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지나 빛의 세상으로

[컬처]by 예술의전당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이수인 상임연출은 풍경을 소리로 옮겨낸다.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기인 그는 고전 「심청전」을 효가 아닌 죽음의 관점으로 톺아본 극작가 이강백의 희곡 「심청」을 떼아뜨르 봄날의 장기인 코러스, 악기 연주, 구음 등으로 무게감을 덜어내며 호평받았다. ‘은유의 작가’로 불리는 이강백 작가와 예술의전당이 1998년 ‘이강백연극제’ 이후 20년 만에 만나 주목받는 신작 <어둠상자> 역시, 말 그대로 어둠상자에 들어온 듯 캄캄함이 우선 엄습하지만, 이수인 연출의 손길로 메시지의 무게감과 보는 재미가 균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어둠을 지나 빛의 세상으로

© 박시홍

<어둠상자>는 고종의 마지막 어진御眞을 찍은 황실 사진가 4대의 이야기다. 고종이 미국 사절단과 함께 조선에 온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에게 어진을 선물한 것으로부터 이 작가의 상상력이 출발했다. 앨리스는 사진 속 고종의 모습을 본 뒤 “황제다운 존재감은 없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라고 혹평한다. 추석을 지낸 직후 가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9월 말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 연출은 <어둠상자>에 대해 “우리 근현대사가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어둠상자’를 지나서 빛이 보이는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은 듯하다”고 봤다.

 

“어둠상자 자체가 은유이자 상징이죠. 지금까지 한국의 근현대사가 ‘어두운 상자’ 안에 갇혀 있는데 그것을 뚫고 지나가자는 거예요. 현대사의 변천, 문명사의 변천, 정치사회의 변천, 사진의 역사를 읽어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입니다.” 이 작가와 이 연출이 작품을 통해 만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연극 <심청>에서 이 연출의 무대 문법이 마음에 들었던 이 작가는 극단 떼아뜨르 봄날이 작업했던 것처럼 대본에 노래 부분을 직접 지정하기도 했다.

“억지로 살기보다는 살아지는 대로”

두 사람의 인연은 약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학교 지리학과에 다니면서 연극을 시작한 이 연출은 90년대 말 스스로를 쇄신하자는 차원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에 입학했는데 당시 이 작가는 그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강의를 통해 인연을 맺지는 않았다. 이 작가가 기억하는 이 연출의 모습은 “매일 연극원 중정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때도 이 연출이 마음에 들었던 이 작가는 그에게 무언극 연출,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작업 등을 부탁했다.

 

하지만 작품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고 2016년 연극 <심청> 초연을 통해서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연극계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는 이 연출은 대학교 1학년 때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 부산 출신으로 외로운 타지 생활을 하던 그에게 밥과 술을 사 주며 따듯하게 대해주는 선배들이 있는 연극 동아리는 감동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연극을 시작한 이 연출은 1988년 극단 한강에 입단했는데, 1989년 첫 연출작 <노동자를 싣고 가는 아홉 대의 버스>가 말 그대로 대박이 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판에서 팔을 걷어붙였다. 이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과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 <한겨울 밤의 꿈>을 배우 정진영, 김의성과 함께 공연했다.

 

1995년 김상열, 위성신 등과 함께 극단 오늘을 창단하며 활발하게 대학로 생활을 이어가던 중 2002년부터 약 3년간 충무로에 몸 담기도 했다. 당시 영화 제작사 마술피리 오기민 대표의 권유로 직접 시나리오까지 쓴 <고독이 몸부림칠 때>를 통해 2004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이다. 중장년의 고독을 유머와 페이소스(pathos)로녹여내어 관객의 자연스러운 웃음을 유발한 작품이었다. 이 연출다운 영화였다. 이후 두 번째 영화가 엎어지는 과정에서 영화판에서 정을 떼버린 그는 2006년 극단 떼아뜨르 봄날을 창단하며 대학로로 컴백했다. 이 연출은 “억지로 살기보다는 살아지는 대로 살아요”라며 웃었다. 이런 낙관은 떼아뜨르 봄날이라는 이름에도 묻어났다. 스페인어로 ‘극장’이라는 뜻의 떼아뜨로teatro에 이 연출이 좋아하는 ‘봄날’을 붙인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을 나던 20대 후반, 지하철에서 공황장애 증상을 겪은 이후 그에게는 ‘윈터 포비아’가 생겼다. “이후 매번 겨울이 올때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어요. 봄이 좋잖아요? 따뜻하고. 그 변덕스러움도 좋아요. 그리움, 슬픔이 동시에 묻어나는 ‘설레는 변덕’이라고 할까요? 하하.” 그런 설레는 변덕은 이번 연출작인 <어둠상자>에도 묻어날 것으로 보인다. 어둡던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희망 있게 그려나가는 데 ‘떼아뜨르 봄날’ 상임연출만큼 어울리는 자리가 있을까. 극의 시각적인 부분을 연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어둠상자> 속 공간은 천변만화千變萬化다. 그는 “여백이 많은 무대가 될 수밖에 없어요”라면서 “‘시각적인 리듬’을 만들어서 작품의 맥락과 전환에 연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기공연처럼 주로 봄에 덧없는 사랑 이야기, 가을에 정치 이야기를 하는 이 연출은 “내년 봄에는 징글징글한 사랑 이야기를 할 것”이라며 웃었다.

글 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8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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