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전자오락실!

[컬처]by 웹진 <문화 다>

복고를 내세운 케이블 TV 드라마가 안방을 점령했다. TVN의 <응답하라 1988> 얘기다. 이 드라마는 전통적인 드라마의 문법을 벗어나 있다. 특별한 악역도 없고, 치열한 갈등도 없다. 누구나 겪을 법한 보통의 일상이 이어진다. 엄밀히 말해 드라마틱한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다.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일 때도 있다. 평범한 일상을 흥미롭게 만드는 힘은 특별한 ‘편집’에 있다. 이 드라마는 시간을 토막낸 뒤에 이곳저곳 흩뿌려서 배치한다. 중요한 힌트는 꽁꽁 숨겨놨다가 가장 마지막에 보여준다. 이런 편집은 작가와 시청자와 벌이는 일종의 ‘게임’이다. 작가와 연출가는 잘 짜여진 퍼즐처럼 장면들을 배치한다. 바둑기사 최택을 잘 챙겨주라는 특명을 받고 중국에 도착한 덕선은 식당에서 음식만 ‘폭풍흡입’한다. 시청자들은 생각한다. 도대체 쟤는 왜 따라간 거야? 하지만 덕선이 식사를 마친 이후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렇게 숨겨졌던 장면은 최택이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뒤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수수께끼는 풀렸다. 역시 최택에게는 덕선이뿐이구나! <응답하라 1988>의 모든 에피소드는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일상이 흥미로운 퍼즐이 된다. 화면에 숨겨진 수많은 힌트들은 시청자들의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추측이 TV 바깥에서 공유되면서 1988년과 2015년은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된다. 

응답하라 전자오락실!

한편 드라마의 공간은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소품들로 가득하다. TV에는 80년대 익숙한 광고들이 흘러가고, 그 시절의 음반들이 기억의 악보를 연주한다. VTR, 휴대용 카세트, 잡지, 영화포스터. 그리고 수많은 소품들 사이에 그 시절의 게임이 있다. 혼자서 노는 루빅스 큐브부터 여럿이 노는 ‘부루마블’까지 놀이의 도구도 다양하다. 쌍문동 아이들을 수시로 모이게 만드는 <부루마블>은 신도시 개발에 발맞춰 부동산의 위력을 간접 체험하게 해줬다. 황금열쇠 카드에 새겨진 우주왕복선으로 아이들은 전 세계 어디든 여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드라마 공간을 둘러봐도 전자 게임은 찾아보기 어렵다(최택의 방에 패미컴이 보이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사용한 적은 없다). 80년대는 아직 컴퓨터와 비디오게임이 본격적으로 집안으로 침투하기 전이었기 때문. 당시 전자 게임은 집 바깥 공간에 있었다. 전자오락실, 혹은 지능계발실로 불리던 바로 그곳 말이다. <응답하라 1988> 역시 쌍문동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전자오락실을 꾸며놓고 몇 가지 게임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방송된 <응답하라 1988>에는 모두 세 가지 전자게임이 등장한다. 1화 ‘손에 손잡고’에 등장하는 <하이퍼 올림픽>은 코나미의 히트작이다. 장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포츠 게임이다. 놀랍게도 이 게임은 정말 게이머의 체력을 요구한다. 레버 조작 없이 오직 버튼으로만 조작하는 게임으로, 초당 버튼을 몇 번을 누를 수 있는가, 즉 연타력이 곧 실력으로 이어지는 게임이다. 열심히 근육을 사용하다보면 온몸에 땀이 흐를 정도다. 이 드라마에서 전자오락실을 매개하는 인물은 정봉이다. 80년대 오타쿠로 설정된 그는 전자오락은 물론 우표수집, 루빅스 큐브 등등 당시 유행하던 거의 모든 서브컬처에 심취해 있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공부 빼고는 모르는 것이 없다. 1화에서 정봉이 오락실에서 <하이퍼 올림픽>을 즐기는 동안 덕선이는 언니 몰래 입고간 옷을 되돌려 놓기 위해 집으로 내달린다. 카메라는 정봉이가 오락실에서 버튼을 연타하는 장면과 덕선이 질주하는 장면을 교차 편집시킨다. 게임을 통해 연결된 두 장면은 자연스럽게 정봉이 덕선을 조작하는 화면으로 치환된다. 만약 <하이퍼 올림픽>을 실시간으로 경험했던 세대라면 덕선의 달리기 속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는 마침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전자오락실의 <하이퍼 올림픽>은 88년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행동을 동시에 풀어내는 멋진 소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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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게임은 <보글보글>. 1986년 타이토에서 발매한 액션게임이다.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공룡이 된 주인공이 여자친구를 구출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려면 모든 적을 물리쳐야 하는데 유일한 공격수단은 입에서 내뿜는 비누방울. 적을 방울(거품?)에 가둬서 등에 있는 뾰족한 가시로 터트리면 오케이. 많은 적을 방울에 가둬서 한꺼번에 터트리면 더 많은 보너스 점수가 기다리고 있다. 다만 너무 오래 가둬두면 적이 다시 빠져나오니 눈치껏 제거해야 한다. 한 스테이지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도 고래가 등장해 공격해오니 조심. <보글보글>의 재밌는 점은 공격수단이 이동수단을 겸한다는 점이다. 방울은 스테이지의 공간에서 공기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데 이 방울에 올라타면 점프해서 갈 수 없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물론 쉽지는 않다 조작을 잘못하면 방울이 터져버리거나 아래로 추락해버린다. 2인 플레이를 통해 서로 도와주면 조금은 수월하다. 어쨌든 정봉은 연습을 거듭해 100개의 스테이지를 모두 클리어하고 여자친구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오락실을 나와 동네 건달들에게 쫓기던 정봉이 만옥과 만나서 운명적으로 ‘여자친구’를 만드는 장면은 <보글보글>의 또다른 엔딩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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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게임은 그 유명한 <갤러그>다. 남코에서 1981년에 발매한 슈팅게임이다. 플레이어는 끝없는 우주를 항해하며 벌레처럼 생긴 외계인 편대를 상대해야 한다. 이전의 인베이더 같은 슈팅 게임보다 적들의 인공지능이 발전해서 다양한 패턴으로 공격해온다. <갤러그>는 파워업을 하는 방법이 꽤 극적인데 게임 중 거미처럼 생긴 적의 광선에 맞으면 아군이 붉은색으로 바뀌면서 끌려간다. 이를테면 적에게 ‘납치’된 상태. 거미는 포획한 아군 비행기와 함께 공격해온다. 이 상태에서 적을 없애는 데 성공하면 멋진 효과음과 함께 아군 비행기가 돌아와서 멋진 ‘합체’를 시전한다. “동료를 구출해서 힘을 합해 보다 강해진다”라는 이야기를 대사 할 줄 없이 구현하는 셈이다. 이제 플레이어는 미사일을 두 발씩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적의 탄에 맞을 확률도 높아졌다. 공격력이 강해지면 지나치게 쉬워질 수 있는 단점을 회피의 어려움으로 극복한 것. 구식이지만 세련된 밸런스 디자인이다. 과연 빈티지 게임의 자격이 충분하다. 극 중에서 정봉은 1등 자리에 자기 이름 이니셜을 새기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재바둑기사 최택은 바둑대회 하루 전날 동네 오락실에서 정봉의 점수를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지는 것을 절대 참지 못하는 최택. 역시 최고의 승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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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은 방송 도중에 광고를 보여준다. 당연히 최신 스마트폰 게임들의 광고도 포함되어 있다. 이병헌, 이정재, 정우성, 하지원 같은 톱스타들이 게임 세계 속에서 어서 이곳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광고에 등장한 배우들의 개런티만으로도 과거의 게임 몇 작품은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엄청난 물량공세로 마케팅을 펼치는 <붐비치>도 있다. 그만큼 게임 시장은 커졌고, 소수가 아닌 대중의 문화가 되었다. <응답하라 1988>을 시청하면 나도 모르게 <갤러그>와 <붐비치> 사이를 오가게 된다. 무려 30여 년의 시차다. 돌이켜보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사람들은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지금 시대에 사라져버린 ‘골목길’과 ‘이웃의 정’을 그리워한다. 최신 스마트폰 게임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보글보글>과 <부루마블>이 그리운 것은 게임 자체의 재미보다 같은 공간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디지털 게임도 결국 사람의 놀이다. 자, 이제 당신이 게임의 호명에 응답할 시간이다.


글 이상우(게임평론가)

2016.01.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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