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할 수 없는 팜 파탈

[컬처]by 예술의전당

<올랭피아> vs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미워할 수 없는 팜 파탈

에두아르 마네의 '브랜디와 자두'(1877). 캔버스에 유채. 73.7 x 50.2 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워싱턴 D.C.

에두아르 마네는 몽마르트르 카페의 화가였다. 그의 그림 중에는 카페에서의 일상, 카페의 한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 유난히 많다. 부유한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난 부르주아였던 마네는 카페가 보여주는 파리의 매혹적인 순간들을 거의 직관적으로 캐치해 낸다. 그의 카페 그림 속 인물들은 경쾌하고 도도하며, 외롭고 우울하면서도 진실을 담고 있기에 아름답다. 마네는 몽마르트르의 카페 ‘게르부아’에서 모네, 르누아르, 드가, 팡탱-라투르 등 동료 화가들과 격렬한 난상토론을 벌이곤 했다. 파리의 카페를 아지트로 삼았던 이들은 남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마네의 <브랜디와 자두>에서 브랜디와 담배를 든 채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은 사실 카페에서 손님을 찾고 있던 창부였다. 이런 여자들은 1800년대 중반 파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의 여인들이었다. 화려한 도시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인구 200만의 대도시였던 비엔나에서 매춘으로 생계를 잇는 여자는 5만 명이 넘었다.

거리의 여자를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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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2). 캔버스에 유채. 96 x 130 cm, 코톨드 갤러리, 런던.

제정과 공화정이 엎치락뒤치락하며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배하고 정부군과 코뮌군 사이 내전이 벌어지는 등 1800년대 중반 파리의 빛과 그림자는 유난히 깊었다. 이 시대의 시끌벅적하지만 공허한 파리 분위기를 가장 현실적으로 담아낸 그림은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일 것이다. 피로를 애써 참으며 눈앞에 있는 남자를 상대하는, 무표정한 여급 쉬종은 당시 파리의 가난한 처녀들의 실상이었다. 그녀의 젊음은 어둡고 탁한 술집의 공기 속에서 속절없이 시들어가고 있다. 쉬종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는 거울로만 보이는 남자는 무언가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쉬종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만 그 시선은 불분명하다. 그녀는 대리석 카운터에 손을 짚은 채 멀리 있는 관람석을 바라보는 중이다. 그 관람석에는 당대의 여배우들과 유한계급 여성들이 앉아서 서커스를 구경하고 있다. 쉬종은 같은 젊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낄 수 없다. 그녀의 황폐한 무표정은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거리-부와 교육, 직업의 갭–와 그로 인한 좌절감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네는 매독으로 인해 중추신경이 마비되고 다리가 괴사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마네는 쉬종의 시선으로 눈앞에 바짝 다가온 죽음을 보고 있는 듯 하다. 그림이 그려진 지 일 년 후인 1883년 4월에 마네는 51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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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1863). 캔버스에 유채. 96 x 130 cm, 코톨드 갤러리, 런던.

마네의 그림에 대한 파리 부르주아들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1863년 낙선전에 출품된 <올랭피아>의 악명이 너무도 높아서 이후 일생 동안 마네는 세간의 악의적인 시선에 시달려야했다. <올랭피아>는 고전적 기법을 빌려 고급 창부를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올랭피아를 바라보는 고객의 눈은 하녀의 모습과 발치에 숨은 고양이로 나뉜다. 이들은 모두 어둡고 흐릿하며 올랭피아의 위세 앞에 무기력한 모습이다. 올랭피아는 고객이 보낸 꽃다발을 차갑고 오만한 표정으로 무시한다. 누드화가 그리 낯선 장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파리의 관객들, 특히 남성들은 이 그림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부르주아 남자들 중 대부분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급 창부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그림 앞에서 자신이 그림 속 창부에게 무시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화려하게 차린 고급 창부는 화가들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화가 제임스 티소의 그림 속 창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늙은 정부와 함께 무도회장에 막도착한 참이다. 오늘날의 최신형 스포츠카처럼, 19세기 중반의 남자들에게 창부는 일종의 재산 과시 방식이었다. 창부는 특정 남자를 만날 때는 반드시 그 남자에게서 받은 옷과 보석을 걸쳐야만 했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춘희)」의 설정은 당시 고급 창부들의 삶의 행태를 보여준다.

<라 트라비아타>의 실제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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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의 '사교계의 여인'(1885). 캔버스에 유채. 148.3 x 103 cm. 개인 소장.

「동백꽃 여인」에는 실제 모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뒤플레시스로, 본명은 알퐁신이었다.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양장점 점원, 세탁부 등을 전전하던 알퐁신은 스폰서를 만나 마리 뒤플레시스로 이름을 바꾸고 고급 창부로 변신하게 된다. 마리는 창백하고 신비로우며 다소 냉담해 보이는 여자였고 공연을 좋아해 발레와 오페라를 자주 보러 다녔다. 그녀를 둘러싼 여러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알렉상드르 뒤마와 하녀 사이의 사생아인 뒤마 피스였다. 마리는 도박으로 늘 많은 돈을 잃었고 당시에는 불치병이던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결국 1847년 2월에 마리는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의 가구와 재산은 사후 경매로 팔렸으며, 이익금은 대부분 빚쟁이들에게 넘어갔다.

 

뒤마 피스는 이 때 외국에 나가 있었으므로 마리가 죽은 후에야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비탄에 빠진 뒤마 피스는 마리의 면모들 중 선한 부분만 극대화시키고 자신과 마리가 진정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허구를 가미해 「동백꽃 여인」을 완성했다. 이 소설은 1848년 출판돼 선풍적 인기를 얻었고 1852년 연극으로, 1853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주세페 베르디 작곡의 오페라로 공연되기에 이른다. 아름답고 교양이 있으며 약자를 도울줄 알고 결정적으로 폐병으로 요절한 창부의 이야기는 신화화되기에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마리는 여러 남자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사치와 도박으로 많은 돈을 낭비했던 전형적 고급창부였다.

베르디 자신의 이야기 <라 트라비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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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1853년 초연 포스터

베르디는 그 나름대로 이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즈음 그가 재혼하기로 결심한 여자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유명한 프리마돈나였으나 이미 여러 남자에게서 사생아를 넷이나 낳은 상태였다. 그중 하나는 사산이었고 셋은 살아남았다. 주세피나는 이 세 아이들을 각기 다른 집에 보내 버렸다.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건강을 망친 주세피나가 오페라 무대 은퇴를 고려할 때쯤 베르디가 그녀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1847년부터 파리 근교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베르디의 부모는 물론이고, 베르디의 고향인 부세토 주민 전체가 이들의 결합을 반대하고 나섰다. 1851년 초, 베르디는 부모와 절연하고 주세피나를 선택했다. 그 해 6월 베르디의 어머니 루이자가 충격으로 사망했다. 이 즈음은 베르디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디는 그 다음 해인 1852년에 파리에서 연극으로 각색된 <동백꽃 여인>을 관람했다. 베르디는 오페라 리브레토 libretto(대본)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 극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1853년 <일 트로바토레>가 초연된 지 불과 40여 일 만에 <라 트라비아타>의 스코어 score(총보)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라 트라비아타>는 역사극, 그리고 거시적인 인간 관계를 주로 오페라 소재로 삼았던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 드물게 개인의 이야기를 그린 오페라다. 작품의 갈등 구조나 음악적 구성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리골레토>나 <일 트로바토레>에 비해 지극히 단순하다. 1막에서 비올레타는 사랑스럽고 고혹적인 여자이며, 2막에서는 갑자기 희생적이고 순종적인 여자로 탈바꿈한다. 2막은 비올레타–제르몽의 갈등, 그리고 비올레타–알프레도의 갈등이 등장하기 때문에 연극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갈등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해소되어서 비올레타는 죽음 앞에서 연인과 재회하고 그의 아버지로부터도 인정받는다. 그녀는 ‘나쁜 여자’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사실은 ‘착한 여자’였으며 ‘착한 여자’로 죽는다. 말하자면 이 오페라 전체가 비올레타라는 여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바쳐진 작품이나 마찬가지인데 뒤마 피스에게나, 그리고 베르디에게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창작의 목적이었다. 베르디는 주세피나와 12년이나 동거한 끝에 1859년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주세피나의 어두운 과거는 어쩌면 베르디 본인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필자소개 전원경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시티대학교 런던에서 예술경영 및 비평 전공으로 석사를, 글라스고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산업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객석」과 「주간동아」 문화팀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예술의전당 인문아카데미와 서울사이버대학교에서 예술과 역사,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수원SK아트리움의 마티네콘서트 <미술관옆 음악당>의 진행자이기도 하다. 「예술, 역사를 만들다」, 「런던 미술관 산책」,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등의 책을 썼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8년 4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8.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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