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새해

[컬처]by 서필훈

#1

104일. 내가 지난 한 해 외국에서 보낸 날들의 합이다. 이 중 대부분은 커피 산지에서의 시간들이었다. 좋으면서 싫고, 설레이는데 뻔하며, 힘이 솟는데 많이 힘들다. 이토록 삶은 알 수 없는 다면체. 제법 살았다 싶은데도 여전히 돌아서는 골목마다 난망하고 넘기는 장마다 낯설다. 

 

#2

새해라니 솔직히 지겹다.  새해라고 해봤자 사실 하나도 새롭지 않고 언제나 그랬듯이 난망하고 낯설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다들 새해랍시고 새로운 다짐을 하고 서로를 축복하는데 솔직히 나는 이런 즉흥연기 조차도 버거울 정도로 피로하다. 

이상한 나라의 새해

평행우주 개념도

#3 

뜬금없지만 나는 평행우주론을 믿는다. 수없이 많은 우주들이 존재하고 지금 내 인생들이 다른 우주 어딘가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샘솟는 이 삶의 권태와 피로를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현재 우주A에서 강제노역, 우주B에서 도망자, 우주C에서 성냥팔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여파가 차고 넘치다 못해 지구의 내 인생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은 우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윷놀이 판에 내 몫의 말이 네 개인 것처럼 각 우주별로 각개약진하는 내 생들아.

이상한 나라의 새해

이상한 나라의 폴

#4

제법 나이든 사람만 아는 티비 만화가 있다. ‘이상한 나라의 폴’ . 나는 어렸을 때 이 만화가 너무 좋았고 내 삶을 구성하는 몇몇 핵심 이미지를 제공했다. 이 만화는 가히 평행우주론의 만화 버전이라할만 하다. 이상한 나라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현실 세계에 이상한 징조가 나타난다. 그러면 폴이 현재 시간을 멈추고 비틀어진 공간을 통해 ‘이상한 나라’라고 부르는 다른 우주로 넘어간다. 나는 그 때부터 지나는 길섶이나 건물의 구석진 곳, 옷장에 걸린 옷 뒤편, 꽃잎 속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이상한 나라로 가는 통로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그것 말고는 차오르는 이번 생의 허무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고 느꼈다. 그 당시 나는 진지하게 어떤 꽃들 속에는 이상한 나라로 가는 버튼이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이상한 나라의 새해

작자미상, 중세의 우주

#5 

정말로 끔찍하게 싫어하는 주장은, 희망은 미래에 있다는 말이다.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미래는 뻔하니까. 나는 희망이 물체나 사건이 아니라 나 자신을 끊임없이 상대화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끝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그 건너 편에, 평행한 우주들의 방향으로 잇닿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하고 그렇게 주장하고 행동해야 한다. 삶의 진보는 앞이 아니라 곁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이상한 나라의 새해

작고 무수한 우주들

#6

지구에서의 생이 이토록 내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나라에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생긴 징조임에 틀림없다. 빨리 버튼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나름 괜찮다. 어차피 이 생이 전부는 아니고 우주는 많고 내게 속한 말들은 아직 무수히 남아 있으니. 다만 새해에는 커피나 마시고 너와 나의 주변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자. 동서남북의 귀인들이 출몰해서 나를 돕고 천체의 운행이 나를 둘러쌓을 지 모르는 일이다. 

이상한 나라의 새해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방

#7

이 글이 올라갈 때 쯤이면 난 아마도 커피 산지의 길섶을 두리번 거리고 있을듯 하다. 괜찮다. 이 정도면, 이 우주도.

이상한 나라의 새해

20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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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큐그레이더 1호. 줌닷컴에 글을 연재중이며 '커피 리브레'의 대표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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