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16년 만에 다시 만난 이유 ‘용서의 나라’

[컬처]by ㅍㅍㅅㅅ

1. 모니터 앞에서

모니터에는 한 남자로부터 온 답장이 띄워져 있다. 그 메일은 한 여자의 용기와 강인함을 칭찬하는 한편 동시에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어떤 일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 놀랍게도 메일을 보낸 남자, 톰 스트레인저는 이 책 『용서의 나라』의 저자인 토르디스 엘바의 첫사랑이자 그녀를 강간한 남자다.

 

1996년 11월 16일 댄스파티에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연인으로부터 강간당하는 사건을 겪은 토르디스는 자신이 이러한 상황을 자초했다는 부당한 자책감에 빠져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상습적인 자해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던 그녀를 구한 것은 바로 글이었다. 내면의 혼란을 하나씩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녀가 극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며, 강연자라는 성취를 이루는 시작이 된다.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16년 만에

강연 중인 토르디스 엘바

그녀는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종류의 폭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평범한 진실(Á mannamáli)』이라는 책을 통해 명백한 강간임에도 ‘충분한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무죄로 판결 난, 한 성폭행 사건을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아픈 기억을 이겨내고, 성범죄 자체에 집요하게 파고들고, 그 성과를 사회와 공유하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에 속박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강간한 톰에게 메일을 보낸다.

 

반면 톰의 마음에는 스스로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청소년 지도사를 비롯한 각종 직업을 떠돌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2005년 5월, 그는 자신이 강간한 여자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게 된다.

 

처음으로 메일이 오간 시점부터 약 8년 동안 토르디스 엘바와 톰 스트레인저는 1996년 11월 16일, 아이슬란드에 있는 토르디스의 방에서 일어난 강간 사건에 대한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대화를 시도한다. 그렇게 약 300통의 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옭아맨 문제의 결착을 맺기 위해 직접 만나기로 결정한다.

2. 호텔 방 안에서

토르디스가 사는 도시인 레이캬비크와 톰이 사는 곳인 시드니의 정확히 중간 지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그들은 각자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지금 삶에 대해서, ‘그 사건’ 이후로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둘은 분명 같은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그 사건’ 전후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공유하고, 불일치하는 부분을 메꾸어 나가고, 그 일이 그들 각자에게 야기하는 감정을 교환하는 과정을 가진다.

 

그 교환은 힘든 일이다. 자기부정, 수치심, 분노, 포기하고 싶은 마음, 도주하고 싶은 욕구, 영원한 형벌의 감옥에 갇혀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교환하는 순간 ‘그 사건’으로부터 도망칠 가능성은 점점 더 0에 가까워진다. 퇴로가 없는, 오로지 직진만 있는 길이다.

 

많은 이가 아는 것과 같이 굳이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많은 폭력의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검열하고, 부정하고, 부당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비난하고, 극심한 경우에는 스스로에게 해를 입히는 단계에 내몰린다. 마치 토르디스가 그랬던 것처럼.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16년 만에

‘아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은 피해자를 더욱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기껏해야 두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죄를 훔쳐보거나 스스로가 만든 재판정에서 진흙과 똥을 온몸에 칠하고 나는 죄인이니 나를 벌해달라고 과장된 연기를 할 뿐이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겠다고 선언한 톰마저 “강간범이라는 커다랗고 못된 괴물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며 자기 연민 뒤로 숨어버리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럴 때마다 토르디스는 톰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린다. 그리고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링 위에서 이 싸움에 임하기를 요구하고 명령한다. 그리고 톰이 그에 응했기 때문에, 그들은 비로소 1996년 아이슬란드에서 일어난 강간 사건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16년 만에

피해자 토르디스와 가해자 톰.

3. 폭력의 사슬에서 진정으로 풀려나기 위해서

강간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인 동시에 생존자와 도망자인 토르디스와 톰은 케이프타운에서의 치열한 일주일 간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용서에 이른다. 이는 토르디스와 톰, 두 사람이 모두 자기 삶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용기를 내고 그 과정의 고통스러움을 온몸으로 겪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주변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의 기억을 촉발할 때마다 울고 발버둥 치며 그 당시로 질질 끌려가는 희생자가 되는 대신에 기꺼이 잠깐 과거로 돌아가서 뭔가 알아내고 결론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토르디스의 말처럼 과거로 돌아갔다 오는 일은 절대 순탄한 여정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가 과거의 희생자가 되어버리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순간 폭력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16년 만에

침묵하지 않아도 된다. 출처: 양성평등미디어

이 책의 많은 부분은 토르디스의 시점에서 쓰인 에세이로 구성되었지만 동시에 두 저자 간의 긴밀한 협력과 1년 이상의 편집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토르디스가 풀어놓는 케이프타운의 하루하루와 그에 대응하는 톰의 일기는 사건의 당사자 중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그들이 이루어낸 것을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이 책은 상처 입고 무력하고 나약한 피해자도, 불운으로부터 억세게 살아남은 생존자도 없다. 다만 용서하고 용서받을 자격을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맞선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담겼을 뿐이다.

 

토르디스와 톰, 두 저자는 그들 생을 바꾸어놓은 중대한 사건을 직시하고 이를 통해 각자의 평화와 평온을 얻는 데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들이 함께한 일주일에 대한 책을 쓰고 테드 강연 같은 플랫폼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한편 슬럿워크 같은 행사에 참여하는 등의 사회적 활동을 지속해 나가며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시선을 거두지 말 것을 호소한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가해와 피해의 사슬에 엮여들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일들을 겪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폭력적이고도 다정한 세계는 인간이 태어난 순간의 순수함을 오롯이 간직한 존재로 남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슬을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그건 매우 험준한 산을 아무런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오르는 것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토르디스가 톰에게 보낸 이메일 구절을 인용하며 이 책을 덮어본다.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스스로 용서하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라.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이니,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구애받지 말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시간을 갖기 바라. 하지만 내가 오르는 산은 네 것과 달라. 그리고 난 정상에 아주 가까이 와 있어.”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16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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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허희정

2016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 소설부문으로 등단. 빈 공책이 많은 사람.

2018.01.1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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