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찬미할 수 없게 되자, 안익태가 1959년 택한 방법

[컬처]by 오마이뉴스

친일 음악의 최고봉, 안익태의 '애국가'


'애국가'와 '고향의 봄', 그리고 '가고파'까지. 아이와 어른 모두 무심코 흥얼거리는 이 노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친일 음악가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친일 작곡가, 그 실체'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친일 음악가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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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5월 26일 코엑스에서 개막한 한국국제아트페어 당시 공개된 안익태 사진. 드 팔마 오케스트라 심포닉의 솔리스트와 함께 촬영한 안익태. ⓒ 연합뉴스

각국 국민들이 애국심을 담아 부르는 국가에는 저마다 사연이 담겨 있다. 일례로, 왕정체제를 무너트리고 유럽 민주화를 선도한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는 공화정 프랑스를 낳을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이 1792년 4월 이 나라를 침공했다.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인 스트라스부르에 주둔 중이던 한 장교의 머릿속에서 이때 음악적 영감이 떠올랐다.


외세의 간섭으로 혁명이 위기에 처한 그 순간, 이 나라의 동부전선을 지키다가 음악적 영감을 떠올린 그 장교는 공병대위인 루제 드 릴이다.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가 바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다. 제목이 그렇게 된 것은, 노래가 각지로 퍼져나간 뒤 남부 해안도시 마르세유의 의용군 부대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 해 7월 파리에 입성하고 튈르리 궁전을 습격했기 때문이다.


<라 마르세예즈>에는 그때의 혁명적 분위기가 생생히 담겨 있다. "일어나라, 조국의 자녀들아/ 영광의 날이 왔노라/ 우리에 맞서 저 폭군의 피 묻은 깃발이 올랐도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제3절에는 혁명을 훼방하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대한 적개심도 담겨 있다.


"무어라! 외국의 개떼들이/ 우리의 고향에서 법을 만들겠다고?"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품위가 떨어진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프랑스를 낳은 당시 정황을 생생히 전달해주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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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마르세예즈 악보. ⓒ 위키백과 영문판

이처럼 세계 각국의 국가 속에는 제각각의 사연이 묻어 있다. 노영해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의 논문 '세계의 애국가에 관한 연구'는 이렇게 정리한다.

"오랫동안 평화와 안정을 누려온 나라들은 대체로 그 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가사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단풍잎이여 영원하라>라는 캐나다 국가가 바로 그 좋은 예다. 몇몇 나라들의 국가는 나라의 영웅을 칭송한다. 예컨대, 하이티의 국가는 이 섬을 해방시킨 사람이며 첫 번째 황제인 장 자크 드쌀랑느를 칭송한다. 이 국가는 1904년 하이티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쓰여졌으며, 제프라드가 곡을 쓰고 레리손이 가사를 썼다.


덴마크 국가는 크리스찬왕을 찬양하는 가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이나 온두라스 같이 국기를 중심으로 한 내용을 담고 있는 나라도 있다. 많은 국가들은 프랑스처럼 청년들에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 소집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5년 이후에 등장한 나라에서는 독립을 향한 투쟁이나 독립을 성취한 자부심이 애국가에서 가장 선호되는 주제가 된다." - 한국음악학회가 1998년 발행한 <음악연구> 제17권.

우리의 역사 독립투쟁이 빠진 애국가, 그 이유

대한민국 <애국가>는 자연환경을 노래한다. 지난 100년간의 처절한 역사와는 무관한 노래다. 해방 74년이 지나도록 온 국민의 분이 풀리지 않는 식민지배와 그에 맞선 독립투쟁은 담겨 있지 않다. <애국가>를 부를 때 우리가 어떤 민족인지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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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가 악보. ⓒ 위키백과

<애국가>의 문제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결정적 문제점은 작곡자가 친일파라는 점이다. 안익태는 일제 강점 4년 전인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출생해 평양보통학교와 도쿄 세이소쿠중학교·구니다치고등음악학원를 거쳐, 미국 신시내티음악원과 탬플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헝가리 리스트 페렌츠 음악학교에서 수학했다. 이때가 32세인 1938년이다.


이때부터 그는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발표했으니, 이미 그 전부터 친일적 감성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1938년에 내놓은 작품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다. 일명 <환상곡 에텐라쿠>로 불린다. 이 곡에 관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 작품으로 연주된 것으로, 1878년부터 근대 일본 창가로서 <남조 오(五)충신>이나 <충효> 등 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한 일본 정신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안익태가 역작으로 자부한 <에텐라쿠>는 1938년에 발표된 이후 로마방송오케스트라 연주회(1939.4.30),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1940.10.19), 독·일협회 빈 지부 주최의 빈 심포니 연주회(1942.3.12), 함부르크 연주회(1943.4.22) 등에서 자신의 지휘로 계속 연주되었다."

일왕 찬양가인 <에텐라쿠>에 대한 안익태의 애착을 보여주는 증표가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역작으로 자부했다. 그런데 해방 뒤에는 더 이상 이 역작을 드러낼 수 없게 됐다. 그래서 하게 된 일이, 이 작품을 <강천성악>으로 개작하는 것이었다. 1959년의 일이다. 그 정도로 <에텐라쿠>를 사랑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그의 친일 행각은 국제적 차원으로 전개됐다.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총재인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작곡한 <대관현악을 위한 일본 황기 2600년에 붙인 축전곡>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가 지휘하기도 했다. 이 곡은 '일본해'·사쿠라·후지산·사무라이·일왕을 찬양한다, 일명 <일본 축전곡>으로 불리는 이 작품을 1942년 3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유럽에까지 가서 일왕과 '일본해'를 찬미했던 것이다.


안익태는 일본 군국주의의 만주 침략도 찬미했다.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큰 관현악단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만주 환상곡> 혹은 <만주 축전곡> 또는 <만주국 경축 음악> 등으로 약칭된다. <친일 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렇게 구성돼 있다.

"제1악장은 서주(序奏)로서 축복 받은 대지의 모습과 폭정으로 짓밟힌 옛 만주가 구원자인 일본에 의해 평화를 되찾은 모습을, 제2악장은 목가(牧歌)로서 만주국 대평원의 평화를, 제3악장은 만주국이 열강들과 협력해 세계 신질서를 확립하는 모습을, 그리고 제4악장은 피날레로서 만주국이 건국 10주년을 맞는 환희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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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있는 안익태 동상. ⓒ 김종성

이렇게 일본의 세계 지배를 찬미했던 안익태. 그가 지은 <애국가>를 대한민국이 국가로 부르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친일 작곡가의 작품을,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한 마음으로 부르는 모습은 한 편의 희극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애국가>를 지을 당시에는 그가 진심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력한 정황이 있다. <한국 환상곡> 혹은 <코리아 환상곡>으로도 불리는 그의 작품 <교황적 환상곡 조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한국 환상곡>은 1938년에 초연됐다. 그런데 같은 해에 그는 <에텐라쿠>도 발표했다. <한국 환상곡>을 만든 시점과 <엔테라쿠>를 만든 시점이 겹치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사랑과 일본에 대한 사랑이 한국인의 심장 속에서 공존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한국 환상곡>과 <에텐라쿠> 둘 중 하나에는 그의 진심이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느 쪽에 진심이 들어가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에텐라쿠>를 역작으로 자부하면서 해방 뒤 <강천성악>으로 개조했다는 것은 그가 <에텐라쿠>를 지을 때 진심을 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환상곡> 쪽에는 진심이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가 한민족에 대한 노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은 <한국 환상곡>의 주요 부분을 <만주 환상곡>에다 갖다 쓴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환상곡>의 피날레가, 4년 뒤 제작된 <만주 환상곡>의 피날레와 겹쳤던 것이다. 음악학자 송병욱의 논문 '다시 보는 안익태-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는 이렇게 말한다.

"<만주국 경축 음악>과 <한국 환상곡>은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한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2007년 발행한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

한국을 찬미하는 데 썼던 선율을 일본을 찬미하는 데다가 갖다 썼다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도 기분 나쁠 수 있지만 한국 입장에서도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이는 한민족을 위한 노래를 소중히 다루지 않는 그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인물이 <애국가>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애국자가 아닌 게 분명한 인물이 <애국가>를 위해 얼마나 마음을 쏟았을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찬미하는 안익태의 활동은 해방 뒤에도 계속됐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연주할 수 없게 된 <에텐라쿠>를 '신분세탁'하는 일을 했음은 물론이고, 독재자들을 찬미하는 활동에도 새롭게 가담했다.


1955년과 1960년에는 '이승만 대통령 탄신 기념 음악회'를 지휘했고, 1961년 5·16 쿠데타 이후에는 박정희의 '혁명'을 경축하는 대한민국 국제음악제를 개최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공로를 기려 안익태 사망 다음 달인 1965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고, 1977년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애국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룩해야 할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는 결코 거룩할 수 없다. 친일파의 영혼이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가가 친일파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 기본적인 데서부터 친일청산이 안 됐을 정도로 한국이 모순을 많이 품고 있는 나라임을 보여준다.


김종성 기자(jkim0815@naver.com)

2019.08.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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