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만에 밝혀진 천재 조각가 죽음의 진실

[컬처]by 오마이뉴스

비운의 천재 조각가 권진규


2009년 일본의 명문학교인 무사시노(武蔵野)미술대학에서는 개교 80주년을 맞아 학교 역사를 대표할 만한 단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고자 했다. 교수와 학생들의 엄격한 추천과 심사를 거쳐 일본화, 서양화, 조각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가 한 명을 선발하였다. 그 한 명이 바로 1949년에서 1953년까지 이 학교를 다닌 한국인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1973년)였다.


일본의 명문대학에서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을 가장 뛰어난 작가로 선정한 것은 이례적이면서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할 때에는 더욱 뜻밖의 결과였다. 무사시노미대는 그해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과 대한민국현대미술관의 공동 주최로 도쿄와 서울에서 '권진규전'을 성대하게 열었다.

권진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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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의 권진규. 권진규(상성문화재단, 1997) 재촬영

권진규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제1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따라 춘천으로 이주하여 1942년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흙을 만지기 좋아하였고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고보 졸업 후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이때 도쿄의 사설 아틀리에에서 미술 수업을 받는 경험을 한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에 고국으로 밀입국하여 서울에 정착하여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서 회화 수업을 받는다. 얼마 후 광복이 되고 2년이 지난 1947년 다시 도쿄로 건너가 1948년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이쾌대가 다닌 제국미술학교를 계승한 곳이 무사시노미술학교였음을 생각하면 권진규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이쾌대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권진규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선생은 유럽에서 공부한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1897~1981)였다. 그는 프랑스의 조각가 부르델(E. A. Bourdelle, 1861-1929)의 제자로서 일본 조각계의 지도적인 인물이었으며 부르델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러한 학맥 속에서 권진규 또한 부르델에 깊이 매료되어 큰 영향을 받는다.


권진규는 재학 시절부터 일본 이과회전(二科會展)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1953년에는 일본인 후배 가사이 도모(河西智)와 결혼까지 하였으나 어머니의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959년에 귀국한다. 당시 일본인은 한국으로 들어오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내 가사이 도모는 함께 들어오지 못했다. 권진규는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고, 결국 도모의 부모님에 의해 이혼을 당하고 만다.


1965년 서울의 신문회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가졌으나 일부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미술계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실망한 그는 1968년 다시 도쿄로 돌아가 니혼바시화랑(日本橋畫廊)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이때 일본 미술계의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다시 의욕을 얻은 권진규는 1971년 명동화랑에서 제3회 개인전을 열어 제법 좋은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전시의 좋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에서 느끼는 정신적인 고통과 육신의 병, 현실의 공허함 등에 시달린다.

권진규의 조각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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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 '붉은 가사를 걸친 자소상'. 권진규(상성문화재단, 1997) 재촬영

권진규는 주로 인물이나 말, 닭 등의 동물 모습을 흙으로 구워 제작하는 테라코타(terra-cotta) 방식으로 작업하였다. 물론 브론즈나 나무 조각도 있었으나 주로 테라코타와 건칠(乾漆) 작업에 주력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작가의 정신적인 구도 자세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형상화한 것들이었다. 그의 작업은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표현 방식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면서 직감적 신경에 의존한, 예민한 작업 방식이었다.


이러한 그의 다분히 동양적인 사고는 작업 대상인 사물에 대해 원초적 이미지의 본성을 파헤쳐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불필요한 형식적 장식물을 극도로 생략하면서 대상과의 정신적인 합일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의 사고는 때로는 불교적이기도 하고, 도교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실존주의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탄생된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인간이나 동물들의 애절한 고뇌가 처절하게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그가 주로 작업한 '자소상(自塑像)'과 다른 이들의 '두상(頭像)'을 제작한 작품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실제 전시장에 놓인 '붉은 가사를 걸친 자소상'이나 '비구니' 같은 작품에서는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져 다가서기 어려울 정도의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또 동물을 소재로 조각한 작품에서도 생명체들이 지니는 존재의 의미나 의인화된 생명체의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주로 말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이중섭의 소와 함께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가 그린 말들은 때론 원시적 생명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인간과 친근한 생명체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미술적 조형 면에서 완결된 모습을 보여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인다.

권진규의 비극적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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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일에게 남긴 유서 ⓒ 황정수

권진규의 굴곡이 많았던 삶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장면은 그가 죽음(자살)을 맞이한 순간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 세 점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들어가게 되자 매우 즐거워한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마치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천천히 전시장을 둘러본 후 자신의 동선동 아틀리에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대에 목을 매 세상을 떠나는 비극적 순간을 연출한다.


그는 죽음의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 전 가까웠던 두 사람에게 유서를 남긴다. 유서를 받은 두 사람은, 말년에 가까이 지낸 서울대 교수 박혜일과 대학 강사 시절 제자였다. 그가 남긴 유서는 그의 특별한 죽음만큼 파격적이라 많은 화제가 되었다. 박혜일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혜일 선생 감사합니다. 최후에 만난 우인들 중에서 가장 희망적인 분이었습니다.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 오후 6시 거사"

그동안 미술사에서는 대체로 권진규의 자살 원인을 우리 조각 미술계에 내재해 있는 차별과 그에 절망한 권진규의 좌절이라는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다. 특히 당시 한국 조각 미술계에 만연한 교수 자리를 둘러싼 암투, 기념물과 같은 대형 조각물을 일부 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실망감에서 죽음의 원인을 찾았다. 당시 국내 조각계의 풍토에 실망한 권진규의 좌절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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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와 ‘제자의 얼굴’. 권진규(상성문화재단, 1997) 재촬영

그런데 2006년 연인 같았던 제자가 소장하고 있던 편지들과 작품이 권진규가 세상을 떠난 지 33년 만에 한 미술품 경매회사에 출품되며, 죽음의 이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제자는 권진규가 출강하기 시작한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 학생이었다. 제자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정인이 있었으나, 제자를 향한 권진규의 사랑의 불꽃은 거침이 없었다.


공개한 편지 속에는 나이와 현실을 뛰어넘은 권진규의 애틋한 사랑의 행보가 잘 드러나 있다. 편지의 내용은 사랑하는 제자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때론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였다. 특히 마지막 편지에는 박혜일의 유서에 있는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다. 거사 오후 6시"라는 구절이 그대로 나온다. 이로 보아 그의 죽음은 즉흥적인 판단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권진규라는 위대한 예술가가 당시 조각계의 현실이라는 사회적 문제 때문에 자살했다고 알려져 왔다. 조금은 건조한 이유였다. 그런데 예술 작품을 이루는 모티브의 생명과 같은 '사랑'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흔적들을 보며, 한 위대한 예술가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권진규의 동선동 작업실 벽에는 늘 일본인 아내 도모의 사진과 특이한 문구 하나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중국 근대 사상가 노신(魯迅, 1881~1936)의 이야기에서 따온 말인데, 권진규의 사고를 잘 보여주는 경구 같은 말이었다. 그 특이한 문장은 매우 매력적이어서, 그 글을 읽은 나는 권진규가 천재였음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존재에 감사한다. 그 말은 이렇다.

"범인엔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겐 감사를"

황정수 기자(galldada@hanmail.net)

2019.12.1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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