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가진 인간; 만드는 손과 맞잡은 손

[컬처]by 예술의전당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함께하기의 판타지 <킹키부츠>

9.2(금) - 11.13(일)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손을 가진 인간; 만드는 손과 맞잡은

1. 예술가의 손

얼마 전 신문의 문화면과 사회면을 시끌시끌하게 했던 조영남의 대작代作은 이래저래 한국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남았다. 그림 속 화투 한 짝이 이렇게 큰 회오리를 몰고 올 줄은 자기도 몰랐을 거다. 개념예술을 둘러싼 미학적 논쟁에서부터 창작 윤리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거쳐 제도의 관행을 둘러싼 법적 논쟁까지 쟁점이란 쟁점은 다 쏟아져 나왔더랬다. 훈련된 전문성과 숙달된 취미의 사이를 경계선으로 볼 것인지 교집합으로 볼 것인지도 논란거리였을 뿐더러 연예인 조영남에 대한 대중의 호불호까지 겹쳐 이야기의 온도는 적잖이 뜨거웠다. 이야기의 면면은 다양하지만 그 다양함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하나이다. 작가의 손이 사라진 예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작가의 손이 없어도 작품은 만들어진다는 개념은 예술에서 머리의 생각과 손의 일을 분리해버렸다. 그 많은 논쟁은 손과 머리가 분리된 예술을 향해 쏟아지는 질문인 셈이다.

 

예술에서 손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술을 기술이라고 보았을 때 기술의 숙련은 언제나 손의 훈련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니까. 연주자의 손놀림이나 화가의 붓질뿐 아니라 어떤 예술의 영역에서든지 손을 ‘놀릴 줄 아는 기술’은 기본요소이자 필수조건이다. 배우의 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대의 배우에게 전달력 있는 목소리만큼 중요했던 것은? 바로 손이다. 배우에게 필요한 덕목을 수사학의 범주로 설명했던 로마시대의 사상가 쿠인틸리아누스는 손이야말로 언어에 필적할 만큼의 표현이 가능한 몸의 유일한 기관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몸이라고나 할까. 그에 따르면 손은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있고 마음먹은 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기관이다. 심지어 말을 쏟아내는 순간이나 몸을 움직이는 순간에도 혼자 딴짓을 할 수 있을 만큼 독립적이기도 하다. 손을 미세하게 쓸 줄 아는 배우는 마음과 생각을 담아낼 훌륭한 도구를 이미 갖춘 셈이다. 실제로 대사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손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기술은 고대의 배우들에게 당연한 의무였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무대 위 초짜 배우들의 손을 가만히 살펴보시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색하게 굳어 있는 가련한 손이 거기 있을 거다.

 

예술에서 손은 또 하나의 언어인바, 손은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손은 곧 그 사람이다. 예술가의 작품에서 그의 손을 찾는 것이 ‘직접 작업한 것만이 진짜 작품’이라는 창작의 근본주의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품 안에 담긴 미세한 손놀림에 그 사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마주하며 사람을 발견하기. 예술이 주는 놀라운 경험이다. 자기의 솜씨로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부려놓는 일이 예술이라면, 예술가의 머리와 손은 하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술가의 손은 언제나 바쁘게 마련이다.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옛 선비들이 시를 짓기 위해 먼저 쓰기의 예(書藝)를 갖췄던 것은 시의 생각(詩想)이 글씨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을 명확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의 손밖에 없으니 일필휘지, 뛰어난 시인은 언제나 명필이었다.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수없이 먹을 갈고 붓을 다듬고 종이를 펼치는 번잡한 손의 일일 터. 시인의 손에는 언제나 검댕이 묻어 있었을 거다. 시인의 더러운 손. 예술가의 손은 일하는 손이다.

2. 일하는 사람의 손

그렇다면 질문 하나. 일하는 손은 예술과 같다는 건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평범한 사람의 일하는 손은 여러모로 예술과 닮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첫 번째 공통점일 거다. 머리로 구상하고 손으로 실행하면서 최상의 방법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창조적이다. 부엌에서 일하는 손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고 연구실에서 일하는 손은 놀라운 실험 결과를 만들어내며 청소하는 손은 깨끗함을 만들어낸다. 돈 때문에? 천만의 말씀. 이유는 단순하다. 전적으로 자기만족 때문이다. 더 맛있고 근사하게 만들기 위해 똑같은 재료를 앞에 두고 매번 고민하는 거다. 자기가 궁금하기 때문에 실험에 몰두하는 것이고 자기 눈에 먼지가 보이기 때문에 깨끗하게 치우는 거다. 일하는 손이 예술을 닮은 또 다른 점이 이것이다. 오직 자기만족을 기준이자 목적 삼아 완결을 추구하는 태도. 이것은 일하는 손에 내재한 당연한 본능이다. 자기가 만든 것이 곧 자기 자신인 만큼 돈을 버는 것이나 이름을 날리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이런 손을 가진 사람들을 일러 ‘장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장인이라고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겠지만, 세넷이 말하는 장인은 ‘별다른 보상이 없더라도 일 자체에서 깊은 보람을 느끼고 별다른 이유 없이도 세심하고 까다롭게 일하는 인간’이다. 자기의 일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이름을 얻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기 일 자체에 대한 자부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장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부심의 바탕에는 인고의 세월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건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반복이 필요한 법.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연습을 반복하며 자기를 훈련한 사람만이 기존의 노하우를 뛰어넘는 숙련된 기술을 얻게 마련이다. 이 기술이야말로 자부심의 근거일 터다. 장인의 자부심은 오랜 시간을 축적의 자산으로 쌓은 사람에게만 허락된 자기인정이다.

 

「장자」에 나오는 수레바퀴 깎는 노인 윤편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자기만의 솜씨를 벼린 사람의 지혜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책을 읽고 있던 환공에게 다가가 당신이 읽는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 일 뿐이라고 일갈했던 목수 윤편. 신분과 지식으로 보자면 가당치도 않은 훈수 두기다. 한낱 손기술자인 목수가 지식인인 선비에게 책에 대해 아는 척을 하는 꼴이니 말이다. 죽여버리겠다고 노발대발하는 환공에게 윤편은 태연하게 답한다. 70세가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았지만 그 비결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으니, 오직 자기 손으로 나무를 만지고 마음으로 느껴야만 정확하게 바퀴를 깎을 수 있더라. 책도 마찬가지다. 말로 가득 차 있는 책에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지혜가 담길 수 있겠나? 진짜배기는 말이 아니라 손에 있는 법. 말로 담아내는 지식은 삶으로 살아내는 지혜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얘기다. 굳은살 박인 손에 새겨지는 삶의 본질이 있다. 그래서 모든 일하는 손은 시간이 새겨진 예술작품인 거다.

3. 삶을 예술로 만드는 기술

그렇다면 질문 둘. 우리의 손도 예술작품일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손을 부끄럽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손에 일이 주어지지 않으며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은 길게 쓰는 것이 아니라 쪼개 쓰는 것이 돼버렸다. 쪼개진 시간 위에서 많은 사람의 손은 비어 있고, 힘이 없는 빈손은 그나마 붙잡고 있던 것마저 놓쳐버린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손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일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손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야 할 것은 단순히 물건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손으로 일하는 사람을 가리켜 공인工人이라 불렀더랬다. 여기에서 공이라는 글자는 하늘과 땅이 이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기술자는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이었으니, 손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냈던 것은 바로 ‘연결’이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사물과 사람을 연결하며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요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세넷이 이야기하는 바도 이와 똑같다. 그는 협력을 하나의 기술로 설명했다. 사물과 연결되어 작품을 만들어내듯이 사람과 연결되어 협력을 이루어내는 사람 역시 장인이라는 것이다. 협력을 이뤄내야 하는 조건은 까다롭다. 끼리끼리 모여서 잇속을 챙기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파괴적 협력’은 협력이 아니라 폭력이며, ‘서로 단절되어 있고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으려고 애쓰는 것.’(「투게더」, 27쪽) 이것이 세넷이 말하는 진짜 협력이다. 말만 들어도 벌써 어렵다. 이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니, 어떻게? 세넷은 공감(sympathy)하기보다 감정이입(empathy)하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공감이 저 사람과 나를 동일시하는 상상력이라면 감정이입은 상대방과 자기가 다르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한 채 상대방에게 관심을 두는 태도를 말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리고 들은 것에 반응하라. 이런 대화에서만 연결은 시작될 수 있다는 얘기다. 너무 쉽다고? 한번 해보시라. 이런 기술에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사람들인지 금방 알게 될거다. 협력이란 긴 시간 노력하고 인내하고 시행착오하고 견뎌내야 만들어질 수 있는 관계의 예술이다. 손을 가진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거다.

손을 가진 인간; 만드는 손과 맞잡은

<킹키부츠>는 협력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풍경을 그려낸다. 망해가는 신발공장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새롭게 선택한 아이템은 재밌게도 여장남자들을 위한 킹키부츠.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이 신발을 신는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했을 리 없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오해와 충돌이 숱한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그들은 끝내 부츠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만든 게 단지 부츠뿐이었을까. 신사와 마초와 드랙퀸이 함께 런웨이를 걷는 마지막 장면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밝고 경쾌하고 따뜻한 말 상대와 마주 앉은 기분이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 장인임이 틀림없다.

 

글 정수연 (연극학 연구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10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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