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5억이 생긴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컬처]by 오마이뉴스

[리뷰] 사회의 무관심이 만들어 낸 각박한 청춘의 굴레, 영화 <성혜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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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성혜의 나라> 포스터 ⓒ 아이 엠(eye m)

스물아홉 성혜(송지인)는 월세 사는 고단한 취준생이다. 서른이면 뭔가 대단히 이뤄도 이룰 줄 알았는데 빚만 있지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다. 그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타향살이 중이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빈틈없이 산다. 7년 연애한 승환(강두)도 공시족이다. 만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가난한 연인은 서로가 또 다른 짐일 뿐이다.


성혜는 졸업 후 대기업 인턴으로 입사했으나 성추행 사건으로 반강제로 퇴사한 상태다. 그 사건이 해결되긴커녕 재취업에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불안하다. 그 후 성혜는 편의점, 신문배달을 마치고 잠시 지친 몸을 뉘이고 일어나 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생활이 지긋지긋하지 않냐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생활만이 가장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끼니는 대충 때우기 일쑤다.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 김밥이나 도시락 세트로 해결한다. 얼마 전부터 맛을 모르는 것 같다. 기계적으로 욱여넣기 바쁘다. 살기 위해 되는 대로 먹고 있을 뿐 영양가 있는 제대로 된 끼니는 챙겨 먹은 지 오래다. 죽지 않을 만큼만 굶고, 일하고,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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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성혜의 나라> 스틸컷 ⓒ 아이 엠(eye m)

엄마는 가끔 안부를 전한다며 전화를 하는데, 은근히 병원비를 내주길 바라는 눈치다. 없는 살림이지만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신문배달 구역을 늘려서라도 마련해 보려한다. 월세 내기도 빠듯한데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의 병원비까지 보태고 있다.


최근 성혜의 몸은 어딘가 고장 난 것 같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오며 잦은 구토로 걱정만 늘어간다. 과연 성혜의 몸과 마음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


영화 <성혜의 나라>는 19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작이다. 아홉수 성혜의 일상을 톺아보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군분투를 함께 한다. 정형석 감독은 고시원에서 한 달 만에 발견된 어느 청년의 죽음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각박한 현실에 내몰린 청년을 화두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최근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성혜의 나라>만의 특별함이 보인다. 누구나 성혜였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형태와 강도는 달라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는 첫째 절제된 흑백 화면에서 느껴지는 처절함이다. 흑백 화면은 주인공의 심정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해석할 수 있는 장치다. 성혜의 일상은 24시간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자신의 편이 아닌 세상을 묵묵히 견디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고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망갈 곳도 없고 숨겨둔 돈도 없는데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를 상황에도 성혜는 투덜거리지 않는다.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갈 뿐.


둘째, 사회의 만연한 무관심을 환기하고 있다. 영화 속에는 순간의 외면이 가져온 큰 파장의 힘을 역설하고 있다. 최근 전화 온 친구의 부탁을 들어줬더라면? 성혜가 겪은 직장 내 성추행을 증언해 줄 직장동료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영화는 곳곳에서 나라면 어땠을까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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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성혜의 나라> 스틸컷 ⓒ 아이 엠(eye m)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성혜의 나라로 가고 싶다. 사회는 청춘들에게 그 나이에 맞는 틀을 만들어 놓고 맞추기를 바란다. 스물아홉, 아홉수가 갖는 불안은 20대의 꿈을 망가트리는 기폭제가 된다. 그 나이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직급에 올라가야 하며,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정해진 선택지에 막연히 끼워 넣지 않는 성혜의 선택은 어쩐지 먹먹하다. 거창한 사람이 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초등학생 희망 직업 순위 상위에 오른 건물주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잃어버린 청년들의 일그러진 꿈이다.


과연 5억이 생긴다면 무엇을 할 건가? 영화 <성혜의 나라>는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성혜의 외외의 선택을 통해 아무것도 평범한 일상이 꿈이 된 청년들의 잔인한 꿈을 보듬는다. 꿈을 꾸면 뭐 할까. '꿈은 그냥 꿈일 뿐'이라는 대사가 뼈 때린다. 착하게 살면 당하고 적당히 남 뒤통수도 치고 자기밖에 몰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 별일 없는 평범한 일상이 판타지가 된 세상이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계속 반문하게 된다. 비루한 5포 세대여, 어디에서 웃음을 찾을 수 있을까.


장혜령 기자(doona90@naver.com)

2020.02.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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