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부터 '명당'까지, 유재명이 밝힌 다작 이유

[컬처]by 노컷뉴스

'명당' 구용식 역 유재명

'라이프'부터 '명당'까지, 유재명이

지난 18일, 배우 유재명이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선 포토타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7월에 시작해 9월 초에 끝난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에서 유재명은 수술방 콜을 거절하지 못하고 달려가는 흉부외과센터장 주경문 역으로 분했다. 자본 논리에 따라 철저히 소외받는 비인기 과를 책임지는 인물로 개선되지 않는 의료 환경에 울분이 맺힌, '아픈 사람'을 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라이프' 종영 후 같은 시간대에는 그가 주연을 맡은 2부작 드라마 '탁구공'이 편성됐다. 아파트 단지 인근 개천 밑에서 사는 미스터리한 노숙자 김득환 역을 맡았다. 지난 19일에는 수완 좋은 상인 구용식 역으로 출연한 영화 '명당'이 개봉했다. 또 '죄 많은 소녀'와 '봄이 가도'가 동시 개봉했다. 다작하는 배우에게 흔히 붙는 '소처럼 일한다'는 표현이 꼭 맞았다.


하지만 유재명은 계획을 세워서 지키는 편은 아니라고 말했다. 어쩌다 보니 방송, 개봉 시기가 맞물린 것이다. 많은 작품에 출연하려고 작정하지도 않았는데 여러 작품이 왔고, 각 작품의 매력을 발견해 참여하게 된 것뿐이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유재명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그동안 매체 인터뷰를 자주 하지 않았던 터라 처음엔 낯설고 어려웠다면서도,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래도 편해졌다고 말했다.

유재명이 본 '라이프'

드라마 '라이프' 종영과 영화 '명당'의 개봉이 맞물렸다. 영화로 인해 만들어진 자리였지만, 화제작인 '라이프'에 대해 안 물을 수 없었다. '라이프'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조차 돈이 앞서는 기업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세밀하게 그려낸, 사회 고발적 성격을 지닌 작품이었다.


유재명은 제작발표회 당시 주경문을 '정직하면서도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인물로 소개하며 인간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 바 있다. 그 바람을 어느 정도로 이뤘을까.


유재명은 "주경문 엔딩이 너무 마음에 든다. 또 똑같이 수술하고, 새 사장이 오고 나서 '큰일 났구나!' 하는 게.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사람이다. 주경문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자본주의와 싸워 이기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경문은 그냥 주경문이다. 영웅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의사고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는 게 본분인데, 그걸 멋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라이프'부터 '명당'까지, 유재명이

최근 종영한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에서 흉부외과 센터장 주경문 역을 맡은 배우 유재명 (사진='라이프' 캡처)

극중 예진우(이동욱 분)이 젊은 세대를 상징했다면, 주경문은 그 바로 윗세대의 상징이라고 봤다. 유재명은 "후배 세대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정신없는 세대다. 누군가는 (예진우를 보고) '왜 분란을 일으키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젊음이지 않을까. 직감적이고 충동적인 세대라는 게 읽히길 바랐다"고 전했다.


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을 만큼 수작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비밀의 숲'. '라이프'의 이수연 작가는 바로 그 '비밀의 숲'을 쓴 작가였다. 그러나 '라이프'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다는 지적을 받았고, 다소 뜬금없는 러브라인이 등장한 마지막 회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그러나 유재명은 '라이프'는 그 자체로 멋진 작품이라고 바라봤다.


"'라이프'는 '라이프' 자체로 정말 결이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휠체어 탄 주인공(예선우)이 우리나라 드라마에 있었나 싶고요. 병원 이야기 다루면서 이렇게 현실적인 걸 드러낸 것도 드물고요. 얼마 전에 영도에서 정형외과 대리수술 건도 나왔잖아요. 작가님은 (병원에) 현미경을 들이댔다가 부감으로 위에서 보는 식으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뤘어요. '라이프'는 그 자체로 이미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부지런히 일한 유재명의 가을걷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유재명이 '열일'한 결과가 9월에 활짝 꽃을 피웠다. 그는 "의도한 건 전혀 아니다. 무계획으로 살았다. 근데 작품이 들어오면 그 작품의 매력을 느끼려고 하다 보니까 자꾸 아까웠던 것 같다. 이 작품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머릿속에) 맴돌더라. 일정 막 쪼개서 하고, 한 것들이 좀 몰려온 것이다. 다작하려고 작정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9월에 '봄이 가도'라는 단편 3개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와, '죄 많은 소녀', 상업영화 '명당'까지 3편이 올라가요. 얼마 전에 드라마 '라이프' 종영했고, 17일 '탁구공'이 방송됐어요. (웃음) 남들이 보면 욕심쟁이라고, '쟤 좀 너무한 것 아냐?'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 다 다른 뜻이었어요. 각각의 영화와 드라마가 매력적이었거든요. 제 그릇이 작아서 다 담을 수 없는 건데, 영상 매체 늦게 시작해서 (다) 소중하게 받아들이려고 하다 보니 가능했던 것 같아요. 자칫 잘못하면 (다작하는 게) 위험할 수 있잖아요. 대중들에게 (제가) 과소비되는 느낌이 들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라이프' 종영하고 나서는 휴식하길 원했는데 '탁구공' 보고 '아, 이 대본은 하고 싶은 작품이다!' 싶었어요. 저희 세대가 '고래사냥' 같이, 그런 버디 무비에 대한 로망과 향수가 있어요. 인생의 굴곡을 막 지나 죽음을 앞둔 늙은 남자와, 결핍과 불안의 청춘이 만나서 인생과 사랑과 작은 화두를 나누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래서 휴가를 못 갔죠. (웃음) 그 작품이 휴가 같은 작품이에요."


'라이프'는 병원에 침투한 자본 논리에 대놓고 메스를 들이대는 작품이었고, '봄이 가도' 역시 세월호 이야기로 읽힌다. 어쩌면 연기하는 입장에서 부담이 있었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 답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족쇄가 될 수 있지만, (작품 속) 인물을 생각하면, (인물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괜찮더라."

'라이프'부터 '명당'까지, 유재명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드라마 '탁구공'의 김득환, '라이프'의 주경문, 영화 '명당'의 구용식, '죄 많은 소녀'의 형사, '봄이 가도'의 상원 (사진=각 제작사, 배급사 제공)

문득 궁금해졌다. 정점의 권력을 누리는 검사('비밀의 숲'), 주군을 제 목숨보다 소중히 모시는 호위무사('화랑'), 아랫사람을 쪼아대는 유리 멘탈 사장('욱씨남정기'), 호랑이 학생주임 선생님('응답하라 1988'), 햄릿형 인간인 흉부외과 전문의('라이프'),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숙자('탁구공'), 친구를 살뜰히 챙기고 생존에 관한 욕망이 강한 장사꾼('명당')까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연기할 수 있는지.


"직감에 좀 의존하는 것 같아요. '비숲'이 그런 케이스인 것 같은데… 이창준의 외로움을 갖고 싶었어요. 한 여자를 사랑하고 권력의 최정점에 올랐지만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외로움의 호흡들, 숨을 찾아내야 한다는 게 제일 중요했어요. 살을 빼 슬림하게 만들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주고, 대구 TK 출신의 경상도 사투리 이런 것도 되게 중요하지만 이 창준이 가진 외로움을 찾아야 한다는 게 제일 중요했던 것 같아요. 다른 역할도 그래요. ('명당'에선) 구용식이란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을, '탁구공'은 머리에 종양이 있지만 아내를 그리워하는, 외형은 되게 괴팍한 노숙자이지만 그런 것들(내면)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직감적으로 찾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20년 가까이 한 우물을 파면, 어떤 깨달음이 올까

연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과(부산대 생명시스템학과)를 다닌 유재명은 오랫동안 연극에 빠져 있었다. 하루는 그동안 연극을 몇 편이나 했는지 세어봤다. 100편은 너끈히 넘고, 최소한 150여 편은 했다고 한다. 단역, 조연, 코러스, 주연 등 배우는 물론이고 연출도 했고 극단도 운영했다.


약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영상 매체(TV, 스크린)에 나오기 시작한 그는 그전에 나온 작품은 연극을 하다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기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 작품은,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던 영화 '하루'였다.


유재명은 "('하루') 시나리오 보고 나서 고사했다. '잘못 선택한 것 같다. 더 좋은 분이 하셔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 술자리에서 사실 제가 하고 싶다고 했다. 항상 저는 영화 쪽은 부담이 있는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까. 한다고 (무작정) 달려들 만한 게 아니라는 게 마음속에 있는 것 같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듬성듬성 하얗게 센 머리를 가리키며 "이 머리가 '비숲' 할 때 그때 다 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응답하라 1988'에서 '동룡이 아버지'로 자신을 발탁한 신원호 PD에게 감사를 표했다. '응팔' 이후 생애 처음으로 인터뷰도 하고, 동네에서도 알아보는 이가 생겼으며, 경제적으로도 좋아졌다고.


하지만 연극을 향한 애정은 여전하다. 올해도 '명당' 촬영 마치고 부산에 내려갔다. 두 달 반 정도 부산에 있으면서 공연을 했고, 올라와서 찍은 게 '라이프'라고. 유재명은 "되게 힘들었는데 정말 즐거웠다. 자주는 아니지만 제가 저한테 주는 선물로 1년~2년에 한 번 정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라이프'부터 '명당'까지, 유재명이

배우 유재명 (사진=황진환 기자)

20년 동안 연기라는 외길을 간 유재명에게 물었다. 그 정도로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면 어떤 깨달음이 오느냐고. 그는 자기가 잘 못 한다는 '운전'에 연기를 비유했다.


"제가 운전을 잘 못 해요. 운전대만 잡으면 심장이 뒤고 입이 바싹바싹 말라요. 몇 번 시도했는데도 잘 안 되더라고요. 전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갈 때 짐 싣고 중고차 한 대 끈 적이 있었어요. 막상 해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고속도로가) 더 편하단 생각까지 들고요. 언제든지 힘들면 휴게소로 빠질 거야, 하는 생각으로 갔는데 시야가 안 보이는 것 말고는 괜찮았어요. 천천히 가면 되니까요. (웃음) 연기도 좀 그런 것 같아요. 되게 어렵고 힘든 것 같은데 의외로 답이 있어요. 배우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중심이 잘 잡힌다면요. 물론 지적하고 끌어주는 선후배들이 있어야겠지만, 중심만 잡혀 있다면… 사람을 표현하는 일이니까요."


유재명은 올가을 새신랑이 된다. 5년 동안 사귀어 온 연하의 연인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결혼 이야기에 관해 묻자 그는 "패스 한 번 쓰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연인에 대해서는 "좋은 동지이자 친구"라고 짤막하게만 답했다.


소처럼 일한 유재명이 지금 원하는 것은 '딱 이틀의 휴식'이다.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단다. 늦잠 자고 먼지 털고 산책 한 바퀴 하고 나서 친구들과 당구 한 번 치는 것. 이런 바쁨 자체를 처음 겪는다고. 그러면서 깨알같이 결혼 언급을 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결혼도 처음 하는 거다 보니까, 정신없네요." (웃음)


CBS노컷뉴스 김수정 기자

2018.09.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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