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이 잘랐다?' 고흐의 귀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

[컬처]by 오마이뉴스

확인 안 된 진실이 광기로 이어지던 시간


'고흐의 귀는 고갱이 잘랐다?' 이는 2014년 4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의 제목이었다. '반 고흐, 고갱 아니라 동생 테오 때문에 귀잘랐다.' 이것은 2016년 12월 28일 통신사 <뉴시스>에 실린 기사였다.


그에 앞서 2009년에도 <동아일보>를 비롯한 몇 개의 뉴스에 고흐의 귀를 고갱이 잘랐다는 보도가 나왔다.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뉴스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예술사학자들이 새로 발간한 책에서 한 주장을 논거로 삼았다. 고갱은 펜싱을 취미로 익혔으며 펜싱에 사용하는 칼을 노란 집에 가져왔고 서로 다투다가 이를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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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89년 ▲ 코톨드 미술관 ⓒ 코톨드 미술관

1888년 12월 23일 밤, 아를의 노란 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여전히 무수한 설명과 의견이 나온다. 그럼에도 130여 년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사건의 실체가 객관적으로 확인됐다고 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고흐가 잘린 귀를 들고 아를의 1번지 유곽에 가서 라셀이라는 여성에게 '이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시오'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맡겼다는 사실이다.


노란 집 사건 사흘 후에 고갱은 베르나르에게 그 정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15년 후에 자서전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시 말했다. 그 사이에는 차이와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고갱의 진술에 따르면, 고갱은 그날 저녁 무렵에 고흐와 다투고 바로 노란 집을 나왔다. 이후 근처 호텔에 묵었으며, 아침이 되어 고흐가 진정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런데 15년 후의 고갱의 말에는 술이 들어 있는 압생트 잔을 고흐가 자신에게 던졌고, 노란 집을 나온 자신을 고흐가 면도칼을 든 채 따라 왔다고 추가했기 때문이다.


24일 오전에 고갱은 파리의 테오에게 전보를 쳤다. 25일 오후 1시 20분에 테오는 아를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중 나온 고갱과 함께 병원에 입원한 고흐를 만났다. 테오는 고갱과 함께 26일 새벽 기차를 타고 아를을 떠났다. 아픈 고흐를 두고 너무나 서둘러 파리로 출발했다.


테오는 12월 21일에 요하나 봉어에게 청혼해 허락을 받았다. 테오는 약혼자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흐를 아를에 홀로 남겨 두고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 파리로 떠났고, 고갱 역시 그와 함께 도망치듯 떠났다.


홀로 남은 고흐는 12월 26일 신경증적 반응을 보였고, 27일에는 발작을 일으켰다. 병원에서는 두 번째 발작에 이르자 정신병원으로 이송을 논의했다. 그러나 고흐가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계속 진행되지 않았다. 고흐는 1889년 1월 노란 집으로 돌아와 생활했으며, 이때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그렸다.


당시 그린 '화판, 파이프, 양파, 봉랍이 있는 정물화'에는 편지 한 통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편지에 찍힌 소인은 1888년 크리스마스 당시 사용했던 것이고, 편지를 보낸 곳이 테오가 사는 집 근처 우체국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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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판, 파이프, 양파, 봉랍이 있는 정물화」 1889년 ▲ 크릴러 뮐러 미술관 ⓒ 크릴러 뮐러 미술관

이 편지의 내용에 테오가 약혼을 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추정해,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는 테오 때문이었다는 의견이 나온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며 생활할 수 있는 돈은 전적으로 테오에게 나온 것인데, 테오에게 부양할 가족이 생긴다면 고흐가 받아왔던 지원이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불안감이 고흐가 발작을 일으켰던 원인이라는 것이다.


2월초에 고흐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열흘 후에 퇴원했지만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이웃 주민들 30명이 서명한 탄원서가 2월 25일에 제출됐고 조사가 진행됐다. 그리고 5월초 고흐가 아를을 떠나기 전까지 병원에 있었다. 5월 8일 고흐는 생 레미의 사립요양원으로 옮겼고 그 후 15개월간 더 살아 있었다.

침묵을 깨다

과연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인지, 스스로 잘랐다면 어떻게, 얼마나 자른 것인지에 대한 사실은 여전히 모호하다. 사건의 당사자인 고흐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여 진실은 영원히 파묻히게 된다. 고흐는 여러 번 고갱의 과묵함을 언급했고 자신은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고흐는 침묵했고, 고갱은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고갱은 15년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일에 대해 해명했다. 그 설명은 전적으로 고갱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며 객관적이지 않았다. 고갱이 침묵을 깨면서, 사건의 정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했다는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후 고갱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의혹은 그가 아를에서 고흐와 갈등한 일이나 파국의 결과에 대한 책임보다는 냉정하고 무감각하게 자신에게만 유리한 방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였다는 점에 집중된다. 이후 그는 믿을 수 없으며 냉혹한 인간으로 각인되었다.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고갱은 너나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을 여러 차례 했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내가 가까이서 직접 겪어본 바에 의하면 그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으로 흥분해 있지만 실제로는 무책임해.'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벌판에서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고, 사흘 뒤인 7월 29일에 숨졌다. 빈센트의 죽음을 나중에 베르나르로부터 들었던 고갱은 편지를 썼다.

'빈센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들었네... 정말 슬픈 일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슬프지 않아. 이미 난 그의 죽음을 예견했고 그 가엾은 친구가 자신의 광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기 때문이지. 한순간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는 큰 행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네. 그로 인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환생하여 이승에서 한 훌륭한 일도 보답 받을 수 있을 테니까(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나마 동생에게 버림받지 않았고 화가 몇 사람이 그의 작품을 이해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고갱은 고흐 사후에 그의 그림이 전시되는 것에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베르나르는 고흐의 회고전을 기획했다. 이에 대해 고갱은 강하게 반대했다.

'자네가 고흐의 작품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더군. 내가 고흐의 그림을 좋아한다는 건 자내도 알겠지. 하지만 대중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생각해 보게. 테오도 그렇게 된 마당에 대중에게 고흐와 그의 광기를 상기시킨다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세... 우리 그림에 대해서도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네.'

베르나르는 고갱의 반대를 무시하고 1892년 4월 고흐 회고전을 개최했다. 중요한 점은 고갱이 고흐를 언급하는 중요한 고비마다 그의 '광기'를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갱이 테오를 언급하는 것은 테오 또한 고흐가 죽은 후에 정신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고흐의 가족에 정신이상과 관련한 병력이 다수 나타났고, 고흐 자신이 정신 병원에 수용됐고, 어릴 때부터 간질 발작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고흐를 정상이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사실 고흐는 자신의 정신적 긴장 상태의 끈을 놓지 않았고, 창작에 대한 열정에 그 정신적 긴장의 팽팽함을 강렬하게 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창조적 능력을 왕성하게 발휘해 끝내는 위대한 성공을 이루었다는 점에는 일말의 의심도 할 수 없다. 고흐 사후 일어난 인간 고흐와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의 광풍과 열기는 끝도 없다. 그에 대한 관심의 확산과 집중도는 그에 대한 전기와 소설, 영화가 끝도 없이 재생산, 확대 재생산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광기에 대한 연구는 많은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접근하는 문제이다. 다양한 의견과 여러 연구들이 있었지만 그의 창조성과 관련하여 광기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명쾌한 의견도 없었다.


고갱이 고비마다 고흐의 광기를 거론하며 냉정한 태도를 견지한 이유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물론 고갱이 고흐의 천재성을 그의 광기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의미가 폄하될까 우려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고흐가 미쳤고, 그의 그림이 그의 광기의 소산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통념적으로 일반화되는 현상에 고갱의 말과 생각이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고흐는 자신의 정신과 심리가 불안정하며 발작을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다. 고흐는 아를의 정신병원과 생 레미의 수용시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고흐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신적 긴장과 불안함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위무했던 것일까?


고흐는 그림 그릴 때 자신은 미치광이에 가까운 상태가 되며 그림을 그리고 나면 기진맥진해 진다고 했다. 자신이 그림을 너무 빨리 그리지만 모든 그림은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것이었을 피력했다. 정신력과 체력을 극한까지 소진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사실적 그림을 그리려 했고, '나의 그림이 곧 나 자신'이라 말했던 고흐와 그의 작품을 광기의 프레임에 끼워 넣은 고갱은 성급했고 과도했다.


인간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까? 한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잠재의식이 중첩되고 혼합되어 이루어지는 사고와 행위를 인간의 언어를 통해 논리적으로 규정하는 일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하물며 현실 세계를 초월하는 상상력과 표현력으로 감상자들의 눈과 사고를 집중시키는 어마어마한 창조력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화가를 이성의 언설로 규명하는 것이 합당할까?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하기 전의 고흐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충분히 밝고 유쾌했다.

오마이뉴스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의 자화상」 1888년 ▲ 화재로 소실 ⓒ 화재로 소실

지봉근 기자(njoybg@naver.com)

2019.10.1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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