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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지금 환벽당에는 '붉은 그리움'이 가득합니다

by오마이뉴스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담은 꽃무릇 절정

푸르름 가득한 집, 환벽당이 붉은 그리움으로 가득 찾습니다 ⓒ 임영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나들이 하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푸른 하늘.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 이따금 불어오는 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에 기분이 좋아지는 초가을입니다. 추석이 지나고 가을이 막 익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때쯤 되면 가을의 전령사, 붉은 꽃무릇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환벽당은 조선시대 나주목사를 지냈던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가 을사사화가 터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별서 정원입니다 ⓒ 임영열

환벽당의 키 작은 굴뚝과도 잘 어울립니다 ⓒ 임영열

남도 지방에는 꽃무릇으로 유명한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백제시대에 불교가 맨 처음 들어올 때 지어졌다는 전남 영광의 불갑사와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함평의 용천사는 전국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입니다. 매년 이맘때 꽃무릇 축제가 열립니다. 전국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붉은 꽃잔치를 즐깁니다. 전라북도 고창의 선운사에서도 매년 꽃무릇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이 세 곳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광주광역시에도 꽃무릇이 아름다운 별서 정원이 있습니다. 광주호 상류, 광주시 충효동 높은 언덕에 자리한 대한민국 명승 제107호 환벽당(環碧堂)이 그곳입니다.

환벽당, 푸르름에 둘러싸인 집이라는 뜻입니다. 우암 송시열이 쓴 편액입니다 ⓒ 임영열

진홍빛의 강렬한 색깔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 임영열

붉은 꽃물결 출렁이는 환벽당은 조선시대 나주목사를 지냈던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가 을사사화가 터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별서 정원입니다. 사촌의 제자 중에는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과 송강 정철(松江 鄭徹 1536~1593)이 있습니다.


송강 정철은 아버지와 형이 귀양살이하던 담양에 내려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살아가다가 16살 때 환벽당에서 운명적으로 사촌 김윤제를 만나게 됩니다. 환벽당은 송강이 청춘 시절 10여 년을 머무르며 공부했던 곳입니다. 사촌은 송강이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갈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기지 않았던 멘토였습니다.

환벽당 뒤편 언덕의 낙랑장송의 줄기와 아름다운 보색을 이룹니다 ⓒ 임영열

정자에서 내려다본 원림 모습 ⓒ 임영열

사촌이 없었더라면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촌은 송강을 외손녀 사위로 삼을 정도로 아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사 중에서 송강 정철처럼 훌륭한 멘토를 만난다는 건 최고의 행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푸르름으로 둘러싸인 집'이라는 뜻의 환벽당(環碧堂)이 온통 붉은 꽃무릇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환적당(環赤堂 )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합니다. 통칭 상사화(相思花)라고 불리는 꽃무릇은 중국 양자강 유역이 원산지로 일본을 통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왔으며 바위틈에서 핀다 하여 석산화라고도 합니다.

9월 중순에 피어 10월 초까지 화려한 모습을 유지하는 꽃무릇은 입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갖게 되었습니다 ⓒ 임영열

사찰 주변에 많이 피어 중꽃 또는 중무릇이라 불리는 이 꽃은 보통의 꽃들과는 다르게 꽃이 지고 난 후에 난초와 흡사하게 생긴 푸른 잎이 돋아 납니다. 한 뿌리에서 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여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꽃이라 합니다.


서로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도 못 만나는 꽃과 잎을 가진 꽃무릇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 '슬픈 추억'입니다. 모든 들꽃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듯이 이 꽃도 몇 가지 버전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통칭 상사화(相思花)라고 불리는 꽃무릇은 중국 양자강 유역이 원산지로 일본을 통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왔습니다 ⓒ 임영열

먼 옛날에 절에 불공을 드리러 온 처녀가 잘 생긴 스님을 사모하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시름시름 상사병을 앓다가 죽은 뒤, 스님의 방 앞에 붉게 피어났다는 이야기와 그 반대로 스님이 세속의 처녀를 사랑하여 가슴만 태우다 입적(入寂)한 후에 그 자리에 피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듯이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스님과 처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한 채 꽃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 임영열

슬픈 추억의 꽃, 꽃무릇의 개화 기간은 다른 꽃에 비해서 비교적 짧은 편입니다. 장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환벽당의 꽃무릇은 9월 하순경 절정을 이루었다가 10월 초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꽃을 보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지금 환벽당에는 붉은 그리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환벽당 주변에는 국가 명승이 두 곳 더 있습니다.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식영정(息影亭)과 조선 중기 소쇄 처사 양산보가 지은 별서 정원, 소쇄원(瀟灑園)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일찍이 '면앙정가'를 불렀던 송순(俛仰亭 宋純 1493~1582)은 한 동네에 세 경승지가 있다 하여 이곳을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이라 하였습니다.

담장 밖에서 훔쳐본 환벽당의 모습 ⓒ 임영열

가늘고 푸른 긴 꽃대는 마늘종과 흡사합니다 ⓒ 임영열

환벽당 인근의 호수 생태 공원에서는 온갖 가을꽃들과 함께 호숫가를 거닐며 깊어 가는 가을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나라 위해 싸웠지만, 그 충성의 대가로 죽임을 당한 호남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사연이 담겨 있는 정자, 취가정(醉歌亭)과 김덕령 장군이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왕버드나무도 볼 수 있습니다.


임영열 기자(youngim147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