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미술품 최고가 김환기에게 이들이 없었다면

[컬처]by 오마이뉴스

서양화가 수화 김환기의 성북동 인연


근래 '김환기'라는 화가의 이름을 '한국 미술사상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작가'라 부르게 된 것은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그는 본래 비싼 그림을 그리려 노력하지도 않았고, 세상의 부귀를 탐한 미술가도 아니다. 그는 늘 새로운 미술 세계를 갈망하였고, 격조 높은 그림을 그리려 했고, 시대에 맞는 그림을 그리길 원했다.


실제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삶은 평생 화려한 빛을 따라 살지만은 않았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충분히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일찍이 일본 유학으로 미술을 시작한 이래 한국, 프랑스, 미국 등으로 옮겨 다니며 자신이 추구하는 미술정신을 찾아다녔다.


김환기는 천생 화가였고, 선비 같으면서도 문학적인 품성을 가진 예술가였다. 그는 늘 조선시대 문인화가들의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를 닮고 싶어 하였고, 세계적인 화가의 품격 있는 모습을 동경하였다. 김환기가 이렇게 세속적인 욕심에서 벗어나 화가로서 전념하며 살 수 있었던 데는 늘 그를 이해하고 가까이에서 힘을 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환기와 그의 부인 김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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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와 김향안 ⓒ 환기재단

김환기에게서 부인 '김향안(金鄕岸, 1916-2004)'이란 존재는 부인이라는 가족 관계 이상의 소통을 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일본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때 김환기는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가 이끌던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와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城)가 활동하던 '자유미술가협회'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전도유망한 미술학도였다.


또한 정지용(鄭芝溶, 1902-1950), 김용준(金瑢俊, 1904-1967) 등 일본 유학파들과 문학지 '문장(文章)' 발간에 관여하여 권두화를 그리는 등 함께 활동을 하였다. 이때 김향안은 1937년 남편인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의 죽음으로 실의에 차 있을 때였다. 얼마 후 김환기도 오랜 기간 유학하며 멀어진 첫 부인과 이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연애를 하게 되고, 결국 1944년 결혼을 한다.


두 사람은 이후 단지 부부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의 동반자로서 평생을 함께 한다. 김향안은 문학적 재능이 있었고, 그림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또한 당시 문인들과 인연이 많아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서로의 예술 세계를 넓혀간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성 밖 가까운 성북동에 자리를 잡는다.


성북동은 성 안에서 멀지 않은 데다 산세가 좋고 물길이 좋은 곳이었다. 김환기는 자신의 집을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 불렀다. 이는 자신의 호 '수화(樹話)'와 아내의 이름인 '향안(鄕岸)'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은 본래 김환기와 가까웠던 선배 화가 김용준이 살던 집이었는데, 김용준의 권유로 물려받아 살게 된 사연이 있는 집이었다.

김환기의 정신적 지주였던 서화가 김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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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수향산방 전경' ⓒ 환기재단

젊은 시절 김환기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단연 '근원 김용준'이다. 김용준은 김환기에게 문인화나 백자 등 조선시대 미술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 스승과도 같은 선배였다. 두 사람은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는 선후배 사이였지만 늘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다. 두 사람 모두 서양화를 전공한 이들이었으나, 문학적 감성이 뛰어나 화가라기보다는 문사(文士)라 할 만큼 문학적 기질이 강한 이들이었다.


일본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김용준은 막역한 친구인 소설가 이태준(李泰俊, 1904-?)의 집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있는 성북동에 집을 구한다. 그 집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어 이름을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 불렀다. 마침 이 동네에는 문인과 서화가들이 여럿 살았는데 김용준의 집에 자주 모였다.


이때 손재형, 김환기, 이태준, 백영수 등이 자주 모여 술도 마시고 예술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김환기의 호인 '수화(樹話)', 윤효중의 호인 '불재(弗齋)', 백영수의 호인 '우백(又白)' 등은 모두 손재형이 이곳에서 만나며 지어준 것이라 한다.


당시 손재형, 김용준, 이태준 등은 모두 고서화와 도자기 등 골동을 수집하는 벽(癖)이 있어 늘 모이면 대화의 중심으로 삼곤 하였다. 김환기가 조선 백자와 분청사기에 깊이 빠져 많이 모으고,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은 것도 다 이때 이들과 어울리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어느 날 마침 김용준의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집을 내놓게 되었다. 이때 김용준이 김환기에게 권유해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가까이 지내던 두 사람은 해방 후 서울대학에 미술 대학이 창설되자 교수로서 같은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6.25전쟁이 일어나자 김용준이 사상 문제로 월북하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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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가 김광섭에게 보낸 항공 편지(앞면) 1967년 ⓒ 환기재단

김용준이 월북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김환기는 서울로 돌아와 성북동에 산다. 이때 가장 가까이 지낸 이는 유명한 시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인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 1906-197)이다.


김환기와 김광섭은 김용준과의 관계처럼 7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나 서로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다.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환기와 인품이 뛰어난 김광섭은 서로 잘 어울렸다. 이후로 김환기는 서울을 떠나 파리와 뉴욕에서 살 때 김광섭을 집안의 든든한 형처럼 의지하며 지냈다.


두 사람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뿐만 아니라 개인적 예술 세계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늘 서로 의논하며 살았다. 김환기 부부와 김광섭은 서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들을 보면 어느 하나 따뜻하고 애정어리지 않은 것이 없다. 자신의 어려움에 대한 토로, 시인에 대한 기대와 걱정 등 시간과 계절에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었다. 또한 편지들 속에는 그때그때의 마음을 간단한 그림으로 그려 전하기도 하였다.


이때 남긴 편지 중에는 어떤 완성된 회화 작품보다도 감동적인 것들이 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의 겪는 애환에서 느끼는 감동도 있으나, 그보다는 좋은 시를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좋은 그림을 그리기를 바라는 서로의 마음이 진솔하게 보이는 곳에서 예술가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특히 김환기가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존경하는 선배에 대한 예우, 기대, 그리움 등으로 가득 차 있어 그의 마음을 짐작케 한다.


김환기는 김광섭의 호 '이산'을 판소리 단가의 제목을 차용해 '이산 저산'이라 놀려 부르기도 하였다. 김환기는 시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김소월의 시 '산유화'를 차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스스로 시를 지어 그림의 화제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광섭에게 늘 좋은 시를 써주기를 간청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의 투영이기도 하였다.

걸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탄생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환기재단

김환기의 김광섭에 대한 경외와 우정은 작품 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김광섭의 서정적인 시는 김환기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산월(山月)' 연작도 '아리랑' 같은 노래 가사의 영향이 많았으나 김광섭 시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 1967년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과 함께, 한국의 산야와 달 등 자연에 많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한 번은 혼자 말 같은 어조로 김광섭에게 멋진 제안을 한다. 한국의 시 중에서 어머니를 노래한 시들을 모아 각 편마다 그림을 그려서 자비 출판으로 호화판 시집을 을 내 봤으면 하는 뜻이었다. 덧붙여 나이가 들며 자꾸 어머니가 생각난다는 말도 하였다. 그만큼 시에 관심이 많았고, 서정적 정서에 흠뻑 취해 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김광섭과의 우정을 두텁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으론 이런 시에 대한 의식은 그림만으론 그려낼 수 없는 감성을 시인의 작업에서 이룰 수 있다는 의식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결핍의 심정을 김광섭에게 투정하며 말하곤 하였다. "시를 써 주세요. 시인은 다복(多福)도 하여라"라는 말을 거듭해서 할 정도였다. 이는 동양 문인화 사상의 중심인 왕유(王維)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또 어떤 날은 동양의 서예를 응용하여 새로운 추상의 세계를 개척한 미국화가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1910–1962)을 부러워하며,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높은 격조를 닮고 싶은 마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스스로도 동양의 사고를 세계화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는데, 이미 이루어 낸 작가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그는 이런 마음을 김광섭과의 소통을 통해 구체화하곤 하였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 교류는 진실한 예술의 경지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미술과 문학을 초월한 우정은 결국 한국 미술사를 빛낼 걸작을 만들어낸다. 김환기는 뉴욕에서 그동안 그려왔던 구상 회화나 반 구상 회화에서 더 나아가 완전한 추상 작업으로 변신을 꾀한다.


그는 광목을 이용하여 커다란 캔버스를 꾸미고, 그 전면에 점을 찍기 시작한다. 검은색, 푸른색으로 시작한 점은 점차 노란색, 빨간색으로 넓혀 간다. 이 점들은 마치 하늘에 떠있는 무수히 많은 별을 화면에 옮긴 듯한데, 이 작품들은 훗날 '점화(點畵)'라 불리며 그를 상징하는 대표작이 된다.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한 한국미술대상전이 창설되자 주최 측은 뉴욕에 있는 김환기에게 작품 출품을 요청한다. 사실 심사위원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그에게 출품을 요청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으나, 그는 오랜만에 한국 전시에 출품한다는 마음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을 출품한다. 화면 가득히 검푸른 점을 빽빽이 찍은 이 작품은 대상 수상을 하며 화제에 오른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보듯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느끼는 감성을 화면에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작품에 자연스럽게 찍힌 많은 점들은 김광섭 시 속의 수많은 별이고 사람들이다. 김환기가 그동안 그려왔던 자연의 질서를 하늘 곧 우주로 넓혔을 뿐 그의 마음은 크게 다를 바 없다.


김환기는 외로운 뉴욕에서 고국과 고국에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한 점 한 점 화폭에 찍었다. 이 점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화면 속을 맴돌며 김환기의 그리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면에서 김환기는 늘 꿈꾸어 왔던 동양적 사고를 서양식 화면에 격조 있게 옮기려 한 노력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황정수 기자(galldada@hanmail.net)

2020.01.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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