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와 조성진, 두 아티스트가 남긴 족적

[컬처]by 예술의전당
정경화와 조성진, 두 아티스트가 남긴

ⓒ Sim Juho

정경화와 조성진, 두 아티스트가 남긴

ⓒ Harald Hoffmann DG

사실 이 글을 쓰기로 해놓고 바로 후회를 했다. ‘정경화와 조성진의 만남’에 관한 주제를 듣는 순간 치밀어 오른 호기심과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 때문에 원고 의뢰를 덥석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내 ‘내가 과연 이런 주제를 다룰 자격이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정경화에 관한한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더 좋아하고 더 많이 들어본 필자가 수두룩할텐데. 무엇보다 그보다 한 세대 아래인 나로서는 동시대를 호흡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과 연륜, 애정을 따라잡을 재간이 없다. 물론 조성진에 관해서도 더욱 깊은 애정과 열렬한 지지를 토로할 필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다면, 혹은 써야 한다면, 주관과 객관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취하면서 보다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보기에는 조금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착각하는 탓이니 부디 양해해주기 바란다.

현재진행형인 정경화의 전설

정경화와 조성진, 두 아티스트가 남긴

ⓒ 2017 Steve J. Sherman.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전곡 연주회'(뉴욕 카네기홀, 2017.5.18)

칼럼니스트 또는 ‘평론가’로 불리는 인간답게 시건방진 구석이 있는 나에게 정경화는 현존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호불호를 떠나 ‘존경’이라는 단어를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잠시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창 클래식 음악의 기본 레퍼토리를 섭렵해나가던 학창 시절에 한 음악잡지에 실린 ‘레벤트리트국제콩쿠르’ 당시의 무용담을 접하고서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용돈을 모아 카세트테이프로 구입한 그의 데뷔 음반을 듣고서 그의 연주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 음반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시벨리우스 협주곡은 한동안 나의 감상 시간을 지배했는데, 그 후로 동곡의 다른 음반을 수십 가지 더 들어봤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는 연주자는 만나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그 음반을 다시 꺼내서 들어보았다. 다만 예전의 다 늘어진 카세트테이프 대신, ‘데카 오리지널스’ 시리즈로 발매됐을 때 구입해 내 방의 음반장에 고이 꽂아둔 콤팩트디스크로! 역시 정경화의 연주는 첫 음부터 다르다. 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다고 할까? 첫 소절부터 듣는 이를 자신이 구상한 음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예리하고 치열한 연주는 여전히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탄탄한 테크닉과 치밀한 설계도 돋보이지만 한층 놀라운 것은 그만의 비범한 직관과 본능적 감각에서 우러난, 섬세하고 절제되었으면서도 드라마틱한 표현들이다.

 

이 음반은 2010년에 발매된 그의 ‘데카 레코딩 전집’ 박스 세트에도 들어 있다. 당시 유행하던 LP 판형으로 제작된 이 라이선스 박스물에는 그가 흔히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영국의 데카(Decca) 레이블에 남긴 모든 음반과 영상물에 더하여 두툼한 해설서가 첨부되어 있는데, 이 해설서에 실린 기고문들을 보면 당대 사람들에게 정경화가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하게 된다.

 

먼저 국내 필자들의 글을 읽어본다. 그가 1967년 레벤트리트콩쿠르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으로) 우승한 다음 1970년 런던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일을 계기로 데카 레이블과 전속계약을 맺고, 연간 100여 회의 공연을 소화하면서 일련의 음반들을 녹음해나가던 그 시기에 우리나라의 상황과 국제적 위상은 지금과 판이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의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개발도상국이었고, 해외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전무해서 외국인들은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국제무대를 누비면서 ‘동양의 마녀’, ‘암호랑이’로 불리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받았던 정경화는 한마디로 기적적인 존재였다. 골프의 박세리나 피겨스케이트의 김연아가 등장하기 한참 전에 우리 국민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벅찬 희망, 뭉클한 감동과 자부심을 안겨준 영웅과 같았다.

 

일본 필자들의 글은 더욱 흥미롭다. 데뷔 음반 발매 직후인 1971년에 첫 방일訪日 공연을 가진 이래 꾸준히 일본을 찾았던 그에 대해, 전후 일본 바이올린계에 미친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요제프 시게티와 더불어 ‘베스트 2’라는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전설적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대명사인 지네트느뵈, 이다 헨델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능가하는 존재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과거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했던 일본인들이 그로 인한 우월감을 접어둘 정도로 그가 특별한 존재였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객관과 열정이 공존하는 그 평가를 대하면서 이른바 ‘국뽕’과는 무관하게 그의 순수한 음악적 역량을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전설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1990년대 들어 EMI로 음반사를 옮기고 한결 성숙해진 음악세계를 펼쳐나가던 그는 2005년, 불의의 손가락 부상을 당하면서 공개적인 연주 활동을 접게 된다. 당시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예정되었던 세종문화회관에서 직접 무대로 나와 연주 취소를 알리며 양해를 구하던 그의 안타까운 모습이 떠오른다. 이후 그는 짧지 않은 휴식기를 감내해야 했지만 다행히 2010년 5월, 예술의전당에서 아쉬케나지가 지휘한 필하모니아오케스트라와의 브람스 협연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친동생인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협연하며 진정한 부활을 선언했다. 당시 관객들의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정경화의 연주가 테크닉적으로는 다소 퇴색했을지언정 그 이상의 풍부함과 깊이로 빛나는 이유는 천부적인 연주자에게서만 가능한 연륜에 더하여 시련을 극복해낸 의지와 사유의 힘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이처럼 그는 전설이자 자랑이요, 귀감으로서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아티스트다.

‘젊은 거장’ 조성진의 기대되는 성장

정경화와 조성진, 두 아티스트가 남긴

'2015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 서울시립교향악단'(2015.4.10)

클래식 음악계로 포커스를 좁히면, 정경화는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스타 아티스트’를 배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정경화의 성공 이후 수많은 음악가들이 해외로 유학을 떠나고 국제무대를 노크했지만, 상당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궁극적 목표(?)에 도달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대다수는 인종차별이나 경험 부족, 정치적·재정적 지원 시스템의 미비 등의 장벽에 가로막혀 좌절했고, 그중 상당수는 유턴을, 일부는 적당한 타협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래도 근래 들어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우리의 젊은 연주자들이 상위 입상하거나 우승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 바로 조성진이다.

 

정경화가 척박한 토양을 딛고 기적적으로 피어난 꽃이었다면, 조성진은 충분히 성숙해진 토양이 마침내 피워낸 가장 탐스러운 꽃이라고 해야겠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각종 콩쿠르를 석권했던 조성진은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국내에서만 배웠기 때문에 종종 ‘국내 음악교육 시스템의 승리’라는 측면이 부각된다. 다만 그의 성장 과정에는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에 더하여 옛 거장들이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남긴 음반들도 작용했고, 유명한 ‘2015년 쇼팽국제콩쿠르 우승’은 파리 유학 이후의 일이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사실 조성진의 행보는 쇼팽콩쿠르 이후가 더 주목할 만하다. 최고의 클래식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의 인터내셔널 아티스트로 전속계약을 맺었고, 발매한 음반들은 꾸준히 호평을 받고 있다. 아울러 연주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뉴욕의 카네기홀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공연장들을 차례로 섭렵하며 국제적인 메이저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다. 특히 작년에는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했고, 지난여름에는 ‘베르비에페스티벌’에 데뷔하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처신으로도 유명한 그의 비상이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진다면 장차 정경화에 견줄 만한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회를 다니다 보면 간혹 특정 공연에서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돌이켜보면 9년 전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조성진의 협연도 그런 사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번 정경화와 조성진의 듀오 콘서트 또한 그렇게 기억될 것임에 분명하다.

 

글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8년 9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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