 비난받는가: 방탄소년단과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스포츠 영웅

그러나 국가정체성의 재확립이 ‘공동체에 대한 헌신’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나의 이름일진대 국가의 조직, 구성원들까지 나의 분신으로 여기는지의 여부는 별개다. 한 집에 살면서 화목하면 좋겠지만 서로 으르렁 댈 때도 있다. 스포츠 영웅 만들기가 여기에 한몫 한다.

 

스포츠 영웅의 탄생은 신자유주의−20세기 냉전 시기로부터 이어진 국경을 넘어서 자본의 영향력을 허용하는 정책적 경향−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의 승리는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구였지 상업적 성공을 획책하는 미디어가 꾸며낸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는 스포츠 영웅을 탄생시켰다기보다는 그 예측된 창조력의 생동으로 신성시된 몸의 소유자 스포츠 영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한다. 14세기 중국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유비는 완벽과는 동떨어진 인물로, 정이 너무 많고 유약한 단점까지 그의 인격을 형성했다. 신자유주의가 그려내는 영웅은 그렇게 구체적·현실적인 인격이 아니라 매력적인 이미지의 조합으로서만 존재한다. 만들어진 모습만을 보고 이에 열광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기수 방탄소년단

축구 대표팀의 손흥민과 장현수는 그렇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 이들이 ‘한솥밥’을 먹고 경기내용 및 결과가 선수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의 산물이라는 최소한의 탈개인적인 관점은, 신자유주의적 영웅서사에서는 적극적으로 배제된다. 패배는 팀의 결과라기보다는 개인의 일탈이 된다.

 

이런 점을 가장 강렬하고 파급력 넘치게 보여주는 기수는 다름아닌 빌보드 앨범순위 1위의 방탄소년단이다. 구조와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대척점에 서 있는 나르시시즘의 극단적인 개인중심주의가 이들의 노랫말과 성공스토리 양쪽에 녹아 있다.

왜 나의 인생에서 나는 없고 그저 남의 인생들을 살게 됐어
이건 진짜야 도박도 게임도 아냐 딱 한번뿐인 인생
넌 대체 누굴 위해 사냐
9살 아니면 10살 때쯤 내 심장은 멈췄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봐 내 꿈은 뭐였지?
어 진짜 뭐였지
- 'Intro : 0!RUL8,2? 중'

‘꿈이 뭐냐’는 질문에 상품성 높은 대답을 끊임없이 찾아내야 하는 무한경쟁시대를 비판하기보다는, 반대로 상품성 높은 ‘꿈’을 구상해 내지 못한 원인을 ‘남’에게로 돌린다. 그러나 왜 ‘나만의’ 꿈을 꿔야 하고, 왜 토해내야 하는지에 대해선 노래는 묻지 않는다.

 

꿈을 꾸는 이는 꿈을 꾼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기억된 꿈은 꿈의 기억일 뿐 꾸는 꿈이 아니다. 방탄소년단은 꿈의 허상을 그려줌으로써 어디에선가 이상향을 성취할 수 있었던−그러나 실패한−독보적인 자아관을 모두에게 심어준다. 그들 스스로의 유명세도 국가와 미디어, 자본의 합작품이라는 배경은 생략되고 오로지 바닥부터 올라 온 개인의 성취로 전사된다. 다시 한 번 정해진 규칙 속에 역동하는 몸과 자아의 생명력이 신성시된다. 신자유주의 시대 영웅이 개인에게 호소하는 방식이다.

유재석이 하는 말은 진실?

‘만들어진 모습’은 비단 스포츠나 대중문화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전달한다는 뉴스들도 이제는 '유재석의 얼굴'을 해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단다(임찬종 SBS 기자가 페이스북에서 JTBC 뉴스를 평가하며). 공감과 같은 감성 개념이 언론의 새로운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정상을 바로잡기를 바랐던 현대 한국 언론의 아이콘 손석희의 공감 중심 저널리즘은, 바로 그 공감을 유용성에 대한 경계 없이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식 개인주의를 방조했다. 히틀러의 나치당 흑색선전의 대명사 괴벨스는 요즘 한국사회 진보·보수 양쪽 모두에서 서로를 비판할 때 사용한다. 양자 모두 서로가 흑색선전과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괴벨스의 무기는 가짜 팩트가 아니라 교감을 이끌어내는 힘이었다. 공감에 만족하고 안주할 때, 즉 진실을 판별하지 못하는 지각의 한계를 타인이 메꿔주도록 허락할 때 우리 모두는 그렇게 괴벨스를 닮는다.

 

'강력 처벌'도 그렇게 유행어가 됐다. 장현수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에서 특정 폭력사건, 욕설을 남발하는 재벌총수 등등 개인에게 집중포화를 쏟는 경향은, 배의 침몰과 승객의 수장을 먼저 탈출한 선장 탓으로 돌려버리는 개인일탈론이 도처에 만연했음을 보여준다. 청산하자는 ‘적폐’가 사람인가 구조인가? 애매한 정의는 정치적 언설로 다수의 지지를 받을지라도 오해는 그늘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공감은 동정심 혹은 정의감과는 다르다. 공감은 근시안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기대하기 어렵고 편협하고 인종차별적이며 폭력을 유발할 수 있다. 선장과 고장난 배, 폭력배와 ‘욕쟁이’를 키운 정경유착의 역사를 돌아보려는 느리면서 끈질기고 ‘우리’를 벗어나 타인들과도 소통하는 공감능력이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깝다.

 

최근 영웅들의 탄생 장소 1위는 유투브가 아닐까. 짧은 말(트위터)에서 사진과 묘사(인스타그램, 페이스북)로, 이젠 더욱 강력한 교감기능을 탑재한 영상공유의 시대가 왔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모호한 SNS는 앞으로 영상만이 아닌 가상현실(VR) 혹은 아예 실제현실까지 공유하며 인간 삶의 전 영역을 상품화 해 나갈 것이다. 그때 잊혀져 가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반대로 빠르고 쉬우며 자극적인 종류의 공감이 우리 일상의 소통을 점령해갈 것이다.

 

규칙에 종속되는 경기에 함몰될 때 벌어지는 일들이다.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가는 ‘놀이’에 눈을 돌려보자. 주어진 틀을 벗어나 새로운 해방구 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느리고 넓은 공감에 귀를 기울여보자.

 

오영훈(문화칼럼니스트)

2018.06.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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