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에선 만날 나를 ‘너’라고 하던데…" 공평하지 않은 호칭에 대하여

[라이프]by ㅍㅍㅅㅅ

추석 명절을 쇠고 서울로 올라가는 자동차 안. 남편이 운전을 하며 말했다. “이렇게 소소하고 편안하게 사는 게 행복인 것 같아. 당신도 그렇지 않아?” 순간 그 말에 확 짜증이 났다.

편한 건 당신만 편했지. 솔직히 명절 때 아무것도 안 했잖아. 잘 먹고 잘 쉬다 오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겠지. 그런데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냐. 부인이 뼈 빠지게 같이 벌어서 울타리를 만들어주니까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솔직히 남편도 당황했을 거다. 이런저런 대화 좀 나누고 싶어서 운을 뗐을 텐데, 그야말로 갑툭튀로 자기 말만 하는 여편네라니. 결국 남편도 발끈했다. “당신,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거 아냐? 진짜 내가 뭔 말을 못 하겠다. 아니 도대체 거기서 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음, 그 변명을 여기서 하자면 나는 사실 일이 힘들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시댁엔 끽해야 1년에 서너 번 내려가고, 그마저도 설거지 외엔 크게 요리를 하는 일이 없다. 평소 집에서도 맞벌이 부부의 특성상 일을 나누어서 하는데, 빨래랑 청소도 나보단 남편이 더 많이 하는 편이다.


물론 돈 좀 번다고 유세 떨고 싶었던 건 맞다. “나 좀 알아줘” 하는 자기애적 시각이 분명 있었지만, 그것도 진짜 핵심은 아니다. 사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명절 내내 시어머니에게서 들은 말 때문이었다. ‘너, 이것 좀 해라. 너, 이리 좀 와보라’며 ‘너’라는 호칭을 반복해 쓰는 것이 내겐 너무도 거슬렸기 때문이다.

출처: 수신지, 〈며느라기〉

좀 맺혀 있었다. 첫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 누워 있을 때, 조리원 방문 후 시댁과 친정이 따로 식사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돌아와 말씀하셨다. “사돈 어르신이 아리 아빠를 ‘김 서방’이라 불러 달라더라. 내가 이름을 부르는 게 대접해 주지 않는 것 같다고. 그리고 아리 아빠가 집에 혼자 있으니 먹을 반찬 좀 챙겨달라 하셨어.” 그 말을 옮기는 아빠의 얼굴은 좀 벌게져 있었다.


대충 그 장면이 상상이 갔다. 아빠는 아마 사돈에게 이런 기대를 했을 거다. 출산한 며느리와 새로 태어난 아가에 대한 이야기. 혹은 그동안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사소한 근황 토크. 하지만 그런 TPO와 좀 맞지 않게, 갑자기 ‘김 서방’이란 호칭 이야기와 ‘김 서방이 먹을 반찬’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섭섭하고 당황했을 수 있다. 팬티까지 다려 입히던 딸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이후 아버지는 남편을 ‘김 서방’이란 불렀는데, 난 그때마다 어쩐지 약이 올랐다. 그리고 친정과 시댁을 번갈아 다녀오는 명절 때면 그야말로 약 오름이 하늘을 찔렀다. 만만한 게 남편이니까 그때마다 난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시댁에선 만날 나를 ‘너’라고 하던데, 왜 당신만 ‘김 서방’이지? 이봐, 김 서방님! 시댁에도 제 호칭에 대해 신경 좀 써달라 부탁하시죠.

그러면 그럴 때마다 남편은 참 평온한 얼굴로 이렇게 받아치는 것이었다. “어른이 편하게 부르는 건데, 당신 너무 민감한 거 아냐?”


참 의문이다. 대체 민감하다는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네이버에 ‘며느리 호칭’이란 말을 검색해 보았다. 일단 국어사전 탭에 ‘아들과 며느리를 부르는 말’이란 글이 나온다.

자녀가 어릴 때는 ‘철수야’처럼 이름을 부르지만, 장성하여 혼인을 하면 자녀를 대우해 주어 남 앞에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자녀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 아비’ 또는 ‘○○ 아범’이라 부릅니다. 며느리를 부르는 호칭어는 ‘아가’ ‘새아가’와 ‘어미’ ‘어멈’, 그리고 손자 손녀의 이름을 넣은 ‘○○ 어미’를 상황에 따라 적절히 쓸 수 있습니다.

‘며느라기를 위한 호칭은 없다’ / 출처: 한겨레

나와 비슷한 고민을 지닌 어떤 이의 익명 카페 글도 보인다.

결혼한 지 2년 됐고, 아기는 백일이 되었는데 시어머니가 야라고 불러요. 다른 분들은 시어머니가 뭐라고 불러주시나요? 저는 그냥 ○○아~ 하고 이름을 불러주셨으면 좋겠는데,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요?

댓글을 보니 여러 의견이 있었다. “제 이름 불러요. 가끔 야 이러시기도 하고요”(솔비사랑 님), “XX 애미야~또는 얘! 늙어서 그러신 것 같아요. 저희 시부모는 칠순도 넘으심”(어쩌다O 님), “저도 이름 부르실 때도 있고, 야 하실 때도 많아요. 근데 너무 신경 안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인생뭐있어 님)


많은 이가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 와중 염장을 지르는 의견도 있었다. “귀염둥이라고 하시더라구여…, 신랑이 ‘둥이’라고 저장해놔서 그런 건지, 아님 제가 귀여웠던 건지. 히히.”(행복맘유선 님) 댓글을 잘 안 남기는데, 갑자기 극심히 불행해져 답을 남겼다.

저는 너라고 부르십니다. 동병상련이네요.

상황을 보니 ‘너’라는 하대는 정당한 호칭도 아니오, 나와 비슷한 상황을 고민하는 며느리들이 현실에 꽤 많은 것 같은데(그것도 숨어서 말하는), 과연 무엇을 ‘민감하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반대로 내 남편이 ‘김 서방’ 대신 친정 부모에게 ‘너’라는 호칭을 당한다면 과연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아~’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불편하다 태클 거는 판국에, 한 단계 더 내려간 하대에 정말 열 받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아니, 그보다 ‘너’라는 호칭을 실제로 한다면, 우리 시댁 어르신들이 미간 주름 하나 잡지 않을 자신이, 정말 있을 수 있을까? 부지깽이를 들고 쫓아 오는 두 어르신 모습이 상상된다.

출처: MBC

언젠가 우리 언니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웃기지 않냐. 시댁은 ‘도련님’, ‘아가씨’로 존칭하면서 친정 쪽은 ‘처남’ ‘처제’로 부르는 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데, 무슨 도련님과 아가씨냐. 우리나라는 호칭부터 싹 바꿔야 해. 다 뜯어고쳐야 해.

분노하는 언니를 보며, 나는 언니가 시댁에서 뭐라고 불리는지 솔직히 궁금했다. 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그걸 물으려면 ‘너’라고 불리는 내 상황부터 까야 할 것 같았는데, 솔직히 쪽팔렸다. 그리고 좀 두렵기도 했다. 혹시 우리 언니도 ‘야’라고 불리고 있을까 봐. 만약 ‘야’와 ‘너’의 천민 자매가 된다면, 그건 너무 서글프고 코미디 같은 일 아닌가.


나처럼 호칭에 민감한, 아니 비판적 시각의 여성들이 많아졌는지 최근엔 이런 움직임도 있다. 여성가족부가 가족 호칭을 정비해 새로운 이름을 마련한다고 한다. 가령 ’도련님’과 ‘아가씨’는 그냥 ‘○○ 씨, 동생(님)’으로 부르고, ‘시댁-처가’도 남편의 집만 높이지 않고 ‘시가-처가’로 수정하겠다는 방안 말이다.


이에 대한 네티즌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여성 인권이 신장되었는데 당연한 조치다”의 찬성이 있고. “갑자기 잘 살아오다가 왜 갑자기 난리냐”의 반대가 있다. 뭐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바뀌어야 한다’는 쪽에 적극적으로 한 표 던진다. 우리의 인격은 의외로 ‘규정하는 말’에 좌지우지되기 마련이니까.


그 와중 ‘며느리’를 부르는 호칭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가 없음에 심기가 좀 불편해졌다. 그래서 국민들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여성가족부에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싶다.

며느리를 당연히 며느리라 부른다고 생각하시는데요. 그래서 별 연급이 없으시던데. 그렇지 않은 사례가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며느리가 ‘야’ 또는 ‘너’로 불리지 않도록, 절대 쓰지 말아야 할 호칭도 함께 정리해 주시죠.

남편이 말한 것처럼 삶은 평화로울 수 있다. 우리 부부가 김 서방과 너가 아닌, 김 서방과 며느리로 공평히 호칭될 수 있다면. 솔직히 분노조절 장애는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니까. 뜬금없는 포인트에서 분노를 표출하지 않도록, 맥락 없는 개소리에 상처받지 않도록. 공평히 공감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나 하나만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

필자 이승주 (블로그, 페이스북)

전직 카피라이터이자 현 브랜드기획자. 삽질 같은 현실의 다양한 얼굴을 관찰하는 일상관찰자.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

2019.09.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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