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하인 노릇하던 그, 천하의 난초를 그리다

[컬처]by 오마이뉴스

근대 난초 그림을 정립한 서화가 김응원


근대 지식인들이 전통미술에 대해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문인화'이다. 그동안 문인화라는 용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개 남종화나 사군자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이후 많이 나타난 남종문인화풍의 그림과 사군자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남종문인화는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가 창시하였다고 한다. 훗날 송나라의 저명한 시인인 소식(蘇軾)이 왕유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조선후기에 소식을 좋아하는 풍조가 강해지자, 지식인들은 더욱 지적인 감성이 풍부한 문인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론 조선후기 지식인 서화가들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드나들며 새로운 화풍이 조선으로 유입된다. 대표적인 작가가 자하(紫霞) 신위(申緯)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이다. 이들은 '문자향서권기(文字香 書卷氣)' 가득한 서예와 사군자를 즐겼다. 특히 김정희의 서화, 난초에 대한 애호가들의 선망은 대단하였다.

김정희 이후의 난초 그림 풍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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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원 ‘석란도’ 1913년 ⓒ 고은솔

김정희의 서화론과 작품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그의 글씨체와 화풍이 세상을 풍미하였다. 많은 서화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추사체(秋史體)'를 썼으며, 먹을 옅게 사용하여 간결한 화풍으로 그린 산수화와 난초 그림을 따라 그렸다. 이러한 풍조를 '완당 바람'이라 부를 정도로 대단하였다.


김정희의 산수화는 원나라 화풍이 가득하였고, 사군자는 주로 파격적인 난초를 그렸다. 그의 난초는 청나라 양주팔괴(楊州八怪)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세가 강하면서도 파격적인 화풍을 보였다. 당시의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을 따라 하였는데, 조희룡(趙熙龍)이나 허련(許鍊) 등 그의 제자들뿐만 다른 많은 서화가들도 함께였다.


'대원군'이란 이름으로 한 시대를 호령한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도 김정희 화법을 따른 서화가 중의 한 명이었다. 이하응의 난초 그림은 김정희의 난초 그리는 법에 기반을 두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필치를 더해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정치적 입지가 높아지자 그의 난초 그림을 찾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으며, 난초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그의 사랑방에 모여 들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문인들로 윤영기(尹永基), 나수연(羅壽淵), 김응원(金應元), 박호병(朴鎬秉)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이하응의 난초 그림에 핍진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하응이 그림 주문에 힘들어 할 때에는 대신 그리기도 하였다. 특히 윤영기의 대필은 유명하여 구분이 어려웠다. 또한 김응원은 점차 새로운 화법으로 발전시켜 당대 최고의 난초 그림 명수가 되었다.

김응원의 삶과 난초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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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일본에서의 김응원(우측에서 세 번 째) ⓒ 황정수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은 안중식(安仲植)이나 조석진(趙錫晉) 못지않은 당대 최고 서화가 중의 한 명이었으나, 특이하게도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출신지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의 존재, 집안의 내력이나 성장 과정 등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기껏해야 일부 원로 미술인들에 의해 단편적인 사실이 겨우 전할 뿐이다.


증언에 따르면 김응원은 어릴 때부터 이하응의 수하에 들어가 일을 도우며, 이하응의 난 그리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였다고 한다. 거의 하인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던 것 같다. 훗날 김응원이 출세를 해서도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점을 보아도 그의 어린 시절은 큰 소리 칠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근래 미술사 연구자 김가은의 노력에 의하여 김응원의 젊은 시절의 행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김응원은 젊은 시절 중국과 일본을 다니며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그림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김응원이 모시던 이하응이 재집권을 꾀하다 중국 천진으로 잡혀가자, 1882년 함께 지내던 큰 아들 이재면과 함께 이하응을 만나러 천진에 간다. 이때 함께 한 역관이 김정희의 제자인 김석준(金奭準)이었다. 이때 이하응을 다시 만났을 뿐 아니라 청나라의 발전상을 보고 많은 느낌을 얻는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1895년부터는 이하응의 손자 이준용(李埈鎔)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지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이준용과 공장 견학 등을 하며 개화된 일본 문화를 접한다. 이때부터 1907년까지 거의 10년여를 중간에 가끔 한국을 들리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서 지낸다. 일본에서는 단지 서화가로서 활동한 것만 아니라, 정치적인 사건에도 관여하며 많은 인물들을 만난다.


김응원이 일본에서 만난 인물들은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서화에도 능한 인물들이었다. 당시 정치적 이유로 일본에 머물던 박영효(朴泳孝), 유길준(俞吉濬), 황철(黃鐵) 등과 가까이 지낸다. 특히 유길준과 가까이 지내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유람을 다니기도 한다. 두 사람은 여행 도중 서화회를 열기도 하였는데 판매 성과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김응원의 글씨와 유길준의 글씨가 서로 닮은 것도 이때 함께 지내며 서로 영향은 준 것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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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원 ‘석란도 6폭’ 1910년대 ⓒ 고은솔

김응원은 일본에서 많은 일본 서화가들과도 교류를 한다. 그는 한국과 다른 화풍인 일본 그림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함께 모여 서화회를 열어 많은 합작도를 그리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일본인과의 합작도를 보면 미술학교 유학과 같은 형식은 아니나 서화공부를 위해 일본에 간 연유도 있었던 듯하다. 그는 본래 김정희와 이하응의 난법을 따라 날카로우면서도 강한 필선을 특징으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다녀오면서 잎이 길어지고 선도 한결 부드러워지는 등 예전보다 유려한 느낌이 드는 그림으로 변모하였다. 그의 새로운 화풍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였는데,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하였다. 초기의 잎이 매우 날카로우면서도 힘찬 동세나 활달한 필치의 그림은 좋긴 하였으나 스승이나 선배를 답습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 고안한 그만의 청아하고 기품 있는 독자적 그림은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김응원은 1910년 즈음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서화가로서 독자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11년 설립된 서화미술회에서 묵란법을 지도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모든 것이 일본에서 겪은 경험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예전 이하응의 수종 노릇을 하던 그가 서화미술회의 교사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신분상으로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1918년에 서화협회가 창립될 때에는 안중식 · 조석진 등과 함께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오세창(吳世昌) · 안중식 등 당시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사들과 가까이 어울렸으며, 당대의 유명 정치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그들과 많은 합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하였다.


점차 큰 명성을 얻은 김응원의 묵란화는 그의 호를 따라 '소호란(小湖蘭)'이라 불렸다. 그의 작품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1920년 황실의 요청으로 그린 '석란도(石蘭圖)' 10폭 병풍은 웅장하연서도 환상적인 구도를 가진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그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썼는데 행서와 예서를 잘 썼다. 그 중에서도 예서는 구성에 회화적인 맛이 있어 서예가들 못지않게 많은 이들이 선호하였다.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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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이사부로 ‘작품 도록’(1929년)과 작품 ‘난초’ ⓒ 황정수

어느 날 김응원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 일으킬만한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다.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일본제국주의의 초대 정무총감으로 온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1858-1927)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마침 김응원의 솜씨를 알게 되어 난초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 일은 김응원이 일본인 관료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야마가타 이사부로는 김응원이 자신의 그림 스승임을 공공연히 드러내었으며, 정신적ㆍ물질적인 면에서 많은 지원을 하였다. 김응원은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만난 이후 승승장구한다. 김응원은 한국 난초 그림의 최고 명수로 소문이 났고, 일본인들이 난초 그림을 구할 때에는 늘 김응원에게 부탁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가장 많은 주문을 받은 한국인 서화가가 바로 김응원이었다. 현전하는 일제강점기 서화가들의 서화 중 압도적으로 김응원의 것이 많은 것을 보면, 김응원의 서화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준다. 더욱이 해방 후 일본인들이 돌아갈 때 가져간 작품까지 많아, 현재까지도 일본에 김응원의 작품이 많이 전한다.


야마가타 이사부로는 김응원을 통해 일본 관료들에게 사군자를 가르치는 일을 하려 하였으나, 1921년 김응원이 세상을 떠나자 이루지 못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당시 한국에서 문인화를 그리던 일본인 화가 구보타 텐난(久保田天南, 1872-1940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는 구보타 텐난이 조선남화원을 만들자 전폭적인 후원을 한다.


이 모임은 전문화가의 양성보다는 회원들의 마음 수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주로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전국적으로 300여 명쯤 되었다. 한국인도 수십 명이 회원으로 관계하였다. 이들 한국인 대부분은 총독부 아래에서 관료 생활을 하던 이들이었다.


조선남화원이 전국 규모가 되고 전시회를 열고 호화로운 도록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야마가타 이사부로의 힘이었다. 한편으론 거슬러 올라가면 이 모든 것은 김응원의 영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죽고 2년 후인 1929년 그의 작품 도록이 발간된다. 그런데 서문에 그림을 배운 스승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김응원에게 난초를 배웠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응원의 제자인 기생 화가 홍월 오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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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숙 ‘난초’ 두 점 ⓒ 황정수

김응원은 한 때 경성의 대정 권번 등에서 일하는 기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도화 선생을 하기도 한다. 이곳에 있는 기생들에게 난초를 가르쳐 이들 중 여러 명이 화가로서 명성을 얻는다. 또한 이곳을 중심으로 만난 명사들과의 인연도 그의 삶을 다채롭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권번이나 명월관(明月館)에서 가르친 제자 중에 가장 유명하게 된 이는 홍월(虹月) 오귀숙(吳貴淑, 1900-미상)이다.


그는 기생조합인 대정권번에 '오산홍(吳山紅)'이라는 이름으로 기적을 두었는데, 연농(硏農)ㆍ홍월(虹月)이라는 호를 썼다. 그러니 '오귀숙', '오산홍', '오홍월', '오연농'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묵란 그림으로 수차례 입선하여 '서화기(書畵妓)'로 대중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와 함께 서화를 나누며 즐기기를 원하였다.


오귀숙은 단순히 예기를 파는 기생에 머물지 않고, 후에 일본에 건너가 서화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가 서화로 유명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김응원에게 묵란을 배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오귀숙은 김응원뿐만 아니라 김규진(金圭鎭)에게도 배우지만, 김응원의 영향이 가장 많았다.


얼마 후 김응원이 세상을 떠나자 오귀숙은 서화가 김용진(金容鎭)에게 배우러 다닌다. 이후 점점 그림의 기법이 변하여 김응원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초기에는 김응원의 영향이 많았다가 점차 김용진이 추종한 민영익(閔泳翊)의 화법에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듯 김응원의 난초 그림은 김정희, 이하응에서 왔으나, 단순히 그림을 습득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인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일본인 고위 관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웃음을 파는 기생에게도 난초 치는 법을 가르쳤다. 김응원에게 있어 난초 그림은 자신의 재주일 뿐 아니라,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널찍한 길이었다.


황정수 기자(galldada@hanmail.net)

2020.02.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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