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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욕쟁이 할매와 날라리 할배의 ‘소나기’ 같은 사랑

by예술의전당

배우 김명곤·차유경, 정한용·이화영 인터뷰

ⓒ김희진

노년을 살아 보지 않은 이라면, 감정을 거세한 채 홀로 외로움을 견디는 홀몸 노인이나 여느 광고의 완벽하게 행복한 노부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9월 21일 개막하는 연극 <늙은 부부이야기> 속 인물들은 세간의 선입견을 차근차근 허문다. 늙음은 이들에게 걸림돌이 아니다. 스스럼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 경계를 지우고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도록 돕는 동반자다.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풋풋한 연인

박동만 役을 맡은 정한용과 이점순 役을 맡은 이화영

2인극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68세 이점순과 66세 박동만이다. 30년 전 남편과 사별한 점순. 그녀가 억척스레 세 딸을 키워 내며 는 것은 다름 아닌 욕이다. 남들에게 얕보일세라 세상과 거칠게 부닥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욕쟁이 할머니가 됐다. 역시 일찍이 부인과 사별한 동만은 한때 양복점을 운영한 멋쟁이답게 꾸밈새가 대단하지만, 두 아들의 무관심 속에 외롭게 산다. 동만이 우연히 점순의 셋방에서 살게 되면서 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같은 처지의 두 사람은 차츰 사랑에 빠진다. 애지중지 서로를 돌보는 모습은 청춘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동만은 점순을 위해 밥을 짓고, 고된 노동으로 굵어진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다. 점순은 다가올 겨울에 동만에게 입힐 스웨터를 뜨고, 따뜻한 언어로 매일 아침을 깨운다. 배우들은 점순과 동만을 연기하며 사랑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정한용은 “늙음이 오히려 사랑의 알맹이만 볼 기회를 준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늙은이 둘이 수작하는 게 뭐가 섹시하고 아름다울까 싶었어요. 그런데 그 안에 사랑의 본질이 있었습니다. 사실 배우가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경탄이 있을 뿐 감동이 없어요. 외모에 본질이 가려지니까요.”


어렴풋이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도 떠오른다. 이화영도 마찬가지다. 대본을 읽자 깨끗한 마음이 되살아났다. ‘나이 들면 아이가 된다’는 말처럼 세상 풍파를 다 겪어도 사랑을 만나면 풋풋해지고 마는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다.


동만과 점순은 애정표현에도 거침이 없다. 자녀들에게 교제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혼인신고를 해 법적 부부로도 도장을 콱 찍고 싶어 한다. 더욱 재미난 대목은 성(性)적 표현이다. 동만은 “이렇게 임자 꼭 끌어안고 자다가 죽어도 좋다”라고 고백하고, 무시로 입을 맞춘다. 두 사람이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고 있음을 연출가는 숨기지 않는다. 김명곤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성관계는 부부간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점순과 동만은 성적으로도 서로 만족하는 관계로 묘사되지요. 다만 나이가 들었을 때 성적 관계는 젊은 시절의 그것과 조금 다릅니다. 손만 따뜻하게 잡아 줘도, 어깨만 포근하게 안아 줘도 만족할 수 있는 관계로 바뀝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몸짓이 큰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노인의 연애라고 지혜롭기만 할 수는 없다. 서운한 순간도, 자그락거릴 때도 있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어디로 떠날지 알콩달콩 이야기하다 ‘동강’과 ‘충무’를 떠올린다. 전자는 점순의 사별한 남편이 잠든 곳, 후자는 동만이 죽은 아내와 처음 만난 곳이다. 연인의 과거를 마주했을 때 떠오르는 감정이 질투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늙은 연인은 토라지고 만다. 그러다 결국 ‘둘 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자’고 뜻을 모은다.


늙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노인들의 사랑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 한다. 이는 정한용도 마찬가지다.


“나도 젊었을 때는 못 해 봤는걸요. 이 작품을 하며 느끼는 게 그거예요. 다를 게 없구나. 늙든 젊든, 좋은 사람과는 손만 잡아도 행복하구나. 그 속에 다툼도 눈물도 다 있구나 생각하는 것이죠.”

현실에서 퇴색된 순수한 사랑, 그래서 ‘판타지’

박동만 役을 맡은 김명곤과 이점순 役을 맡은 차유경

“처음에는 늙은 남녀의 사랑을 연기하는 것이 자칫 느끼하고 추해 보일까 봐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연습할수록 자신감이 붙더군요. 오늘날 베풀고 배려하는 사랑은 나이를 불문하고 많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사랑이야말로 ‘받기 위해’ 하는 사랑일 수 있지요. ‘내가 이만큼 마음을 주면 당신도 그만큼은 줘야 해’ 하고요. 하지만 점순과 동만은 다릅니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곁을 내어 줍니다. <늙은 부부이야기>는 이런 사랑이 현실에서는 점차 퇴색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그런 사랑은 나이와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어요.”


김명곤은 두 사람의 애틋한 여정이 ‘판타지’ 같다고 했다. 행복한 시간도 잠시, 점순은 동만을 홀로 두고 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운전면허증을 따서 신혼여행을 가자던 소박한 꿈도 사라져 버린 후 동만은 눈 내리는 겨울을 홀로 난다.


그러나 동만은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점순의 막내딸이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편지를 보낸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게 지켜 준 데 대한 감사를 표한다. 황혼의 사랑이 남긴 선물인 셈이다.


“두 남녀는 봄에 만나 여름과 가을을 함께하고 겨울 초입에 죽음으로 갈라집니다. 정말 짤막한 사랑이죠. 점순은 평생 힘겹게 살았지만 이 짧은 몇 개월의 사랑 덕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동만은 아마도 여생 내내 점순을 그리워하며 살 겁니다. 동화이자 판타지이겠지요.”


순수한 사랑의 힘은 곧 16년째 이어지는 작품의 힘이 된다. 2003년 초연된 <늙은 부부이야기>는 그동안 이순재·사미자·양택조 등 숱한 명배우들이 출연하며 저마다의 인생을 녹여 냈다. 16년째 작품이 이어 오면서 올해는 약간의 각색도 있다. 예컨대 초연 당시 점순은 1939년생, 동만은 1941년생이다. 요즘 기준으로는 80세와 78세다. 이를 올해 프로덕션에서는 1951년생과 1953년생으로 고쳐 60대 후반의 노인이면서도 노인이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시기를 표현했다.


김명곤·정한용 배우는 실제로 극 중 인물과 또래지만, 차유경·이화영 배우는 점순보다 열 살 넘게 아래여서 인물 해석이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배우들은 ‘욕쟁이 할매’로 분하는 것이 관건. 점순은 극 중에서 “개쌍놈, 나쁜 놈, 죽일 놈, 지나가다가 돌탱이에 대가리 맞아 죽을 놈”, “망할 년, 썩을 년, 아이구 팔자도 더러븐 년”이라며 걸쭉한 욕설을 선보인다. 욕설 너머 점순의 인생이 내다보인다. 차유경이 점순을 보며 마음이 짠해지는 이유다.


“욕쟁이 할머니가 돼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한 인간의 삶이 애처로웠어요. 동만과 티격태격하다 간신히 행복하게 살게 됐는데 이별을 준비하는 점순이가 어찌 불쌍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배우로서 가슴이 미어지고, 개인적인 아픔도 생각나더군요. 하지만 ‘내가 저세상으로 가더라도 당신 곁에 먼지로라도 남겠다’는 점순의 마음이 느껴졌어요. 위안이 되더군요. 감당할 만한 슬픔이지요.”


네 명의 배우는 <늙은 부부이야기>가 중장년층들에게 선물 같은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사랑은 결국 정성과 배려입니다. 배우자가 지금 옆에 있는 분이라면 이 연극을 보고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달으실 듯합니다. 만약 사랑을 멀리 떠나보낸 분이라면 ‘그 사람이 나에게 원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실 듯하고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첫사랑보다 더 달콤한 황혼의 사랑을 말하는 연극 <늙은 부부이야기>가 기다려진다.


글 박수윤 연합뉴스 기자


예술의 전당 :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9년 9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