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모나리자 뉴욕의 뮤지엄마일에서 미소 짓다

[컬처]by 예술의전당
클림트의 모나리자 뉴욕의 뮤지엄마일에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 The Yorck Project 10.000 Meisterwerke der Malerei. DVD-ROM, 2002. ISBN 3936122202. Distributed by DIRECTMEDIA Publishing GmbH.

1933년 나치 집권이 이루어지자마자 히틀러 치하 독일은 20세기 전반의 가장 중요한 미술품들을 포함해 유대인들이 소유하던 상당량의 예술품을 조직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낳은 역사적 아픔인 나치 약탈 미술품Nazi art plunder이라는 주제는 이 후 예술법의 주요 부분으로 다루어지면서, 다양한 매체와 저작물에 의해 조명되었다. 그중에서도 구스타프 클림트가 남긴 국보급 작품의 반환을 둘러싼 마리아 알트만 여사의 대륙을 넘나든 법적 투쟁사는 가장 극적인 사례의 하나로, 단행본과 여러 다큐멘터리에 이어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라는 상업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980대에 시작한 8년의 법정 투쟁이었지만 알트만 여사에게는 인생의 과제를 풀어낸 결실이었다.

인류의 아킬레스건, 나치의 미술품 약탈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Portrait of Adele BlochBauerI>은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가 아델레를 모델로 그린 두 점의 초상화 중 첫 번째 작품으로, 클림트의 ‘황금시대golden phase’를 대변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된다. 초상화의 주인공 은 알트만 여사의 숙모로, 성공한 사업가이자 예술후원자였던 그녀의 숙부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가 클림트에게 의뢰한 것이다. 1925년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아델레는 남편이 사망할 경우 초상화를 포함한 클림트의 작품들을 오스트리아 국립 미술관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페르디난트가 스위스로 몸을 피하자 그의 소장품은 다른 재산과 함께 나치에 몰수되었고, 1945년 11월 사망한 페르디난트는 그림들을 조카들에게 유언으로 증여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는 아 델레의 유언에 법적 효력이 있음을 들어 ‘클림트 컬렉션’의 점유를 유지했으며, 이들은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으로 보내져 이후 오스트리아 국민이 사랑하는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자리매김했다.


1998년 오스트리아의 기자 후베르투스 체르닌에 의해 이루어진 일련의 폭로는 상황의 반전을 가져왔다. 그것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몰수된 미술품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특정 약탈 미술품들을 돌려주는 조건의 비도덕적 뒷거래를 해왔다는 것이다. 나 치 과거사에 대한 여론의 재조사 압박에 못 이겨 오스트리아 정부는 1998년 나치 약탈 미술품들의 환수 과정에 있어 투명성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문화부는 최초로 그의 기록보관소를 공개했다.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대한 기록을 조사한 체르닌은, 아델레는 구매자가 아니었기에 그림의 처분 권한이 없었으며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는 클림트의 그림을 미술관에 기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클림트 컬렉션’이 블로흐-바우허 가의 소유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후 알트만은 지인의 손자 랜돌 쇤베르크 변호사와 함께 험난한 반환 투쟁에 들어간다.


그들은 문화부에 의해 구성된 위원회에 반환을 신청했다. 그 결과 1999년 클림트의 드로잉과 자기제품 등이 반환되었으나 회화는 제외되었다. 알트만은 컬렉션 반환을 위해 초상화가 오스트리아 소유로 남아도 좋다고까지 제안했지만 협상은 타결되지 못했고, 그녀는 오스트리아 법원을 통해 오스트리아 정부에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 소를 제기하려면 소송으로 회복하려는 금액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내야 했고, 그림의 반환 소송을 위해 요청되는 1,500만 달러의 수수료는 알트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것이었다. 결국 알트만은 미국 법정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고, 그림이 반환되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외국주권면제법을 활용하기로 한다.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란 국가와 그 재산은 외국의 재판 관할권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국가는 외국 재판소에 원고로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피고는 될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주권면제원칙은 거의 절대적이었는데, 정부가 기존 역할을 확장하여 전통적으로 민간 부문이 주도하던 역할, 예컨대 국립 박물관을 통한 관광 진흥이나 국립 박물관을 위한 미술품 구매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정부와 민간 부문 간 거래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민간 기업처럼 행동하는 외국 정부가 그 사업 수행지에서 피소될 수 없음은 부당하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에 미국은 1976년 외국주권면제법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 FSIA 제정으로 주권면제원칙에 대한 제한을 최초로 입법화했다.

외국주권면제법에 도움을 요청하다

클림트의 모나리자 뉴욕의 뮤지엄마일에

마리아 알트만 여사

FSIA에 따르면 국제법 위반으로 획득한 재산이 있거나 예외사유 중 하나에 해당하지 않는 한,  미국 법정의 관할권은 외국에 미치지 않으며 외국은 미국 내 소송에서 면책이 추정된다. 알트만 측은 FSIA의 ‘수용예외expropriation exception’라는 획기적 접근법을 통해 오스트리아 정부를 미합중국 캘리포니아 법정으로 끌고 들어왔는데, 그것은 외국 소재의 물권이라도 소유권자가 미국 내에서 상업적 행위에 연관되어 있다면 그 국가에 피고적격을 허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트만은 오스트리아 국립 미술관이 미국에서의 상업적 행위에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야 했는데, 미국 판례법상 ‘상업적 행위’의 정의에 따라, 법원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 등의 전시회 마케팅과 전시회에 관련된 출판물을 미국 내에서 보급하는 것은 ‘상업적 행위’의 요건을 충족한다고 판시했다.


남은 관문은 FSIA가 법안 통과 이전의 사건에도 소급적으로 적용 되느냐의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특정한 입법을 근거로 그 시행일 이전의 행위에 대해서 소급하여 처벌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1938년에 발생한 일에 대해 다른 나라 법원이 오스트리아를 처벌할 가능성은 희박하기에, 사건은 시작조차 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알트만과 쇤베르크는 흥미로운 추론을 전개했다. 즉, 오스트리아 정부가 페르디난트에게 문제의 그림을 기증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기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클림트의 그림이 나치 약탈품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추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는 소유자가 그림 반환 요청을 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나 알트만은 수차례 반환을 요청했다. 결국 2004년 연방대법원은 오스트리아가 피소를 면할 수 없으며 알트만 사건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러한 법리는 만일 작품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보관되고 있다면, 틀림없이 미술품 약탈의 희생자들이 작품을 반환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예술품 약탈 사건에서 진정한 문제는 후손이 소유자임을 보여줄 증거의 부족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거나 또는 일찍이 전쟁에서 몸을 피한 유대인들에게는 기록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알트만 사건에서 아델레의 유언장을 통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었던 것은 아델레가 나치 합병 전인 1925년에 사망했기 때문이고, 다른 많은 경우는 가족 간 구전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면제권을 상실한 후, 오스트리아는 스스로 이기지 못할 것 같은 기나긴 투쟁에 휘말리기보다는 사건을 중재로 해결하고자 했다. 이것은 알트만 측에는 높은 위험을 수반했는데, 그 이유는 분쟁 당사자들은 중재 결과로 나온 판정에 구속되어야 하고, 판정은 상급심을 통해 다툴 수 없으며, 이는 대법원에서 막 얻어낸 소 제기 권한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중재에 합의했고, 예측되는 위험을 인수한 채 오스트리아 중재판정소에 사건을 접수한 쇤 베르크 변호사는 아델레의 유언장에 담긴 내용은 법적 효력을 가진 것이 아닌 남편에 대한 부탁에 불과했다는 점을 들어 판정단을 설득했다. 2006년 1월, 판정단은 알트만 여사에게 그림 다섯 점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결국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알트만 사건이 후대에 남긴 영향

클림트의 그림들은 2006년 오스트리아를 떠나 LA 카운티 미술관에 3개월간 전시되었다가 알트만 가족의 이름으로 크리스티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그 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은 당시 단일 그림으로는 역대 최고가인 1억3,500만 달러에 억만장자 사업가이자 예술후원자인 로널드 로더가 구매했고, 누구나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게 해달라는 알트만 측 요청에 따라 2006년 7월부터 로더가 설립한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에서 전시되고 있다. 다른 작품들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두 번째 초상화와 세 점의 풍경화는 추후 경매에서 약 1억9,300만 달러로 낙찰되어 개인 소장품으로 넘겨졌다. 그림들을 판매한 대가로 ‘마리아 알트만 가족 재단’이 설립되었고, 재단은 LA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포함한 다양한 공공기관들을 지원하고 있다.

클림트의 모나리자 뉴욕의 뮤지엄마일에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 By Razr - from,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043489

알트만 사건은 법적 측면에서 주요한 영향을 낳았는데, 그것은 나치 약탈 미술품 환수 사건에서, 국가기관들은 법적 분쟁 회피 수단으로서 주권면제원칙 뒤로 숨을 수 없다는 선례를 수립한 것이다. 나아가 이 사건은 나치 약탈 사례뿐 아니라 여타의 주권면제 사건에도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실제로 알트만 사건 이후 각지에서 나치 약탈 미술품의 환수 사례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물론이며, 세계 각지의 미술관들은 새로이 발견된 컬렉션에 적합한 출처provenance가 없을 경우 미술관 소장에 더욱 신중을 기하는 경향을 보인다.


알트만 사건은 제2의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나치의 예술품 약탈 만행으로 가족의 귀중한 역사를 빼앗긴 희생자와 그 후손들이 그들의 일부로서의 소유물을 되찾기 위한 불굴의 의지와 천착을 엿볼 수 있 게 해준다. 1,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견뎌내고, 히틀러의 야욕에 약탈당하고 이름이 바뀌는 곡절을 겪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은 반세기 이상을 지나 대륙을 건너와 제 이름을 찾았다. 애초에 알트만과 쇤베르크에게 그림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외국 정부와 싸우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특히 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동의어로 여겨질 만큼이나 최고의 위상을 지닌 예술적 자산을 보유 하려고 애쓰는 국가에 맞서는 일이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정의의 손을 들어주었고, 알트만 여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과거의 상처를 씻어내고 역사를 되돌릴 수 있었다.


세기의 예술은 역사의 무게를 품은 경우가 많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이 100여 년 만에 새로이 거듭나며 화가의 예술혼이 더 많은 이들에게 재조명된 것이야말로 알트만 사건이 남긴 최고의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에서 처음 만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을 10년 만에 노이에 갤러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 필자에게 다가온 뭉클함의 무게는 알트만 사건에 내재한 역사의 힘과 영향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날은 필자의 가슴에도 예술법의 정의가 새로이 새겨진 날이었다.

 

글 강은경 (「공연예술법 마스터클래스 4막 36장」 저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6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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