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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선생님의 일기'…
태국엔 있는데, 한국에선 실종된 멜로

일기장을 매개로 다른 시간대의 남녀가 소통한다는 설정을 들었을 때, 아기자기하면서 감성적인 영화일 것 같다는 기대를 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들었을 때, 어떤 선입견을 품고 말았다.

 

개인적인 기억 속에 태국이라는 곳은 북적거리고 번잡하다는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었다. 멜로 보다는 무에 타이 등이 등장하는 '옹박'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고,(자연스레 이는 액션 영화를 연상하게 했다) 서정성보다는 활기찬 분위기를 환기하는 게 태국이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신선했다. '선생님의 일기'는 태국이란 공간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선생님의 일기'… 태국엔 있는데,

태국의 수상가옥

황금 사원, 석회질 물, 코끼리, 열대성 기후, 무에 타이, 싱하 맥주(정말 맛있다!)…. 태국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들이다. '선생님의 일기'는 외부인이 상상하는 태국의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대신, 한적한 자연 속에 있는 수상가옥을 주요 무대로 삼는다.

 

물론, 태국 여행 중에 수상가옥을 본 적이 있다. 도심의 근처, 관광지와 인접해 있던 수상가옥은 신기했지만,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영화를 통해서 다시 접한 수상가옥은 고요하면서 서정적이고 낭만까지 모두 갖춘 공간이었다. 관광객이 멀리서 바라본 태국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선생님의 일기'의 카메라는 이를 아름다운 영상미로 담아내기까지 한다.

 

물 위에 떠 있는 학교엔 극히 적은 숫자의 아이들이 있다. 이곳에 발령을 받은 앤(레일리 분야삭)과 송(비 스크릿 위셋케우)은 통신 기기를 사용할 수 없고, 전기도 도시처럼 쓸 수 없다. 강원도로 전근 갔던 '선생 김봉두'의 김봉두처럼 외부와는 격리된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설정 덕에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기를 통해 시간을 넘어 소통한다는 설정은 거짓말 같지만, 이 수상 학교의 아날로그 감성 속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학교의 아이들은 순박하며, 도시의 아이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두 주인공 앤과 송 역시 아이들처럼 해맑고 순수하다. 아름다운 풍광에 인물들이 자연스레 겹쳐지고, 영화 전체가 맑고 깨끗한 느낌을 전달한다. '선생님의 일기'는 도시에서는 실종된 소박한 삶과 교육관, 그리고 사람 간의 소통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고 있다. 그렇게 수상가옥이라는 공간의 서정성이 인물을 거쳐 영화 전체에 전염된다.

'선생님의 일기'… 태국엔 있는데,

아시아 멜로 영화의 계보

자극이 덜한 이야기, 순수한 인물, 아날로그적인 분위기, 첫사랑 같은 설렘, 그리고 서정적인 영상미. 이는 '선생님의 일기'의 특징이면서, 근래 인기 있었던 아시아권 멜로 영화의 코드이기도 하다. '나의 소녀시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그리고 더 이전에 있었던 '말할 수 없는 비밀' 등의 영화가 이런 코드를 공유했고,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순수한 멜로 영화가 인기를 얻고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산업적 측면에서 본다면, 멜로물은 적은 예산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할리우드의 마블 등이 자랑하는 대규모 블록버스터를 아직 제작하기 힘든 대만, 태국 등의 아시아 국가에 멜로는 그들이 가진 자원만으로도 탄탄한 작품을 만들어 보일 수 있는 좋은 장르다.

 

한편, 관객에게는 모바일 시대 이전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멜로는 매력적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소통하고, 사람 간의 직접적인 교류가 줄어든 이 시대는 과거의 인간관계를 그립게 할 때가 있다. (국내에서 '응답하라' 시리즈가 일으킨 돌풍을 이와 유사한 심리적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아시아권 멜로 영화의 한계는 뚜렷하게 보인다. 과거의 향수와 서정적인 분위기 외엔 진부한 클리셰, 전개 및 작위적 설정이 많다는 것이다. 멜로 영화가 의도한 분위기가 희미해질 때, 동시에 이야기는 힘을 잃고, 전개는 진부해 진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이후의 멜로 영화는 아름다웠으나 새롭지는 못했다. 그렇다해도 당분간 이런 장르의 영화가 더 만들어 질 것이고,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국내외로 상처받은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눈앞의 현실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이들은 영화에서라도 감정적 위로를 받으려 할 테니까.

'선생님의 일기'… 태국엔 있는데,

한국의 멜로 영화

아시아권에서 보이는 멜로물의 흥행이 한국 영화사에서도 이미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태국과 대만보다 영화산업의 덩치가 커진 한국은 멜로물이 전성기였던 시대를 통과했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국내에서 흥행한 이후, 한국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멜로 영화가 전성기를 달렸다.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 '시월애', '동감', '클래식', '연애소설'…. 그러다 멜로 영화의 흥행은 잠시 주춤거렸고, 2012년 '건축학 개론'이 등장하고서야 극장가는 잊었던 멜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멜로는 비주류 장르로 분류된다. 한때, 지배적이었던 장르가 이렇게 쉽게 찬밥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관객의 취향이 급격히 변한 것일까. 큰 원인 중 하나는 '대박'을 위한 천만 영화를 위한 기획이 제작사에게 중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한국 영화는 흥행을 위해 '신파, '웃음'이라는 코드가 꼭 있어야만 하는 시기도 있었다. 그 과정을 겪으며 장르적 균형이 상당히 깨져버렸다.

 

이야기의 다양화, 잃어버린 감성의 복구 등 멜로라는 장르가 국내 영화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르의 회복이 절실한 이유는 실종된 여자 주인공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무작정 멜로라는 장르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배우는 (여전히) 손예진, 김하늘, 전지현 등이다. 20대 여배우가 없다는 지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그 배우들이 연기할 장이 부족하다는 게 사실 더 큰 문제다. 현재 영화계엔 김고은, 심은경, 박소담, 김태리 등 관객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좋은 배우들이 많다. 그들의 멜로 연기를 보고 싶고, 새로운 세대의 멜로 영화를 보고 싶어진다. 태국엔 있고, 한국엔 있었던 그 감성이 그리워졌다.

 

아띠에터 강해인 | starskylight@munhw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