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먼 나라의 여자

by예술의전당

그림 속 오페라 - 휘슬러 <어머니> Vs 푸치니 <나비부인>

 

일본에 대한 서방 최초의 기록은 마르코 폴로의 「 동방견문록 」 (1299)에 등장한다. 여기서 마르코 폴로는 일본을 ‘지팡구Zipangu(현재의 ‘Japan’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라고 부르며 흥미진진한 기록을 남긴다. “일본 사람들은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다. 일본 왕의 궁전은 순금으로 지붕이 덮여 있으며, 궁전 바닥 역시 손가락 두 개 두께의 금이 깔려 있다.” 황금에 목말라 있던 유럽인들에게는 실로 눈이 돌아갈 만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 ‘황금의 나라’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마르코 폴로 자신도, 그리고 그에게 일본을 소개해준 원나라인들도 정작 일본에 가보지는 못했다는 데 있다. 원나라에서나 유럽에서나 일본은 바다 건너 있는 상상의 나라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상 속의 일본은 현실에는 도저히 존재할 법하지 않은, 엄청난 금은보화로 뒤덮인 나라로 점점 더 미화되었다. 어찌 보면 마르코 폴로가 심어놓은 일본에 대한 환상은 제국주의가 유럽을 휩쓴 19세기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1820~1850년대의 낭만주의자들은 현실도피의 일원으로 ‘여기 아닌 다른 곳, 다른 시간’을 동경하는 경향이 강했다. 멀리 떨어진 땅과 먼 과거는 내면의 자아를 찾으려 하는 낭만주의자들의 여행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해야 할 세계였다. 특히 과거는 갈 수 없는 세계였지만, 먼 나라는 마음만 먹으면 직접 방문해볼 수 있었다. 먼 나라 여행은 새로운 문화와의 조우이자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답답한 일상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되는 길이기도 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서양에 의해 침탈당하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자신들의 환상을 유지하려 했다. 한마디로 낭만주의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동양의 이미지는 ‘마법에 빠진 도원경’ 같은 것이었다.

일본의 개항과 우키요에의 등장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먼 나라의 여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9세기경). 목판에 프린트, 25.7 x 37.8 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1853년, 일본은 페리 제독이 이끄는 네 척의 미국 군함에 의해 개항을 맞았다. 개항과 함께 일본 정치 내부에도 큰 변화가 닥쳤다. 메이지 천황이 1868년 일본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250년 간 계속되던 막부 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메이지 천황은 산업화를 장려하고 근대식 군대를 창설해 극동 전체를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불태웠다. 일본은 서양식 학교를 세우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이 서구와의 교류에 나선 것과 비례해서 일본 문화가 서구에 유입되는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특히 서구 지식인층에게 환영받았던 일본 물품은 에도 시대 서민들의 삶을 그린 우키요에(목판화)였다.

 

19세기 화가들은 왜 일본의 목판화에 매료되었을까? 우키요에는 서양 고전 미술과는 달리 화가의 마음속에 담긴 개념을 형상화한 그림들이었다. 우키요에 화가들은 그림자도 원근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터무니없을 정도로 가볍고 화려한 원색들을 거리낌 없이 썼고 인물을 과장되게 전면에 그리거나, 반대로 그림 한가운데를 텅 비우고 인물들을 주변에 배치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키요에는 그때까지 화가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던 ‘자연의 충실한 재현’ 같은 모티브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며 아카데미즘의 무거운 화풍과도 정반대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새로움을 찾던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 작가들을 중심으로 일본풍 예술, 즉 ‘자포니즘’ 열풍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인상파 화가들, 우키요에를 연구하다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먼 나라의 여

에두아르 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1868). 캔버스에 유채, 146 x 114 cm, 오르세미술관, 파리.

1870년대를 전후해 파리 화단에 불어닥친 자포니즘의 규모는 놀라울 정도다. 마네, 휘슬러, 티소, 모네, 로트레크, 반 고흐, 매리 커샛, 드가, 펠릭스 발로통, 고갱, 피사로 등 우키요에를 수집하거나 그 경향을 모방한 화가들의 수는 셀 수가 없다. 마네는 자신의 친구 에밀 졸라를 그린 초상(1868)의 배경으로 우키요에와 일본 병풍을 배치해서 자신과 졸라가 파리의 최신 유행에 민감한 지식인임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 당시 파리의 트렌드는 자포니즘이었다. 파리에서 활동하다 런던으로 이주한 휘슬러는 다량의 우키요에를 수집해 이를 런던으로 가져갔고, 그 덕에 런던에서도 자포니즘이 시작되었다. 휘슬러가 자신의 어머니 안나를 그린 초상화 <어머니>(1871, 원제는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1번>)의 배경에는 기모노 옷감으로 만든 커튼과 다다미 바닥이 그려져 있다. 휘슬러는 엄격한 청교도였던 어머니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고향인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온 터였다.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먼 나라의 여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어머니(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1번)'(1871). 캔버스에 유채, 144 x 162 cm, 오르세미술관, 파리.

이 초상에서도 휘슬러는 쪼그라들고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과 쇠약해진 몸을 연민보다는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할 뿐이다. 파리에 살며 최신 유행 경향을 모두 섭렵하던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역시 우키요에의 화풍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화가였다. 그는 우타마로나 가츠카와 순쇼, 호쿠사이 등의 화집을 보며 우키요에의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와 만화적이며 유연한 선, 인물의 특징을 과장하는 방식, 단색이 만들어내는 유희적인 느낌 등을 캐치해냈다. 그의 <물랭루주> 포스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키요에를 연상시키는 단순하고 과장된 선과 포즈로 표현되어 있다.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먼 나라의 여

클로드 모네의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1876). 캔버스에 유채, 231.6 x 142.3 cm, 보스턴미술관, 보스턴.

궁극적으로 화가들이 그리고 싶은 대상은 우키요에 속의 여인,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가기에는 너무 먼 나라였다. 모네의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1876)처럼 여러 화가들이 그린 기모노를 입은 유럽 여인의 초상은 동양과 서양의 어색한 조우처럼 보일 뿐이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일본을 실제로 방문한 유럽인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1800년대 말까지 마르코 폴로 이래 생성된 일본에 대한 환상, 즉 ‘일본인들은 깨끗하고 극도로 예절을 중시하며 공손하고 작고 하얗다’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상 속의 동양 여자에 대한 궁금증과 정복욕은 제국주의를 당연시하던 19세기의 유럽 남자들 사이에서 더욱 커져만 갔다.

상상 속의 동양 여자, <나비부인>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먼 나라의 여

오페라 '나비부인'의 1904년 초연 포스터

1887년, 피에르 로티라는 해군 장교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게이샤인 현지처와 잠깐 살림을 차렸던 경험담을 「 국화부인 」 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출간했다. 소설은 발표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연극으로도 제작되었다. 이 소설을 리브레토(오페라 대본)로 해서 마스네, 푸치니, 레온카발로 세 사람이 오페라를 작곡했을 정도였다.

 

푸치니는 1898년 런던에서 「국화부인」을 소재로 한 연극을 보고 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남다른 흥행 감각의 소유자였던 푸치니는 이 연극에 대한 영국 관객들의 열광을 보고 오페라로 만들어도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작품이 바로 <나비부인>이다. 남자 주인공인 해군 장교 핑커턴이 미국 영사 샤플레스와 부르는 1막의 이중창에서는 미국 국가의 멜로디가 등장한다. 이 같은 장치들은 당시의 청중들을 매료시키는 흥행장치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이중창에서 핑커턴은 초초상과의 결혼이 장난에 불과하며 나중에 미국 여성과 진짜 결혼할거라고 호언장담하기까지 한다. 극의 시작부터 이미 파국이 예고되어 있고, 관객들은 핑커턴의 애정이 가짜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극을 관람하게 된다. 때문에 극의 전개에 맞춰 긴장감이 상승하기보다는, 관객들은 이 여자의 딱한 처지를 한편으로는 동정하고 한편으로는 냉소하며 극에 몰입하게 된다.

 

밀라노 라스칼라극장에서 이루어진 1904년의 초연은 작곡가의 예상과는 달리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불과 하루 만에 공연이 끝났을 정도였다. 전체 구성이 2막으로 되어 있어서 한 막이 너무 길고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늘 관객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푸치니는 바로 2막을 둘로 쪼개 3막으로 고치고 3막에 핑커턴의 아리아를 새로 작곡해 넣었다. 푸치니의 예상대로 <나비부인>은 브레시아의 재연에서부터는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유럽 각지 오페라하우스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나비부인>에 그려진 동양은 철저히 서양적인 가치관에 맞추어진 상상 속 세계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드리워진 제국주의의 그림자는 지울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다. 그러나 동시에 전성기의 푸치니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해낸 절묘한 멜로디의 아리아와 색채감 짙은 장면들은 이 오페라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끔 만든다.

필자 소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시티대학교 런던에서 예술경영 및 비평 전공으로 석사를, 글라스고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산업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 객석 」 과 「 주간동아」 문화팀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예술의전당 인문아카데미와 서울사이버대학교에서 예술과 역사,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수원SK아트리움의 마티네콘서트 <미술관 옆 음악당>의 진행자이기도 하다. 「예술, 역사를 만들다」, 「런던 미술관 산책」,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클림트」 등의 책을 썼다.

글 전원경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8년 5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