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 굴뚝 표정, 한번 웃고 가실게요

[여행]by 오마이뉴스

경북 안동 하회마을 옛집 굴뚝ㅡ하회구곡


쉼 없이 달려왔다. 안동 여행의 막바지다. 옛날 살림집은 둘러보았고 이제 하회마을 안팎에 점점 박혀 있는 서원과 정자, 정사를 들어가 봐야겠다. 많기도 하거니와 넓게 퍼져 있어 어떻게 둘러볼까 고민도 해보았다. 다행히 하회마을 선조 가운데 하회구곡을 설정하여 경영한 사람이 있어 이를 따라가면서 살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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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서원 누각 만대루가 날개를 활짝 펴 하늘을 갈랐다. 만대루는 입교당 대청마루에 앉아서 보면 청천절벽(晴川絶壁) 병산을 가른다. ⓒ 김정봉

하회구곡(河回九曲)을 따라 서원과 정자, 정사의 공간으로

조선 선비들은 산수가 좋은 아홉 굽이 계곡이나 강변에 구곡을 설정하고 수양공간을 마련하였다. 자신만의 이상세계를 구현하려 한 것이다. 구곡은 단순히 경치가 수려한 공간이 아니라 조선 유학자들의 정신과 자연관이 내재해 있는 공간이다.


구곡에 서원과 정자, 정사를 짓거나 경영하면서 자연과 벗하며 구곡가를 읊고 더 나아가 구곡도를 그려 문학과 예술, 건축이 융합된 하나의 문화, 구곡문화로 정착하기에 이른다. 구곡은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비롯하였으나 조선유학자들이 더 심취하여 전국 곳곳에 구곡을 설정하였다.


대표적으로 이황의 도산구곡,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정구의 무흘구곡을 들 수 있다. 전국 150여 곳이고 경북에는 43곳이나 된다. 그 중 하나가 하회구곡이다. 하회구곡은 하회마을 주변에 설정한 구곡원림을 말한다. 하회구곡을 설정, 운영한 이는 남옹 류건춘(1739-1807)이다. 남옹은 하회구곡을 설정하고 운영하면서 하회구곡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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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구곡도. 하회마을 누리집에 있는 ‘하회마을관광안내도’ 위에 2015년 경상북도에서 발간한 중 안동 하회구곡 편을 참고하여 하회구곡을 노란 타원형으로 표시했다. ⓒ 하회마을누리집

하회구곡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며 설정하였다. 1곡 병산을 시작으로 남포, 수림, 겸암정, 만송, 옥연, 도포, 화천을 거쳐 9곡 병암에서 마무리한다. 구곡 중 2곡 남포, 3곡 수림, 7곡 도포는 흔적을 찾기 어려워 추정할 뿐이고 9곡 병암은 더듬어볼만한 하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나머지 5곡에 집중하였다.

하회구곡의 시작,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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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과 동재 맞배지붕. 입교당 옆에서 본 병산으로 동재 맞배지붕 지붕선과 병산의 산세가 닮았다. ⓒ 김정봉

1곡은 병산(屛山)이다. 하회마을의 주산인 화산(花山) 앞산이 병산이다. 병산과 화산 사이에 낙동강이 흐른다. 병산에 이르러 낙동강은 비로소 하회의 물, 화천이 된다. 하회구곡의 시작물이다. 화산자락에 병산서원이 섰다. 우리나라 건축가가 꼽는 제일의 서원이다. 서애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배롱나무 안내에 따라 복례문(復禮門)에 들어서면 거대한 만대루(晩對樓)가 하늘을 '一' 자로 가르며 무겁게 서 있다. 전생의 업보를 치르듯 수백 년 누각을 이고 있는 기둥은 휘어지고 갈라져 험상궂다. 처음 당도한 유생들은 겁깨나 먹었겠다. 기둥 틈새로 '병산서원(屛山書院)'과 그 너머 '입교당(立敎堂)' 편액이 아렴풋하다.


고개를 숙여 만대루를 빠져나오면 입교당 앞마당이다. 무거운 만대루에 눌려 있다가 해방감을 얻게 되지만 여기 또한 만만치 않다. 강학을 하는 입교당과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둘러싸인 이 마당은 엄숙한 학습공간이다. 엄숙한 분위기는 이내 무거운 침묵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입교당 뒤편은 존덕사(尊德祠)가 있는 제향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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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서재굴뚝. 서재굴뚝은 서쪽뒤편 토방 위에 있다. 네모난 돌을 다듬어 만든 돌굴뚝으로 야무지게 생긴 것이 고고한 선비 닮았다. ⓒ 김정봉

서원의 굴뚝은 대개 기단굴뚝이거나 사람허리 높이의 낮은 굴뚝이다. 학습의 공간임을 염두에 두고 불김을 최소화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병산서원에서 4기의 굴뚝을 보았다. 동재와 서재굴뚝은 토방 위에, 입교당의 명성재 방과 경의재 방, 두 개 굴뚝은 뒤편 기단에 숨어 있다. 동재와 서재굴뚝은 네모난 막돌을 다듬어 쌓아 만든 돌굴뚝이다.


흔들림 없는 고고한 자태, 추사(秋史) 집에 있는 고고한 돌굴뚝을 닮았다. 비굴하게 납작 엎드리지도 않고 허세 떨며 높이 솟지 않은 겸손한 굴뚝이다. 입교당 굴뚝은 기단굴뚝이다. 두 개의 숨구멍과 함께 보면 영락없는 웃는 낯이다.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입교당 팔작지붕 합각에게 슬퍼하지 말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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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교당 기단굴뚝. 입교당 뒤 동쪽 굴뚝은 입교당 건물 숨구멍과 같이 보면 방긋 웃는 모양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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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교당 동쪽 합각무늬. 팔작지붕에 생긴 삼각형 부분을 합각이라 한다. 입교당 합각무늬는 환기구멍과 와편 무늬가 합해져 슬픈 표정의 얼굴 모양이다. ⓒ 김정봉

하회구곡의 '변곡(變曲)', 겸암정사(謙庵精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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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암정사 정경. 겸암의 호처럼 겸손한 집이다. 만대루가 출입금지 되면서 겸암정 대청마루는 객들에게 안동 최고의 휴식처가 되었다. ⓒ 김정봉

병산에서 고갯길 넘어 2곡 남포와 3곡 수림을 지나 4곡 겸암정(謙菴亭)에 접어든다. 부용대 서쪽 숲속에 보일 듯 말듯 정자 하나가 숨어 있다. 겸암정이다. 1567년 겸암 류운룡이 정신을 수양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집과 정자를 아울러 겸양정사라 부르고 있다. 겸암의 호는 퇴계가 지어준 것으로 겸암정 편액글씨는 퇴계의 친필이다.


산중턱에 걸린 산중암자처럼 고요하다. 쓸쓸해도 기분 좋은 집이다. 조각문 옆의 동심원무늬 꽃담과 산세 따라 시름시름 올라탄 담장은 하나의 볼거리지만 참맛은 다른데 있다. 3곡 수림을 유유히 흘러온 강물은 겸암정 아래 벼랑을 변곡점(變曲點)으로 갑자기 굽어져 '곡(曲)소리'를 내는데 겸양정 대청마루 기둥에 기대앉아 이를 즐기는 맛이 참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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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암정사 굴뚝. 겸암정에서 멀리 떨어져 언덕에 홀로 우뚝 서있다. 화룡점정은 이럴 때 쓰이는 말인가 보다. 서 있는 위치가 절묘하다. ⓒ 김정봉

겸암정 굴뚝은 서쪽에 하나, 동쪽에 하나 있다. 서쪽 굴뚝은 담장 안에 고요히 갇혀있고 동쪽 굴뚝은 돌계단 가운데에 드라마틱하게 서 있다. 암자라면 탑을 세웠을 자리에 탑 대신 서 있다. 이 자리를 비워두었으면 얼마나 밋밋하고 서운했을까. 잡티 없는 민무늬 얼굴에 이것만으로 서운했는지 줄무늬를 내어 서운함을 덜었다.


5곡은 만송(萬松)이다. 하회마을 서북쪽 끝, 강변에 있다. 이 또한 겸암의 작품이다. 겸암은 마을의 허한 곳을 막기 위해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비보숲을 조성하였다. 류건춘은 만송의 사계를 노래했고 1919년 류점등과 마을사람들은 이곳에서 3.10운동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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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숲. 아름다운 솔밭으로 류건춘은 만송의 사계를 노래했다. 편안한 시절에는 마을사람들의 쉼터이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 김정봉

하회구곡의 절정, 옥연정사(玉淵精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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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사 지붕. 옥연정사 지붕은 모두 팔작지붕으로 고색이 창연하다. 북쪽으로 들어앉은 가운데에 있는 것이 옥연정사의 중심건물인 원락재다. ⓒ 김정봉

6곡 옥연(玉淵)은 부용대 아래의 못으로 그 물빛이 옥같이 깨끗하고 맑아서 옥연이라 했다. 옥연 동쪽 부용대 기슭에 옥연정사가 있다. 1586년 서애 류성룡이 마련한 정사다. 동쪽에 대문채와 안채가 있고 서쪽에 사랑채와 별당채가 있다. 사랑마당에 서애가 63세에 심었다는 노송이 자라고 있다.


서애는 여러 건축물에 애정을 듬뿍 쏟아 이름을 불러주었다. 사랑채를 세심재(洗心齋), 별당채를 원락재(遠樂齋), 문은 간죽문(看竹門)으로 하였다. 마루에도 이름을 지어 세심재 마루는 감록헌(瞰綠軒), 원락재마루는 애오헌(愛吾軒)이라 했다. 서애는 원락재에서 징비록을 썼다. 1597년 북인의 탄핵을 받고 옥연정사로 물러나 쓴 것이다. 징비(懲毖),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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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사 사랑마당. 정면에 살짝 보이는 건물은 안채이고 옆으로 보이는 집은 사랑채다. 마당 한쪽에 서애가 심은 소나무가 있다. ⓒ 김정봉

샛문 옆에 아담한 굴뚝이 앉아 있다. 큰 굴뚝을 허물고 새로 세운 굴뚝이다. 연기구멍을 입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 눈과 코를 새겨 헤벌쭉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활짝 웃는 하회양반탈을 표현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후손들이 징비록을 쓴 서애 할아버지의 결연함을 해학으로 풀어내려 한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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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사 안채굴뚝. 이 자리에 있던 키가 큰 굴뚝을 없애고 대신 헤벌쭉 웃는 모양의 아담한 굴뚝을 세워 놓았다. ⓒ 김정봉

하회구곡의 마지막, 화천과 병암에서 강물에 작별을 고하고

물줄기는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외로운 섬 7곡 도포를 지나 8곡 화천에 닿는다. 마을사람들은 1곡 병산을 지난 물줄기를 화천이라 불러줬다. 마을의 주산을 화산, 꽃뫼로 부르듯 물줄기는 화천, 꽃내로 부른 것이다. 이제 화천에서 이별을 준비한다. 부용대 동쪽 끝자락에 화천서원을 남겼다. 겸암을 기리기 위해 1786년에 세웠다가 훼철된 후 1996년 복원되었다.


하회구곡의 마지막 9곡 병암(屛巖)이다. 쉼 없이 내달린 강물은 이제 마지막이다. 병풍바위, 병암에서 작별을 고한 물줄기는 화천에서 낙동강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예천 삼강주막으로 곧장 내달려갔다. 8곡 화천에서 다른 물이 오고 있었다.


김정봉 기자(jbcaesar@naver.com)

2019.11.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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