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어른’과 ‘여전히 소년’ 사이에 놓인 보물섬

[컬처]by 예술의전당

7.26(화) - 8.28(일) 자유소극장

모닥불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한쪽 구석에는 엄청난 금화와 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금괴 더미가 보였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고, 또 히스파니올라 호에 탔던 사람들 가운데 열일곱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플린트의 보물이었다. 보물을 이렇게나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을까. 또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얼마나 많은 멀쩡한 배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을까. 얼마나 많은 용감한 사람들이 눈가림을 당한 채 널빤지 위를 걸어 바다에 빠졌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을 쏘아댔을까. 얼마나 많은 치욕과 거짓과 잔인무도한 짓들을 저질렀을까. 아마 살아 있는 사람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324-325쪽,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보물섬」의 주인공 짐 호킨스는 보물을 발견한 순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환희와 감격으로 탄성을 내지를 법도 하지만 호킨스는 오히려 회한에 잠긴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보물과 맞닥뜨린 순간, 소년은 어느새 어른이 된 것이다.

 

소설에 흠뻑 빠져들었던 독자들도 이 장면에서 부쩍 성숙해진 그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어쩌면 ‘찾기’에서 얻은 경험과 깨달음은 ‘보물’보다 더욱 값지고 귀한 게 아닐까. 보물섬을 향한 모험이 존재의 성장으로 마무리되는 설정은 독자들에게 뿌듯함을 안겨준다. 이처럼 「보물섬」은 ‘어쩌다’ 어른이 된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기회를 선사하는 멋진 낭만 소설이다.

‘어쩌다 어른’과 ‘여전히 소년’ 사

한 장의 보물 지도가 인도한 스타 작가의 길

스코틀랜드 태생의 작가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은 어린 아들 로이드가 그린 보물 지도에 영감을 받아 해적과 보물섬에 관한 이야기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여행과 방랑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그에게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은 지난날의 모험을 재구성하는 여정이었다.

 

가정의 일상이나 사회의 이면을 디테일하게 파고들던 19세기 후반 사실주의 소설에 답답함을 느낀 작가 스티븐슨은 해적들의 속된 말투와 거친 남자들의 세계를 그대로 이야기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는 천박하고 비루한 것에도 관심을 가졌고, 인간의 악하고 비겁한 본성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자기만의 글쓰기를 이어나간 스티븐슨의 가장 큰 지지자들은 바로 ‘독자’였다. ‘재미’에 갈급했던 독자들은 당시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소설책 구매에 열을 올렸고, 따라서 어려운 주제의식과 계몽적인 메시지 대신 상상력과 서스펜스를 탑재한 그의 소설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뮤지컬 원작으로 유명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또한 그의 작품이다.)

 

해안가의 어느 남루한 하숙집 꼬마가 어른들과 함께 보물섬을 찾아 떠나고, 우여곡절 끝에 보물을 차지해 부자가 된다는 「보물섬」의 스토리는 ‘해적’과 ‘보물’이라는 특별한 소재,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배경 등과 맞물려 당시 대중을 열광케 했다. 한편이 둘로 나뉘어 대립하고, 그 가운데 믿음과 배신이 교차하며, 정의와 탐욕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는 동안 독자들은 소설의 결말을 향해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보물섬」은 1881년, 잡지 「영 폭스Young Falks」에 ‘선박 요리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는데, 2년 뒤 출간된 단행본은 당시 영국 수상조차도 밤을 새워 읽었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책으로 스티븐슨은 일약 스타 작가로 등극하게 된다.

 

이 작품은 18세기 영국의 작은 항구에서 초라한 여인숙을 운영하는 가정의 어린 짐 호킨스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도입부에서는 ‘늙은 해적’이라는 타이틀로 여인숙에 묶고 있는 해적의 보물 지도를 호킨스가 손에 넣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중반부터는 ‘바다의 요리사’, ‘해안에서의 모험’, ‘말뚝 울타리’, ‘바다에서 내가 한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속내를 숨기고 잠입한 해적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실버 선장’에서는 최후에 남은 자들이 실제 보물을 찾는 과정과 이를 싣고 귀환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호킨스인 ‘나’의 시점에서 서술되던 이야기가 중간에 의사 리브지 박사의 시점으로 잠시 변화한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어른의 관점으로 배의 상황을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소설 속의 이러한 시점 변화는 서스펜스답게 긴박하게 흘러가는 작품의 완급을 조절해주고,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나뉜 구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가능케 한다. 더불어 배에서 사라진 호킨스를 걱정하는 의사의 심리를 통해 독자들은 앞으로 벌어질 모험에 불안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품게 되는 것이다.

 

「보물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키다리 존 실버라고 할 수 있다. 요리사로 위장하여 배에 탑승한 실버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뛰어난 선원 능력으로 짐 호킨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과 나누는 유대감이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부각한 셈이다. 그리하여 부드러움과 교활함, 사악함과 장난스러움을 동시에 지닌 이 캐릭터는 작품의 실제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티브이 시리즈로 재탄생한 일본 애니메이션 <보물섬>에서는 만화가 데자키 오사무가 존 실버를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그린 나머지 시청자들이 악역인 그를 열렬히 응원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바른’ 어른보다는 ‘멋진’ 어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어린이들이 하게 된 것이다.

‘어쩌다 어른’과 ‘여전히 소년’ 사

마음속 소년의 기억을 찾아 떠나는 모험

흥미롭게도 「보물섬」은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아동청소년 문학의 일반적인 주제의식과는 사뭇 거리를 두고 있다.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면, 실제로 보물을 찾는 과정보다도 내부 분열로 서로가 서로를 쓰러뜨리는 과정이 훨씬 길게 그려진다. 그뿐만 아니라, 주인공 일행과 대립하는 세력 간의 균형은 거의 팽팽하다. 악을 응징하는 선이 압도적인 존재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시종일관 밀리다가 겨우 승기를 잡는 식이다. 게다가 대표 악당인 키다리 존 실버는 최후에 벌을 받는 대신, 무사히 한 줌의 보물을 챙겨 슬쩍 빠져나간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이 찾은 보물은 해적이 약탈로 얻은 ‘장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발견한 사람의 몫으로 자연스레 편입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한 사람도 결국엔 욕망을 좇을 뿐이라는 메시지(?)와 악한 사람은 놓아준다는 독특한 결말이 바로 「보물섬」의 매력인 셈이다. 애초에 반反국가적인 성격의 해적을 소탕의 대상이 아니라 선망의 대상으로 묘사하는 것 또한 특이하다 하겠다.

 

요컨대 「보물섬」은 어른들의 세계를 미화하는 대신, 소년의 눈에 비친 세계의 낯섦과 충격을 생생하게 전함으로써 소설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은 선악의 세계, 정의가 아닌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어른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논평하는 호킨스의 모습에서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고민하고 판단했던 어린 시절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중요한 순간에서 평범한 주인공이 발휘하는 기지와 용기는 우리에게 낙관적인 희망을 품게 했고,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이어지는 후회와 자책감은 우리를 왠지 모를 낙담에 빠뜨렸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어린이들은 인간의 선택과 행위가 단순히 선악 구분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차원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찬찬히 깨닫게 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물섬」을 다시 접하는 성인 독자들은 어린 시절 자신의 가치관 변화를 점검해볼 수도 있겠다. 악당 키다리 실버를 여전히 응원하는지, 정직하고 유능한 의사 리브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답해 보이는 선장 스몰렛의 결단력에 동의하는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살인을 저지른 호킨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지. 이런 질문들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가 지금 ‘당연히 어른’인지, ‘여전히 소년’인지 또한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모험과 일탈을 얼마나 간절히 꿈꾸고 있는지 살펴볼 수도 있다.

 

스티븐슨은 “성인에게 픽션은 아이들의 놀이와 같다”고 말함으로써, 재미있는 이야기가 현대인의 낭만과 감성을 일깨우고 있음을 강조했다. 푸른 바다의 신비한 보물섬으로 떠나는 공상과 나약한 아군을 배신하고 강력한 악당에 넘어가는 망상, 일확천금을 노리는 상상으로써, 고단한 일상과 반복되는 노동으로부터 우리는 조금은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어른’과 ‘여전히 소년’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러분에게 ‘픽션’도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을 빌려, 「보물섬」으로의 모험을 권한다. 「보물섬」은 책으로, 만화로, 영화로, 연극으로 도처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글 정진세 (웹진 「인디언밥」 편집인, 극단 문 작가)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6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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