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시대를 호흡하며 스스로 역사가 되다

[컬처]by 예술의전당

11.19(목) 정명훈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11.23(월) 발레리 게르기예프 & 뮌헨 필하모닉


유럽에서는 한 해의 연주회 시즌이 가을에 시작된다. 크리스마스 전까지의 겨울은 음악가들에게 자국 내 활동만으로도 벅찬 시기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공교롭게도 독일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이 연달아 내한하여 한국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줄 예정이어서 이채롭다. 그중에서도 드레스덴의 슈타츠카펠레와 뮌헨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악단들이다. 그들의 오랜 역사는 그저 지나간 역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악단들은 현재의 청중이 주로 듣는 작품을 쓴 고전,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과 동시대의 공기를 호흡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작곡가들의 지휘로 그들의 작품을 연주했으며, 또한 그 작곡가들이 이 악단들을 위해서 작품을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 악단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또한 이 악단들의 연주에서 그 작곡가들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 중 이 두 악단이 초연한 곡들은 무엇인지, 거기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얽혀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들의 연주를 들을 청중에게 흥미롭고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음악의 시대를 호흡하며 스스로 역사가

먼저 이 악단의 초창기인 바로크 시대부터 살펴보자. 1548년 작센 공국 선제후 모리츠의 지시로 요한 발터가 설립한 궁정 악단Hofkapelle에서 시작된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Staatskapelle Dresden은 현존하는 세계의 관현악단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단체다. ‘슈타츠카펠레Staatskapelle’라는 단어는 ‘국립 악단’이라는 뜻으로, 독일의 정치 체제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면서 바뀐 명칭이다. 설립 당시부터도 이 악단은 유럽 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악단이었지만 17세기에 하인리히 쉬츠가 최초의 ‘궁정 악장’으로 임명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후에도 드레스덴에는 하이니헨, 하세, 크반츠 등 당대의 쟁쟁한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음악가들이 궁정 악단으로 초빙되어 활동했다. 이들이 다른 작곡가의 작품과 함께 자신들의 작품도 드레스덴 궁정 악단과 함께 다수 초연했음은 물론이다. 텔레만과 헨델도 궁정 악장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1719년에 드레스덴에 머물면서 이 악단을 위해 적지 않은 수의 협주곡을 작곡했다.

 

흥미로운 것은 드레스덴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던 비발디가 이 악단을 위한 작품을 몇 곡

썼다는 사실이다. 이는 요한 게오르크 피젠델과의 인연 덕분이었다. 1716년, 당시 드레스덴의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피젠델을 이탈리아로 유학 보냈다. 바이올린 기량을 더 연마하고 당대 음악의 주류였던 이탈리아의 최신 경향을 배워오게 하려 함이었다. 이때 비발디에게 악기를 배우고 함께 연주하며 친분을 쌓은 피젠델은 드레스덴으로 돌아온 뒤에도 비발디의 작품을 수집하고 연주하는 데 많은 열정을 보였고, 비발디는 이러한 피젠델의 열정에 부응하여 직접 이 악단을 위해 협주곡을 몇 곡 작곡하여 피젠델에게 보내주었다. ‘드레스덴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들Concerti perl’orchestra di Dresda’이라 불리는 이 작품들은 바이올린을 비롯하여 오보에, 호른 등 여러 악기가 독주 악기로 등장하여 기교적이고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사에도 화려한 자취를 남겼지만, 오늘날의 청중에게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은 무엇보다 독일 낭만주의 특유의 어두운 음향을 간직하고 있는 악단으로 각인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그 흔적은 이 악단에 새로운 음향적 가능성을 부여하고 발전시켜나갔던 작곡가 겸 지휘자 칼 마리아 폰 베버와 리하르트 바그너로 거슬러 올라간다. 드레스덴 궁정 악단의 고유한 음향에 자신의 숨결을 남긴 베버지만, 아쉽게도 그의 주요 관현악, 오페라 작품 가운데 드레스덴 악단의 연주로 초연된 작품의 기록은 없다. 다만 베버가 1824년에 카를 고틀립 라이시거의 오페라 <디도네>를 초연했다는 사실은 기록할 만하다. 오늘날 작곡가로서는 거의 잊힌 인물인 라이시거를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가 드레스덴 악단의 지휘자로서는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디도네>의 초연 2년 뒤 베버의 후임으로 궁정 악장이 된 라이시거는 오페라 반주가 주요 임무인 이 악단의 교향악 연주회를 정기 연주회로 정례화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지금도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은 교향악단으로서보다는 오페라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로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매년 12회의 정기 교향악 연주회를 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이 교향악단으로서 누리는 명성은 많은 부분 라이시거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시대를 호흡하며 스스로 역사가

오페라 '리엔치' 초연 당시의 리엔치 역 의상 스케치

그러나 작곡가로서는 음악사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었던 라이시거의 이름이 서양 음악사 책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바로 바그너의 출세작 <리엔치>를 초연한 지휘자였기 때문이다. <리엔치>는 1842년 10월 20일에 초연되었다. 이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바그너가 이전에 쓴 초기작뿐만 아니라 이후에 쓴 주요 작품들의 초연도 이 공연의 성공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 작품은 바그너에게 작곡가로서만이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출세가도를 열어준 작품이었다. 이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이듬해인 1843년부터 라이시거와 함께 이곳 극장의 궁정 악장으로 활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 바그너는 궁정 악단을 지휘하여 1843년 1월 2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1845년 10월 19일 <탄호이저>를 직접 초연했다.

 

그러나 바그너의 음악에서 드레스덴이라는 도시와 이곳의 궁정 악단은 세 오페라 작품의 초연 장소와 초연 단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드레스덴을 떠나게 된 1849년까지 바그너가 그의 후기 작품 대부분에 대한 착상을 이곳에서 얻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악단 특유의 음색이 드레스덴 시절 이후에 작곡된 바그너 작품에도 이상적인 관현악 색채의 기준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훗날 바그너가 “드레스덴 바이올린의 미광微光이 없었다면 <로엔그린>은 없었으며, 감동적인 목관의 칸틸레네와 금관의 낭랑한 화려함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후기 작품도 없었다”고 회고했다는 사실은 바그너의 음악 세계에서 이 악단이 지닌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지휘자 에른스트 폰 슈흐가 궁정 악장으로 재직한 1872년에서 1914년까지 는 새로운 작품의 초연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의 드레스덴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말을 빌리면 “초연의 엘도라도”였다. 슈흐는 당대의 최신 현대음악을 무대에 올리는 데 굉장한 열의를 보였다. 그중에서도 슈흐가 특히 지대한 관심을 보인 작곡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이 시기 드레스덴에서 50여 편의 음악 작품이 슈흐의 손으로 초연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네 편이 슈트라우스의 작품이었다.

 

슈트라우스의 입장에서도 드레스덴 악단은 1949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67년간 지휘자로서, 작곡가로서 인연을 이어간 매우 특별한 악단이었다. 이만큼 긴 세월 동안 특정 작곡가와 악단이 예술적, 인간적 우정을 이어간 사례는 음악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드레스덴은 거의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초연 전담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슈흐의 지휘로 초연된 <화재 비상Feuersnot>(1901), <살로메>(1905), <엘렉트라>(1909), <장미의 기사>(1911) 이외에도 슈트라우스는 <인터메초>(1924, 프리츠 부쉬 지휘), <이집트의 헬레나>(1928, 프리츠 부쉬 지휘), <아라벨라>(1933, 클레멘스 크라우스 지휘), <말 없는 여인>(1935, 칼 뵘 지휘), <다프네>(1938, 칼 뵘 지휘)까지 자신의 오페라 아홉 편의 초연을 드레스덴 악단에 위임했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총 열다섯 편 중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지 않은 작품을 손에 꼽는 것이 더 편할 정도이지만, 스스로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누렸던 슈트라우스가 드레스덴에서 자신의 손으로 초연한 오페라 작품은 공교롭게 단 한편도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랬던 그가 드레스덴에서 초연한 작품의 이름을 음악사가 아닌 영화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미의 기

사>라는 제목의 무성영화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대의 유명 영화감독 로베르트 비네가 연출한 이 영화를 위해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이 직접 음악과 대본을 다시 손보았고, 1926년 초에 젬퍼 오퍼에서 열린 영화 상영회에서의 초연은 슈트라우스가 직접 슈타츠카펠레의 지휘를맡았다.

음악의 시대를 호흡하며 스스로 역사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은 오페라와 관현악곡 장르를 통틀어 작곡자인 슈트라우스가 드레스덴 악단을 지휘하여 초연한 유일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장미의 기사> 초연 직후인 1911년 5월부터 작곡되기 시작했지만, 1차 대전의 격변 와중에 지체되다가 1915년 2월에서야 완성되었다. 총 137명의 연주자가 필요한 대곡이라 공연하는 데에 큰 비용이 소요될 것을 의식한 듯, 그는 이 작품을 어느 한 관현악단에 헌정하기로 했다. 그 대상이 드레스덴 궁정 악단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초연을 맡을 단체는 당연히 드레스덴 악단이었지만, 초연 장소는 드레스덴이 아니었다. 당시 슈트라우스는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궁정 악단의 카펠마이스터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의 초연을 위해서 드레스덴 악단을 베를린으로 데리고 왔다. 공연은 1915년 10월 28일 옛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열렸다.

 

공교롭게도 올해로 ‘알프스 교향곡’은 초연 100주년을 맞았다. 슈타츠카펠레드레스덴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 연주회를 가진다. 초연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10월 27일, 연주 장소는 베를린의 새로운 필하모니다. (엄밀히 말하면 초연 때와 같은 장소는 아니다. 옛 필하모니 건물은 1944년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이 밖에도 드레스덴 악단은 레거, 힌데미트, 오르프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의 작품을 초연했다. 많은 사람이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을 낭만주의 전통을 간직한 고풍스러운 오케스트라로만 알고 있지만, 당대의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것 역시 슈흐 시절 이래로 이 악단이 이어오고 있는 전통이다. 이 악단에서는 2007년부터 악단 전속 작곡가Capell-Compositeurs 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이 제도 역시 이러한 전통의 맥락 속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일종의 상주 작곡가 제도인 이 자리에는 카를 헨체,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볼프강 림 같은 현대음악의 거장들이 거쳐 갔다. 현재 2015/16년 시즌의 악단 전속 작곡가는 죄르지 쿠르탁이다.

뮌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의 시대를 호흡하며 스스로 역사가

피아노 제작사 집안의 아들로 황실 고문관이었던 프란츠 카임이 1893년에 창립한 이 단체는 현재는 정부 지원을 받고 있지만 애초에는 사설 단체였다. 처음에는 카임 오케스트라라 불렸고, 오늘날의 명칭은 1928년부터 사용되었다. 드레스덴 악단만큼은 아니지만 100년이 넘은 단체이니만큼 그동안 초연한 작품의 수도 제법 된다. 그러나 연주사에서 이 악단은 무엇보다도 구스타프 말러와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을 초연한 단체로 큰 발자국을 남겼다. (또한 이 단체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스무살 때 지휘자로 처음 데뷔한 무대에서 지휘한 악단이기도 하다.)

 

말러의 교향곡 중에서 뮌헨 필하모니가 초연한 곡은 교향곡 4번과 8번, <대지의 노래>, 이렇게 세 작품이다. 그중 4번과 8번은 말러 본인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대지의 노래>는 말러가 세상을 떠나고 반년 뒤인 1911년 11월 20일에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1901년 11월 25일의 4번 교향곡 초연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4악장의 독창을 위해서 말러가 빈 궁정 오페라 극장 전속 가수인 마가레테 미할렉까지 데리고 오는 수고를 했지만, 당시 신생 오케스트라였던지라 아직 수준이 그다지 높지 못했던 카임 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을 소프라노 가수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거대한 편성의 2번 교향곡을 들은 기억이 각인된 뮌헨 청중은 상대적으로 소박한 4번 교향곡의 음악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 곡이 지닌 기이하고 역설적인 풍자와 유머를 이해하지 못했다.

 

1910년 9월 12일에 뮌헨 박람회장 안에 지어진 거대한 연주회장에서 열린 교향곡 8번의 초연 공연은 말러가 자신의 창작곡을 지휘한 마지막 공연이었다. 총 리허설 당시 말러는 구협염을 심하게 앓고 난 뒤라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오케스트라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공연이 성공할지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고 음악에 몰입하게 되자 말러는 잠시 기력을 되찾았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도 집중력있게 말러의 지휘를 따랐다. 공연은 청중과 연주자들 모두가 열광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첼리비다케 시절, 뮌헨 필은 브루크너 교향곡 연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브루크너 연주사에서 이 단체는 결코 그 시절 성과에 못지않은 중요한 공로를 남겨놓았다. 그것은 브루크너 교향곡 오리지널 판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20세기 전반까지도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브루크너의 제자들이 훼손했거나 제자들의 의견을 못 이겨 브루크너가 직접 삭제하고 가필한 판본으로만 연주되고 있었다. 청중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원전판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작곡가 겸 지휘자 지그문트 폰 하우제거였다. 1920년부터 1938년까지 뮌헨 필의 상임지휘자를 지낸그는 1932년 4월,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의 원전판을 초연했으며(이것은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통틀어 원전판이 연주된 첫 공연이었다), 3년 뒤인 1935년 10월에는 교향곡 5번의 원전판을 초연했다.

 

글 이정하 (음악평론가) 사진 빈체로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5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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