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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로버트 롱고
(Robert Longo)

by노트폴리오 매거진

로버트 롱고 (Robert Longo

'Men in the Cities – Untitled', 1982-84, Mixed Media, 243.8 x 467.4 x 91.4 cm

얼마 전, 아이들이 가상의 친구와 대화하는 어플을 많이 다운 받는다는 기사를 봤다. 기사에 따르면 어플 제작자는 중년층의 이용자가 많을 거라 예상했지만, 실제 사용자는 10대 청소년이 대부분(70%)이라 놀랍다고 했다. 그는 ‘힘들다’, ‘외롭다’는 말이 나오면 대답을 더 길게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진짜’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지만 친구가 없는 아이들이 가상의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요즘같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에서 아이들이 있어봤자 얼마나 큰 고민이 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각박한 세상’을 이미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걸 보면 10대, 20대 상관없이 우리는 누구나 외로움에 허덕이고 있다.

나도 예전에 심심이와 대화를 해본 적이 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한테는 말할 수 없는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왠지, 친구한테 말하면 불쌍해 보일 것 같은 말들을 했다. 심심이는 저 위의 어플보다 더 단순한 아이였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아이와 가끔 나누는 ‘의미 없는 대화’가 꽤 재밌었다. 나 역시 힘이 들 때 가상의 대상과 대화를 해본 경험자로서 저 어플을 다운 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공감된다.
로버트 롱고 (Robert Longo

'Untitled', 1981-87, Charcoal, graphite and ink on paper, 243.8 x 152.4 cm

로버트 롱고 (Robert Longo

'Untitled', 1981-87, Charcoal and graphite and ink on paper, 243.8 x 152.4 cm

가상의 목소리와 대화를 통해 사랑을 나누는 'HER'. 섹시하고 매력적인 운영체제의 목소리는 남자주인공에게 안정과 애정을 선사한다. 처음에는 가상의 목소리와 무엇을 하는 건지 생각하던 남자는, 점차 목소리에 동화되어 간다.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된 프로그램은 남자 주인공만을 위한, 남자 주인공에게만 집중하는 목소리가 된다. 그럴수록 남자는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남자는 운영체제의 애정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사용자 모두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때의 허무한 남자의 표정이란..!

살아있는 사람에게 애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상의 세계와 소통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아무리 먹을 게 풍족하고, 삶의 질이 향상된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자신을 생각해주는 애정의 상대가 없다면 삶이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로지 자신의 등뼈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등뼈를 쓰다듬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더 좋지 않으랴. 그 동안 잘해왔다고, 그 동안 정말 고생했다고 등뼈를 쓰다듬어 주는 이가 필요한 세상이다. 혹자는 그 쓰다듬 역시 스스로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힘든 세상에서 보듬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로버트 롱고 (Robert Longo

'Untitled', 1981, Charcoal, graphite, and dye on paper, 243.8 x 152.4 cm

난 가끔 녹초가 되어 자는 엄마를 보며, 쉬는 날 몸을 못 이긴 채 잠을 청하는 아빠를 보며, 너무 많은 야근으로 웃음기 가신 남자친구를 보며 ‘치즈’가 되고 싶었다. 내가 치즈라면 몸을 늘려서 삶이 고단한 저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을 수 있을 텐데,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 빈 공간들을 내가 모두 메워줄 수 있을 텐데, 하고 말이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꼭 안아주고 싶다. 이것만으로 아무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의 체온이란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가장 힘든 순간의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듯, 가장 힘든 시기를 겪는 사람에게 내민 손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다.

로버트 롱고(Robert Longo)는 너무나도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숨이 꼭 막혀 죽을 것 같은 롱고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상대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아주 제 각각의, 다양한 이유로 내가 더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내가 힘든 것이 우주 전체의 힘듦이며, 내가 온전히 그 힘듦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로버트 롱고 (Robert Longo

'Untitled (Frank and Glenn Fighting)', 1981, Charcoal, graphite, ink and tempera on paper, 152.4 x 243.8 cm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날았다

- 기욤 아폴리네르

영업을 할 때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자면, 보는 사람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영업할 때보다 얼굴이 좋아졌고, 차분해졌다고.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시 나는 선택해야 하는 인생의 벼랑 끝에 있었고, 용기를 내서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뿐이다. 차분해진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인생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그런데 오히려 삶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바라보니, 롱고의 그림처럼 옥죄듯 살아가는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사실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고 더 행복해 진다거나 장밋빛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 더 인생을 정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좋다.

어쩌면 롱고의 그림은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다른 길을 찾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다른 길을 찾으려 하니, 길은 더 나오지 않고 자신을 옥죄게 된다. 이 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너무나도 단순한 진리가 떠오른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모두 비슷하기에, 나는 너무 나 자신과 싸우고 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지나가면 또 좋은 일이 올테니 요행을 바라지 말고 살아야겠다
로버트 롱고 (Robert Longo

'Men in the Cities - Men Trapped in Ice', 1980, Charcoal and graphite on paper, 152.4 x 101.6 cm, each panel

다시 롱고의 그림을 본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피할 수 없다면 요행을 바라지 말고 외로움을 안고 뛰어 내리라고, 그럼 당신들은 날개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사진은 로버트 롱고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www.robertlon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