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에 조성된 비자나무숲, 이유 봤더니

[여행]by 오마이뉴스

‘땅끝’ 해남에서 만나는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오마이뉴스

은행나무 고목과 어우러진 녹우당 풍경.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햇볕이 뜨겁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한반도의 끄트머리 '땅끝'으로 간다. 한국 고전시가의 효시로 평가받는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가 있는 해남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조선시대 문신이면서 시조시인이다.


윤선도는 순 한글로 시를 노래했다. 당시 한글은 여자나 평민들만 쓰고, 양반들은 여전히 한자를 쓰던 때였다. 해남에서는 윤선도의 후손인 공재 윤두서(1668∼1715)의 문학과 그림세계도 접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

녹우당 주변 산책길.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흔적이 배어있는 곳이다. ⓒ 이돈삼

오마이뉴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전경.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윤선도가 1642년 해남에서 지은 〈산중신곡〉의 '오우가' 앞부분이다. 산중신곡은 보물 제482호로 지정돼 있다.


윤선도는 우리나라 원림문화와 국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유배가 많았던 삶이다. 광해군 때,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당시 최고 권력자의 횡포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간 게 시작이었다. 모두 3차례에 걸쳐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윤선도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 벼슬도 한다. 그보다 학문에 정진한 기간이 훨씬 길다.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 됐다. 병자호란 뒤에는 해남과 완도에서 원림을 경영하면서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우리 국문학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오마이뉴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내부.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작품을 볼 수 있다. ⓒ 이돈삼

오마이뉴스

녹우당 뒷산 중턱에서 만나는 비자나무 숲. 오래 된 비자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다. ⓒ 이돈삼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가 해남읍 연동에 있다. 윤선도 유물전시관에서는 내면의 세계까지 생생히 표현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볼 수 있다. 국보 제240호로 지정돼 있다. 해남윤씨 집안에서 전해오는 고화첩(보물 제481호), 윤씨종가의 문적(보물 제482호), 고려시대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등도 전시돼 있다.


뒷산 중턱에서 비자나무 400여 그루로 숲을 이루고 있는 비자림은 500년 전에 조성됐다.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어초은 윤효정(1476∼1543)의 유훈에 따라 후손들이 심었다. 천연기념물(제241호)로 지정됐다.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비자나무숲이다.

오마이뉴스

녹우당의 솟을대문과 돌담. 녹우당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종택이다. ⓒ 이돈삼

오마이뉴스

해남 녹우당.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한 것을, 1668년 해남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 이돈삼

녹우당은 해남윤씨 종가의 종택이다. 윤선도의 4대조, 윤두서의 7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터를 잡았다.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한 것을, 1668년 해남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ㄷ자형 집에 사랑채를 덧붙여 독특한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전통 사대부 집에서 볼 수 있는 솟을대문도 멋스럽다. 명문가의 규율과 품격, 지조가 그대로 묻어나는 옛집이다. 사적(제167호)으로 지정돼 있다.


녹우당 앞에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도 있다. 윤효정이 아들의 과거 합격을 기념해 심은 나무다. 가을날 노랗게 물든 은행잎으로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비 내리는 날 나무의 잎이 비처럼 떨어진다고 '녹우당(綠雨堂)'이라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종가의 자존심은 사당에서 나온다고 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학문과 덕이 높아 사당에서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 임금이 허락한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라고 한다. 고산사당이 불천위 사당이다. 매년 음력 6월11일 윤선도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어초은사당에선 윤효정에 대한 시제사를 지낸다.

오마이뉴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서 만나는 공재 윤두서의 그림 작품. 공재는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처음 선보이고, 사실주의 화풍을 개척했다. ⓒ 이돈삼

오마이뉴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서 만난 공재 윤두서의 '유하백마도'. 버드나무 아래에서 흰 말이 노닐고 있다. ⓒ 이돈삼

해남윤씨 집안에서 공재 윤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 우리에게 '자화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처음 선보였고, 사실주의 화풍을 개척했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흰 말이 노니는 '유하백마도', 봄날 산골에서 두 아낙네가 나물을 캐는 '채애도'가 익숙하다.


윤두서는 박학다식했다. 그림 뿐 아니라 문학과 천문·지리·의학에도 해박한 식견을 갖췄다.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보다 150년 앞서 우리나라 지도(동국여지도, 보물제481-3호)를 그린 이가 그였다. 집안의 노비도 해방시켰다. 윤두서는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다산의 목민철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옛집이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 있다.

오마이뉴스

혁명시인 김남주의 생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오마이뉴스

김남주의 시 '조국은 하나다' 시비. 시인의 해남 생가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해남은 현대 민중문학의 산실로 통한다. 혁명시인으로 불꽃처럼 살다 간 김남주, 여성운동가이면서 시인으로 살다 요절한 고정희 시인의 태 자리가 해남이다. 두 시인은 현실과 치열하게 맞서 싸우다가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남주의 시는 음률이 붙여져 민중가요로도 많이 불리고 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하네 꽃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자유',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등이다.


김남주는 1979년 34살때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다가 구속돼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시집 〈진혼가〉, 〈나의칼나의피〉, 〈조국은하나다〉 등을 펴냈다. 그의 생가와 문학공원이 삼산면 봉학리에 있다.


고정희의 시에는 우리 역사의 격변기였던 80년대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자취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광주민중항쟁의 아픔을 몸소 겪으면서 80년대 후반 〈저 무덤위의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등의 시집을 냈다. 생가가 삼산면 송정리에 있다.

오마이뉴스

고정희 시인이 살았던 생가의 방.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 있다. ⓒ 이돈삼

이돈삼 기자(ds2032@korea.kr)

2019.08.19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