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에서 연민으로; 감정의 복원을 위하여

[컬처]by 예술의전당

비극의 가치 <세일즈맨의 죽음>

공포에서 연민으로; 감정의 복원을 위

예술이 발견한 공포

예술의 재료는 각자의 감정이요, 목표는 서로의 공감이다. 공감, 참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각자의 감정이 서로의 공감으로 이어지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이 흔들려(感) 너의 마음을 향해 움직이는(動) ‘감동’이 있지 않고서는 공감이란 텅 빈 기표에 그치기 십상이니 말이다. 예술은 자기감정을 발견함으로 시작되고 다른 이들의 감정을 마주함으로 완성된다. 감동이란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교감의 에너지일 터. 예술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도 모르면서 공감과 소통을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통하자고 마주 앉아선 자기 말만 늘어놓는 사람이 힘든 것처럼, 자기감정에만 겨운 예술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예술의 감동은 나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에서만 만들어지는 에너지다. 예술이 감정의 텍스트가 되려면 감정의 사회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을 담아낼 때 예술은 사회적일 것이고, 오래된 작품에 남아 있는 인물들의 감정을 탐색할 때 예술은 보편적일 것이다. 예술과 예술가에게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예술이 처음 발견한 보편적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흥미롭게도 그것은, 사랑도 기쁨도 아닌, 공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이야기 예술인 비극의 핵심 요소를 공포라고 설명했다. 「시학」에 따르면, 공포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살면서 기쁨과 행복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삶은 갑작스러운 불행으로 휘청거리기 마련이다. 불행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 없도록 예측 불가능하고 속수무책인 일을, 갑자기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그 불행을 겪는 이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내 옆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럼 나는? 나 또한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자각, 그 불행이 나를 피해가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확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감정을 공포라고 말했다. 자연재해가 됐든 전쟁이 됐든 오래전 사람들에게도 삶이란 따뜻한 행복을 누리는 시간이기보다는 끝없는 불안을 견디는 인내에 가까웠던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살이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삶의 공포를 대하는 고대 비극의 해법은 명쾌하다.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공포를 돌파하라. 삶의 불확실성을 가리키는 이름이 운명이라면, 인간이란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하더라도 운명에 맞설 줄 아는 용기 있는 존재임을 일깨웠던 거다. 신탁에 저항한 오이디푸스나 신에 반항한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부당한 운명을 그냥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격정이 있었다. 그 격정은 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니, 권력에 맞서는 안티고네의 투쟁과 점령군을 저주하는 헤카베의 분노는, 죽는 한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의 선언이기도 했다. 비극은 막연하게 불안을 견디느니 그 불안의 실체를 파헤치겠다는 결기의 기록인 것이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망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쓰러진 바로 그곳에서 싹텄다. 고대 비극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삶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인간은 그 공포를 넘어서 또 다른 삶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 존재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지금 여기의 공포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용기와 결기만으로 불안을 이기고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공포는 과거의 공포와는 그 내용부터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곳의 삶도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이 겪었던 것에 뒤지지 않을 만큼 불안하고 불확실하다. 다리가 끊어지고 배가 가라앉고 길이 꺼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식이다. 어처구니없는 재난이 나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실감하면서 불안은 일상의 감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안과 공포가 있다. 공포란 생명을 위협당할 때 느끼는 본능적인 감정임을 기억해볼 때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공포는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이요, 생존의 불확실성이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신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실직일 터. 실직의 공포 앞에서 용기와 결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없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괜한 호기를 부리기보다는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 있는 게 상책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비비안 포레스터의 책 제목처럼, 우리 시대가 직면한 공포는 ‘경제적 공포’다. 저자의 진단은 명쾌하다. 이 사회는 더 이상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산이 포화에 이르러 더는 성장을 통한 이윤 창출이 불가능한 지금, 돈을 벌지 못할 바엔 있는 돈이라도 지키자는 관리의 경제는 자본의 새로운 논리가 되어버렸다. 돈을 지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비용이 많이 드는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다. 단연 사람의 비용일 터. 기업이 노동력을 대체할 기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제 경제를 지배하는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거나 사회에서 불필요한 사람으로 버려지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이미 현실화되었다. 저자의 통찰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사람들은 지금껏 착취당해왔지만 이제는 착취당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노동이 사라진 사회에 사람이 필요할 리 없다. 살아갈 권리는 이렇게 빼앗긴다.

 

생존 경쟁에서 뒤처졌을 때 마음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불안해진다. 혹시 내가 무능했기 때문에 낙오한 것은 아닐까. 선택된 소수가 되기에 내가 너무 부족했던 건 아닐까. 문제는 시스템에 있건만 원인을 스스로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일종의 수치심일 거다. 이러한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대개 두 가지이다. 자기계발과 자기착취. 유능해지기 위해 끝없이 ‘스펙’을 만들고 유능을 증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관리는 결국 시장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안간힘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감정이 될 때의 수치심은 자칫 또 다른 사람을 향한 차별적 감정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차별적 감정의 결과는 모멸이다.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파악할 때 다른 이를 향한 모욕과 멸시는 당연하고 정당한 계층의 행동양식이 되어버린다. 감정이 한순간에 자기와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생존의 불안과 경쟁의 논리 앞에서 감정은 왜곡되거나 소진되고 만다. 감정이 사라져버린 사람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시대가 직면한 진짜 공포인지도 모른다.

연민의 회복

공포를 돌파하기 위한 용기는 고대 비극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필요하다. 비극 시대의 사람들이 운명에 빼앗긴 삶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다면, 지금 우리는 시장에 빼앗긴 인간다움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되는 세 가지 요소로 인간, 자연, 화폐를 꼽았다. 인간은 경제적 가치로만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화폐는 투기의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의 감정은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장의 자유라는 명분 아래 이 모든 것이 상품이 되면서 인간은 값싼 노동력으로 전치되었고 감정은 극장의 감동이 아니라 시장의 서비스로 용도변경 되었다. 시장의 경쟁에서 매력적인 상품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얼굴과 마음과 존엄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경쟁의 막다른 골목에서 비명 같은 질문이 생긴다. 이 경쟁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이것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지, 수직의 경쟁이 아니라 수평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인지. 이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던졌어야 할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장도 화폐도 시작은 인간다움의 가치에 있었다. 원래 시장이란 서로에게 의존하며 각자의 필요를 나누는 만남과 교류의 장이었고, 화폐 또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절대적 수단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랑과 신뢰는 살 수 없으니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마르크스였던가. 공존의 비전은 애초부터 탑재되어 있었던 셈이다. 어떻게 이 비전을 되찾고 어떻게 공존을 실현할 것인지 고민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비극에는 그 방법의 하나가 이미 제시되어 있다. 공포와 더불어 비극을 완성하는 감정, 바로 연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이란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했다. 다른 이의 고통이라 해도 그 고통의 부당함에 가슴을 부여잡는 마음이 바로 연민이라는 것이다. 연민은 곧 비탄한 공감이다. 그렇다면 연민을 품을 수 있는 이는 삶의 공포를 먼저 겪은 사람일 것이다. 생존의 불안이 부당한 고통임을 서로의 삶에서 발견할 때 공감의 온도는 뜨겁다. 중요한 것은 뜨거움이다. 그 뜨거움에 경쟁의 냉정함을 이길 힘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이윤을 위한 거래도 아니요, 모멸을 주는 동정도 아닌, 공존을 꿈꾸는 사람의 호혜가 여기에서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연약한 연민이 이 시대의 공포를 이기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연민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용기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에는 상품을 파느라 폐품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상품도 되지 못한 아들이 있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그들의 삶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비극이 우리로 하여금 연민하게 한다. 살아남고자 애쓰는 아버지를, 좌절된 꿈에 주저앉은 아들을, 허풍으로 가득한 청년을, 불안 속에서도 그들을 돌보는 엄마를. 그 연민은 지금 이곳의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공포를 이겨낼 힘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SAC CUBE 2016

4.14(목) - 5.8(일) CJ 토월극장

 

글 정수연 (연극학 연구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4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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