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된 연극; 쓸모없는 예술의 혁명적인 힘

[컬처]by 예술의전당
책이 된 연극; 쓸모없는 예술의 혁명

예술을 추방하는 이유

예술계열 학과의 퇴출 소식이 줄을 잇는다. 경제적 유능함을 증명하고 싶은 대학이 돈에 무능한 예술과 인문학을 구조조정의 영순위로 삼는 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살아남겠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살아남아서 무얼 할 건지 묻고 싶지만 이것 역시 무의미하다. 학문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이 경제적 생존이 되는 순간 대학의 본연을 묻는 모든 담론은 이미 ‘인문’에 집착하는 낡은 시각일 테니 말이다. 무능하다고 찍힌 사람은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성과주의가 합법의 이름을 얻는 이때, 취직 안 하고 예술 하겠다고 설치는 철없는 젊은이들에게 유능해지기 위한 진로 선택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대학이 해야 할 인도주의적인 조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오직 생존이 목표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경쟁사회는, 좀더 복잡해졌을 뿐, 돌도끼 들고 짐승 쫓아다녔던 구석기 시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대학으로 상징되는 주류사회에서 예술을 퇴출하려는 것이 단지 경제적 무능 때문일까. 사실 예술과 예술가를 사회에서 추방하자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플라톤 같은 현자도 폴리스의 합리적 통치를 위해서는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더랬다. 현실이란 이데아라는 진짜 세계가 반영된 그림자에 불과한데, 예술은 그 그림자를 모방해서 또 다른 가짜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예술이란 근본적으로 진리와는 거리가 먼 행위인 것이다. 예술의 이런 한계를 인식한다면, 예술가는 이성의 조화와 훈련을 통해 삶의 이데아를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행위의 가치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시인들을 움직이는 힘은 이성이 아닌 격정이다. 감정의 힘은 세서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때로는 연민으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흔들어버리니, 플라톤이 보기에 감정의 격동을 끌어내는 시인들은 위험한 선동분자에 불과했다. 폴리스의 새로운 비전, 이성의 발휘에 무능한 자는 추방되어 마땅하다.

 

묵자는 플라톤보다 더 과격하다. 플라톤은 예술가를 추방하자고 말하지만 묵자는 예술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묵자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로움도 주지 못하는 예술 따위는 필요 없다고 일갈한다. 아름다움이란 먹지 못하는 자에겐 음식이요 입지 못하는 자에겐 옷이요 쉬지 못하는 자에겐 휴식이건만, 오직 가진 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아름다움은 예술이라는 이름의 허위이자 기만에 불과하다. 함께 일하며 부르는 소박한 노래 한 자락이 웅장한 무대 위의 화려한 공연보다 훨씬 생산적이고도 아름답지 않던가. 이런 노동요는 굳이 예술의 이름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묵자가 보기에 제도권 안에서의 예술은 이미 예술의 본뜻을 잃어버렸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버려지는 것처럼 제 역할을 잃은 예술은 버려져 마땅하다.

 

한비자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간다. 묵자의 주장이 예술무용론이라면 한비자의 비판은 예술해악론에 가깝다.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지 못하는 행위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던 한비자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술은 모든 사회적 기준을 흐트러뜨리고(亂法)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窮身) 유해한 행위임이 틀림없다. 귀신을 섬기는 사람이 상식을 무시하는 것처럼 예술에 마음을 뺏긴 사람은 공리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예술을 통해 좋은(善)인간이 될 수 있다는 유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간이 선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지속적인 교육과 예술의 감화를 통해서 인간이 선한 존재로 변화한다는 유가의 생각은 근거 없는 기대감일 뿐이다. 물론 간혹 선한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것은 보기 드문 우연이지 인간 조건의 상수가 아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한비자의 시각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사람에게 막연한 선을 기대하느니 명확한 법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인 까닭이 이것이다. 사람은 변하지만 법은 변하지 않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선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사람들로 하여금 객관적 질서보다 주관적 판단에 기대게 하는 예술은 퇴출해야 마땅하다.

추방은 혁명의 시작이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현인들이 예술을 경계했던 공통 지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회의 틀거지와 예술의 쓰임새가 어긋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 어긋난 예술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이다. 현인들이 보기에 잘못된 영향력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을 터. 예술에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판단의 선입관을 지워버리는 놀라운 권능이 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은 혼돈과 파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과 예술가는, 그 사회가 어떤 질서로 이루어졌든 간에, 위험의 진원지로 여겨졌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위험한 것임을 현인들은 통찰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예술을 퇴출하려는 작금의 움직임은 갑작스레 찾아온 야만이 아니다. 예술은 원래 추방되는 것이니까. 어느 연극 제목대로다. 너무 놀라지 마라.

 

물론 지금 여기에서 예술을 추방하는 명목은 위험함이 아니라 무능함이다. 경제적으로 이익을 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키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력한 예술을 지속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유능해져야 하고 유력해져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예술은 더 수치스러워졌다. 하지만 부끄러운 추방의 자리에서 통찰은 자라난다. 무능한 예술이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위험한 예술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렸는가? 이제 우리가 각성해야 할 예술의 위험함은 무엇인지 생각할 때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통찰은 그 생각을 이끄는 데 탁월한 길잡이가 된다. 예술의 위험함은 무력함을 지속하는 데 있다! 그러니 무력함에 최선을 다하라. 사사키 아타루는 그것을 혁명의 힘이라고 말한다. 자타가 인정할 만큼 무력한 문학과 예술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송태욱 옮김)

 

물론 이런 혁명은 당장 보기에 아무 변화도 끌어내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무모함에 자신을 거는 것, 이것이 문학이요 예술의 근원적인 힘이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글을 쓰는 작가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춤을 추는 춤꾼처럼,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 부름이란, 사사키 아타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읽어버린 자’의 숙명과도 같다. 예술가는 자기 눈으로 읽은 세상을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쓰는 사람이다. 읽어버린 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읽은 그대로 살거나 아니면 읽지 않은 것처럼 살거나. 읽는다는 것은 자기 밖의 다른 세계를 대면하는 것이기에, 다른 생각과 자기를 마주 비벼 생채기를 내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처를 통해 문학과 예술은 언제나 삶을 건드린다. 그리고 삶이 건드려진 사람이 다시 쓰는 텍스트만이, 그것이 책이든 공연이든 간에 완고한 세계에 미세한 틈을 벌리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이 틈이 점점 커질 때 새로움은 세계를 집어삼켜버린다. 지금까지의 문학과 예술의 역사가 그랬다.

읽고 쓰고 노래하고 춤춰라

무의미해 보이는 ‘읽고 쓰기’의 끝은 정말이지 놀랍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라틴어로 쓰인 루터의 95개 반박문을 읽을 수 있었던 독일 사람은 단 1퍼센트에 불과했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을 썼을 때 러시아의 문맹률은 95퍼센트였다고 한다. 그리스의 수많은 저작 중에 남은 것은 천 권에 한 권꼴이라니 비율로 따지자면 0.1퍼센트가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1퍼센트의 힘이 중세의 세계관을 끝장냈고, 5퍼센트의 독자에 의해 러시아 문학은 절정을 맞이했다. 또 0.1퍼센트의 책으로부터 유럽과 이슬람의 정신정신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젊은 철학자는 예술이 지닌 혁명의 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이다,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252쪽) 지금 여기에 살아남은 예술이 있는 한 예술은 여전히 승리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이 놀라운 선언에 귀가 활짝 열린다.

 

이러한 승리의 앞자리에 있는 작가를 꼽자면 셰익스피어가 으뜸일 거다. 그의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늙지도 않는다. 그 힘의 원천은 단순하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30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는 비극을 썼다. 그가 살던 시기는 몇십 년에 걸쳐 물가가 다섯 배나 치솟을 정도로 경제가 불안정한 때였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졌다. 연극 따위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을 만큼 착취당하고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래도 그는 희극을 썼다. 왕권의 위용이 높아지는 봉건주의 시대에 그는 왕조의 역사에 흐르는 악과 어리석음과 상처뿐인 승리에 주목했다. 그때 그는 역사극을 썼다. 자기가 본 세상과 자기가 들은 과거와 자기 앞의 사람들은 그가 읽어야 할 책이요 써야 할 글이었다. 셰익스피어는 당대의 흥행작가나 후대의 고전작가가 아닌, 끊임없이 읽고 쓴 사람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유능함과 어리석음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겠나, 예술가이고 싶은 당신은.

 

올해 셰익스피어 공연이 많다. 비극, 희극, 사극 등 레퍼토리도 다양할뿐더러, 그의 작품을 새롭게 쓰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그가 그랬듯이, 셰익스피어 읽기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럼 된 거다.


글 정수연 (연극학 연구자)

NT Live <햄릿>, <코리올라누스>

2.24(수) - 3.3(목)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3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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