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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겨울 문학기행

점령군처럼 눈이 왔고,
기꺼이 포로가 됐다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 배경인 '경계의 땅' 강원 속초

'밤사이 기온이 영하 27도까지 떨어졌다. 몇 해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을 호호 불다가 허벅지 사이에 넣고 마구 비벼댔다. 바깥에서는 혹한의 공격을 받은 파도들이 저항을 시도했지만 매번 더 무겁고 느리게 갈라져서는 패배자처럼 해변에 와서 부서졌다. 나는 외투까지 껴입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속초를 배경으로 한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 74쪽)

터널을 하나 지날 때마다 눈발이 더 강해지고 눈송이는 더 커졌다. 살비듬처럼 흩뿌리던 눈가루는 어느새 뚱뚱한 눈발이 되어 차창을 때렸다. 미시령 무렵부터 풍경은 완전히 눈에 점령당한 '눈의 나라'로 바뀌었다. 남과 북의 경계, 바다와 땅의 경계인 '경계의 땅' 강원도 속초를 보러 27일 오전 서울을 떠난 지 약 3시간 만이었다.

점령군처럼 눈이 왔고, 기꺼이 포로가

속초 시내© News1

점령군처럼 눈이 왔고, 기꺼이 포로가

눈내린 속초 © News1

강원도 출신 문인들은 우리 근현대문학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춘천과 화천은 '봄봄'의 작가 김유정을 필두로 전상국, 오정희, 최수철, 한수산, 이외수 등 한국문학사에서 큰 획을 그은 작가들을 낳았다. 원주로 가면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강릉에는 드라마작가인 고 신봉승과 소설가 윤후명, 이순원, 김형경, 김별아 등의 쟁쟁한 작가들이 포진해 있다. 그리고 속초에는 시인 이상국이 있다.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강가에서 새들은 날아가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악착같고 또 쪼잔하다

그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다'(이상국의 시 '그늘' 전문)

점령군처럼 눈이 왔고, 기꺼이 포로가

속초의 갯배 선착장© News1

삶은 언제나 문학을 앞섰다. 문학보다 먼저 태어나고 문학을 이끌었다. 하지만 악착같고 쪼잔한 '사는 일'을 시는 뒤따르며 역성들어 주었고 사람들의 초라한 삶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덜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그런 죽음은 시로도, 어떤 것으로도 위로할 수 없었다.

'그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 세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중략)

그러나 그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95년 1월 빚 때문에 속초 영랑호에서 자살한 한 가족을 애도하며 쓴 이상국의 시 '물속의 집' 중에서)

점령군처럼 눈이 왔고, 기꺼이 포로가

속초의 눈© News1

누군가의 '문학의 고향'이라고 해서 그 고향이 당사자에게 늘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다. 삶의 터전은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애증의 땅이다.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안주하고 싶기도 한 땅이다. 너무 악착같고 치열해 얼굴을 돌리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엄마가 갈고리를 다시 집었다. 그러다 실수로 상자 하나를 뒤엎고 말았다. 조개가 쏟아져 자기들 발치까지 굴러오자, 다른 생선장수들이 깔깔거리며 놀려댔다. 엄마가 바닥에 엎드려 조개를 줍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주려 했지만 엄마는 나를 밀쳤다.'('속초에서의 겨울' 123쪽)

점령군처럼 눈이 왔고, 기꺼이 포로가

사람이 줄을 당겨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속초의 갯배. 실향민 마을인 아바이마을로 가는 운송수단이다. © News1

북한과 가까운 속초에는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이 대거유입했고 이들은 청호동 모래사장에 터를 잡고 '아바이마을'이라는 실향민 마을을 꾸렸다. 통일이 되면 언제라도 갈 수 있도록 이들이 그 자리를 고수하며 산 것이 어언 60년이 넘었다. 속초의 역사는 전쟁이 끝난 것도 평화상태도 아닌 '두 절벽 사이 길게 늘어진 줄'같은 위태로운 토대 위에 형성되었다.

"이곳 해변들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기다림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결국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호텔도 짓고 반짝이 전등 장식도 하죠. 하지만 그것들 다 가짜예요. 그건 두 절벽 사이에 길게 늘어져 있는 줄 같아요. 언제 끊어질지 알지 못한 채 몽유병 환자가 되어 그 위를 걷는 거죠. 이곳 사람들은 둘 사이에서 살고 있어요.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겨울같은!"('속초에서의 겨울' 101쪽)

그럼에도 속초는 이런 곳이다. 경계와 경계가 만나며 그 경계를 지워버리는 곳, 나무가 나무에게 기대는 곳이다. 바다가 산을 뒤덮고 하늘로 흐르고, 눈은 바다에 떨어져 포말과 만나는 곳이다.

'바다가 해변 위로 펼쳐졌고 산을 뒤덮었으며, 화첩의 가장자리 말고는 다른 윤곽도, 다른 경계도 없는 하늘로 흘러 넘쳤기에. 그것은 장소가 아닌 장소였다. 생각하는 순간 형태를 취했다가 이내 해체되어버리는 그런 곳, 하나의 문턱, 하나의 통로, 눈이 떨어지면서 포말과 만나는, 눈송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그 일부가 증발되는 그런 곳.' ('속초에서의 겨울' 171쪽)

점령군처럼 눈이 왔고, 기꺼이 포로가

속초 어시장© 속초시청 제공

점령군처럼 눈이 왔고, 기꺼이 포로가

속초© News1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도시는 금방 잊히지만 쓸쓸하고 스산하고 애잔한 도시의 기억은 오래 남는다. 점령군처럼 내린 눈에 기꺼이 포로가 되어 결국 하나가 되는 속초의 기억은 눈(目)이 아니라 뼈에 아로새겨졌다.

 

(속초=뉴스1) 권영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