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디 뻔한 공감 에세이에 지친 이들에게

[컬처]by ㅍㅍㅅㅅ

요즘 서점에 가면 ‘○○하지 못하고 사는 당신을 위한 ○○법’ 혹은 ‘나 자신을 긍정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류의 제목이 붙은 소위 ‘공감 에세이’를 쉽게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완전히 내 이야기잖아!”라며 고개 끄덕일 상황을 제시한 후 글쓴이가 겪어보니 이렇더라며 솔루션을 제시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공감 에세이는 마음속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많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독서 마니아 중엔 공감 에세이의 인기에 눈살 찌푸리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아는 뻔한 주장을 요리조리 방법만 달리 소개한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게 쉽게 해결될 것처럼 써댄다. 이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기승전교훈으로 이어지는 상투적인 에세이 글은 나 역시 아주 싫어한다. 며칠 전 간만에 들른 서점에서 에세이 코너를 훑으며 속으로 욕하던 중 “어라? 그런 글을 지금 내가 쓰잖아? 연재중인 이 글 역시 딱 그런 ‘공감 에세이’가 아닐까?”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일종의 자기반성이자 자기변명. 그리고 에세이를 음미하는 법에 대한 나만의 제안.

뻔하디 뻔한 공감 에세이에 지친 이들

공감 에세이가 흥하는 이유를 나쁘게 말하면, 책이 독자에게 아부하는 탓이다.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처음부터 기획했다는 말이다. 우리 보통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품고 사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직장인으로서의 짜증 나는 순간, 결혼해서 행복한 경험 등 온갖 감정은 페이스북과 커뮤니티만 훓어도 쉽게 알 수 있다. 특정 감정을 공유하는 일부에 집중해 그들을 타깃으로 글로 풀면 바로 공감 에세이다.

 

‘소심한 남자’를 화자로 삼는 내 글을 예를 들자. 사람에 치여 힘들다는 현대인들이 많다. 너무 많은 약속, 지칠 정도로 많은 대화.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한 주에 최대로 잡을 수 있는 저녁 약속은 2번. 월수금 3일 약속 잡히면 전주 일요일부터 힘이 든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 이걸 글로 쓰자.

 

‘굳이 나갈 필요 없다. 방구석에서 혼자 놀아도 즐겁다’는 주제로 글 쓰면 반응이 좋지 않을까? 마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받는 구조하고도 비슷하다. “불금이지만 난 혼자. 하지만 괜찮아 내 영원한 친구 스마트폰이 있는걸”이란 글을 금요일 저녁에 게시하면 금요일 저녁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질 하던 지인들이 공감해서 꾹 누르겠지.

 

그렇다면 독자의 반응을 최우선으로 글 소재를 잡은 자체가 과연 나쁜 일이냐? 관점에 따라 다르다. 책을 독서 소비자의 ‘니즈’를 채워주는 제품이라 본다면, 독자 반응을 신경 안 쓰는 책이 오히려 ‘나쁜’ 책이다. 반면, 책을 작가의 진심만을 온전히 묻어내는 일종의 ‘예술 작품’으로 본다면, 독자 반응에 맞춰 기획한 책은 별로다. 자기 내면으로 긴 여행을 끝내고 유니크한 성찰을 담아 쓰는 책이 더 ‘좋은’ 책이다.

 

“딴소리 마시고 그렇다면 개복치 님의 관점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그저 우리의 ‘좋아요’를 노리고 글을 쓰셔 왔나요?”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핫하하, 무슨 소리를, 전 그냥 제 진심을 담아 썼을 뿐…(동공지진) 죄송합니다” 아니라고 쉽게 말할 순 없다.

뻔하디 뻔한 공감 에세이에 지친 이들

지지지지진심입니다

잡지 에디터와 브랜드 SNS를 운영하는 소셜 에디터, 독자 쪽으로 확 기운 글만 쓴 지가 10년이다. 뭘 쓰든 본능적으로 독자 관심을 떠올린다. 글 쓸 때마다 누가 곁에 앉아 따지는 상상을 한다.

"노잼이야 노잼. 백스페이스 누르는 소리 들린다. 그렇게 써봤자 아무도 관심 없다고!”

하지만 모든 글이란 독자와 필자 사이 어딘가에서 시작하는 법. 글쟁이 마음속엔 여러 욕심이 충돌한다. 마음속에서 반응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소심이가 있는 한편(줄여서 ‘따봉 소심이’라 부르자), “이 글이 너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야? 어디서 주워들은 번지르르한 말을 같다 붙인 건 아니냐고” 따지는 진지한 소심이(줄여서 ‘진심 소심이’라 부르자)도 있다.

 

매주 주말 컴퓨터 앞에 앉아 따봉 소심이와 진심 소심이의 티격태격 끝에 키보드에 손을 댄다. 따봉 소심이와 진심 소심이는 결론적으로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한쪽의 말을 들었을 땐 나쁜 글이 나온다. 진심 소심이 말만 듣고 글 쓴 적은 사실 없고 따봉 소심이 의견이 우세한 경우는 많은데, 독자의 공감에서 출발하더라도 결론까지 독자에게 아부하려 할 때 글은 조잡해진다.

 

언젠가 ‘당신 혼자만으로 충분하다. 사람은 외로울 줄 알아야 한다’라는 멋진 문장을 떠올리곤 그 주제로 글쓰기를 시작했다가 포기했다. 절절히 체감하지 않은 스토리엔 생생함이 없었다. 도리어 혼자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완전히 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에 지쳤지만 외로움도 많이 탄다. 사람이 있어도 힘듦, 없어도 힘듦. 그렇다면 해결책은? 있을 리가. 인생이란 딜레마. 이렇게 글은 쓸 순 없어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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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했다…

앞선 질문 “좋아요만 노리고 글 썼나요” 질문에 정확히 답하자면, 그런 글은 안 쓰려고 합니다만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동물이고 내 안의 ‘따봉 소심이’가 언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에 장담은 못 한다. 만약 내 글 중 식상한 공감 글을 발견했다면 따봉 소심이가 이겼다고 여기면 되겠다.

 

덧붙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는 삶의 미묘한 결이 묻어 있는 에세이다. 웃기다가 슬프고, 슬프다가 웃긴, 현실이 소설보다 신기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읽고 나면 설명키는 어려운 작은 덩어리가 내 속 어딘가 남은 느낌을 주는 에세이다.

 

몇 년 사이 내게 그런 덩어리를 남긴 글은 작가가 쓴 책이 아니었다. 디씨인사이드에 어느 유저가 올린 ‘신림동 신선 썰’,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하던 글쓴이가 자신이 만난 장수생(‘신선’이라 부른다고 한다)들에 대해 쓴 글인데 이야기가 펄떡펄떡 살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림동 신선 썰’로 검색.

 

에세이와 스릴러 소설의 공통점은, 둘 모두 결론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손에 땀을 쥐는 추적 과정이 스릴러 소설의 재미이듯, 에세이에선 이야기와 이야기가 자아낸 분위기가 독자에게 남는 무엇이다. 마지막 범인만 안다고 스릴러 소설이 재밌지 않듯 교훈만 인스타그램에 올려 인증한다고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다.

 

에세이와 스릴러 소설의 차이점은, 스릴러는 다시 읽으면 별로지만 에세이는 자꾸 읽어도 재밌다는 점이다. 글쓴이가 겪은 삶의 경험이 묘하게 나와 겹쳐지는 느낌, 좋은 에세이는 읽을 때마다 포근해진다.

필자 이정섭 (블로그, 페이스북)

대학내일 에디터입니다. 물고기자리입니다.

2018.10.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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