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화가의 그림을 소장하지 않은 사람, 한국인 중엔 없다

[컬처]by 오마이뉴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 이종상 화백 인터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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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종상 화백 ⓒ 종로구청

대부분의 유명 작품들은 미술관을 가거나 책자를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 여간해서는 소장이 어렵다. 그러나 이종상 화백의 그림은 다르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그의 그림 하나 가지지 않은 이가 드물다. 5천원권의 율곡 이이와 5만 원권의 신사임당 초상이 바로 그의 작품인 까닭이다.


37세에 국내 최연소 화폐영정화가가 된 이래로, 고구려 문화 지키기 운동 및 독도문화 심기운동을 주도하는 민족화가로 활동하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우뚝 선 그를 지난 5월 만났다.

아버지의 못 다 이룬 꿈을 잇다

1938년 충남 예산 출생인 이 화백은 광산업을 일구었던 조부의 영향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은 고암 이응노 화백을 찾아가 그림을 배우며 화가의 꿈을 꾸기도 했으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원예학을 전공한 뒤, 연구자로 일했다. 이후에는 명동의 전구회사를 인수해 사업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그림과 과학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거든요. 물질을 다루는 미술은 물리나 화학을 배워야 해요. 소설가나 시인과는 다른 거죠. 어떤 구상이 떠올랐다 하면은 바로 화실로 가서 먹을 갈고, 그리는 거죠.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장점을 그대로 물려받은 제게 늘 화가가 되라고 하셨어요."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아들이 이어주길 간절히 바랐던 아버지는 집안에 동물원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그림 그리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 시골에서 칠면조나 금계, 거위를 어디서 보겠어요? 사람들이 진귀한 동물을 구경하러 집에 많이들 찾아왔죠. 제 나이 세 살 때였는데, 퇴근하고 오신 아버지는 저와 함께 앉아 스케치를 하곤 하셨어요. 그땐 영문을 몰랐지만, 나중에 미대에 진학해서야 아버지의 깊은 속뜻을 알게 됐죠.


크로키 수업을 듣는데, 크로키를 속사화(速寫畵)라고도 하잖아요. 달리는 기차를 지나쳐 가는 배경을 순간적으로 카메라로 찍듯이 뇌에 각인시키는 거예요. 농구 골대에 슛을 넣은 선수는 이미 저쪽으로 지나갔는데, 저는 그걸 그리는 거죠.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은 몇 십 년이 지나도 기억하잖아요. 그게 바로 잔재영상이에요.


과학적으로 잔재영상은 16분의 1초가 지나면 사라지거든요. 그걸 16시간, 16년 이렇게 늘리는 걸 배우는 거죠. 매 순간을 기억하는 것을 훈련한다고나 할까요? 집에는 온통 두 발 달린 동물들밖에 없었거든요. 네 발 달린 짐승은 느긋해서 상대적으로 그리기가 쉬워요. 그에 반해 두발달린 짐승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죠. 그런 훈련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현력을 더욱 풍부하게 키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초등학교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기에 6.25동란 속 부친을 여의면서, 집안의 가세도 기울었다. 가장이 된 어머니는 광주리 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그가 화가의 꿈을 간직하고 자라날 수 있도록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아버지 생전에는 그런 말씀 한마디도 안 하셨던 분이 꼭 화가가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통상 요즘 어머니들은 '니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만 그리니?'라고 하시잖아요. 저희 어머니는 늘 '넌 질리지도 않니? 그림 공부만 하게!'라고 하셨거든요. 그림을 학문의 하나로 봐주신 어머니의 말씀이 제 미래를 만들었죠. 친구들이 저희 집에 오면 코주부 만화책을 꺼내서 그리면서 노는데 어머니 오시는 소리가 들리면, 다들 후다닥 형 책상에 가서 앉기 바쁜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도 모두 공부라는 생각을 했기에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이후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차마 어려운 집안 형편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공대 건축과로 진로를 정하지만, 박관수 교장의 영향으로 교내 미술부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화가로서의 꿈을 다잡게 된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을 갖고 계신 분이었어요. 취미가 직업이 되는 시대가 올 거라 그러셨죠. 꼭 미대에 가야 한다고 말씀해주신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됐어요."

"고흐 작품에만 거품 물던 선생들... 식민 근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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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소 화폐영정화가 이종상 화백(우)과 김영종 종로구청장(좌) ⓒ 종로구청

이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 재학 중에 국전에서 연이어 특선 3회 수상을 거머쥐고, 신인예술상 최고특상을 받은 데 이어,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전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을 정도로 빠른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서양화에 젖어 있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싹튼 남다른 역사의식은 4·19혁명에 앞장서면서 더욱 굳건해진다.


유도부로 활동했던 그는 체격이 작고 약한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문리대 시위대의 선봉에 선다. 경찰과 맨몸으로 맞섰던 그는 경무대 앞에서 오른쪽 종아리에 총알이 스치는 사고를 입고 민가로 피하지만, 발각돼 서울 종로경찰서에 연행되고야 만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면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저를 설명하려면 평론가들은 '최초'라는 말을 참 많이 써야할 거예요. 심사위원이 전부 바뀌고도 연속 3년 동안 특선을 했으니까요. 사실 특선을 바라고 작품을 낸 건 아니었어요. 저는 노동자들을 그렸거든요. 지금은 민중작가라고들 하지만, 그때는 사회주의 사실작가라고 했죠. 한 번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정도로, 아주 살벌한 시대였어요. 작품을 통해 혁명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대장간을 그렸죠. 무뎌진 연장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오랜 쇠붙이를 두들겨 새로운 낫이나 호미를 만드는 대장간처럼, 민주화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는 혁명의 중요성을 전하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후에도 혁명을 은유적으로 암시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작품을 통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담아내게 된다. 또한 대학시절 건축 공부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던 그는 60년대부터 고구려벽화를 연구하면서 조선 후기 초상화법인 육리문(肉理紋)법을 익히기도 했다. 육리문법은 우리 고유의 정통 초상기법으로 섬세한 인물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에 자리한 인품과 정신적 기품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남다른 선견지명으로 고구려벽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나,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고구려 문화를 예찬하는 것만으로도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행위로 오인 받던 시절이었다. 자칫하면 작품 활동이 위태로워짐은 물론이고, 신변의 안전마저도 위협받기 십상이었다. 그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회주의 작가로 몰려 가택수색을 당했음은 물론이고, 고문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은 임기가 5년이지만, 화가는 임기가 없어요. 우리는 수십 년을 내다보고 그림을 그리는 거거든요. 60년대부터 '중국의 유교 장막 속에 들어있는 고구려벽화를 어떻게 하면 좋을꼬.' 하고 고민을 했죠. 고구려벽화는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에 대해서 왜 다루어지지 않는지 늘 의문을 갖고 있었어요. 그때는 학교에 다닐 때니까 선생님들께 고구려벽화에 대해 묻곤 했는데, 그저 혼내기만 하시는 거예요. 고흐 작품에 대해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죠.


자아준거적 식민 근성이라고 봐야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스스로 식민지를 자처하는 거예요. 저는 우리문화 지키기 NGO 운동을 하면서 논문도 발표했어요. 86년도에 <한국민족문화의원총>이라는 책이 출판되는데, 해방되고 나서 33년 후에 각계각층의 좋은 논문을 선정해 제작한 책이에요. 거기에 고구려벽화 논문이 뽑혀서 들어가 있어요. 고구려벽화의 재료기법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학교 때 들었던 건축과 수업이 도움이 많이 됐죠."


(2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연정 기자(koreatheatre@naver.com)

2019.08.0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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