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이 보노; 누가 이득을 보는가

[컬처]by 예술의전당

'두 개의 방', 10.20(목)-11.1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쿠이 보노; 누가 이득을 보는가

재앙의 연극성

친구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흔들흔들 식당 전체가 울렁거렸다. 이게 뭐지? 옆 테이블 사람들은 밥을 먹다 말고 얼른 식당을 나가버렸다. 울렁거림은 곧 멈추고 불안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중에 그것이 지진이었음을 알았을 때 놀라움과 두려움은 오히려 더 커졌다. 뉴스 화면에서 보던 큰 지진보다 몸으로 느낀 작은 진동에서 ‘진짜’ 지진을 실감한 것이다. 이 진동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화면으로만 봐왔던 지진의 참상이 우리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 되었다는 사실일 거다. 여태껏 남의 얘기였다가 갑자기 우리 현실이 된 재앙에 흔들린 건 단지 땅만이 아니었으니, 그 흔들림에 그동안 가려진 부실한 안전체계는 그 빈약한 토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관리들은 허둥댔고, 방재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으며, 내진 설계가 된 건물은 없다시피 할뿐더러, 활성 단층임을 알면서도 그 위에 원전을 건설했다는 사실까지. 자연의 재앙은 언제나 사회적 악덕을 폭로한다. 정말, 무엇이 더 무서운가.

 

재앙에는 현실의 이면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안정적인 것 같은 세계를 갑작스레 흔드는 파괴적인 힘, 이것이 재앙의 본질이다. 재앙은 토대를 흔든다. 그런데 그때에만 보이는 진짜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의 이름은 감춰진 진실일 수도 있고 생각지 못했던 실재일 수도 있다. 재앙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일상에 침투함으로써 현실에 감춰진 진짜 모습을 보게 한다는 점에서 연극적이다. 연극은 온전히 가상의 세계이지만 그 가상의 목표는 언제나 현실을 향하는바, 연극이라는 비현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의 본질을 대면하게 하기 때문이다. 연극의 시작점에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땅이 말라붙고 사람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재앙 앞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바로 왕의 범죄였다. 가장 정의로운 모습 뒤에 숨겨진 가장 끔찍한 죄악. 이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테베라는 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된 정의를 유지하는 것일까, 혼돈일지라도 진실을 인정하는 것일까.

 

하지만 토대가 흔들렸다고 해서 언제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의도한 재앙이 횡행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자연의 재앙은 목적이 없는 파괴이기에 성찰의 대상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지만, 의도된 재앙은 목적이 있는 파괴인 만큼 파괴의 대상은 전적으로 타자가 된다. 파괴의 대상이 타자가 될 때 재앙은 연극적이라기보다는 폭력적인 것에 가까워진다. 연극적인 것은 자기를 깨뜨리지만, 폭력적인 것은 타인을 훼손한다. 의도된 폭력의 재앙, 테러는 그러한 재앙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테러 같은 의도된 재앙에서도 연극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라지기는커녕 한 편의 연극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테러는 연극과 닮아 있다. 불가항력의 재앙에 담긴 연극성과 의도된 재앙에 담긴 연극성 중에 더 ‘연극적’인 것은 무엇일까.

테러라는 이름의 연극

정치학자 공진성은 자신의 책 「테러」(책세상, 2010)에서, 테러는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세련되게 연출된 일종의 연극과 같다’고 정의했다. 그 근거를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제시하는데 그것이 연극의 요소와 거의 일치한다. 첫째, 테러에는 반드시 관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테러는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을 가진 공포의 퍼포먼스”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연극이 소통의 예술인 것처럼 테러는 소통을 의도한 폭력인 셈이다. 폭력은 상대를 타격함으로 끝나지만, 테러는 상대를 타격함으로써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완성된다. 폭력과 테러가 달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테러의 목적은 타인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폭력을 지켜봐 주는 관객을 확보하는 데 있다는 사실. 행동하는 사람과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테러라는 장르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테러는 관객 없이는 절대 성립될 수 없는 퍼포먼스이다.

 

둘째, 테러는 공포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목적을 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을 향해 가해지는 폭력을 지켜볼 때 그 사이로 공포의 감정은 퍼져나간다. 낯설지 않다. 공포는 연극이 발견한 첫 번째 감정이었으니 말이다. 언뜻 테러의 공포는 비극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파괴적인 불행이 자기에게 가까이 있음을 느낄 때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포는 가까움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인바, 거리감을 기준으로 볼 때 비극의 공포와 테러의 공포에는 분명 닮은 점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만 결론을 낸다면 이건 진짜 표피적인 접근이 될 거다. 테러가 의도하는 공포는 비극이 자아내는 공포와 본질적으로 다른 감정이다. 비극의 공포는 다른 사람을 향한 연민과 짝패를 이루는 감정이지만, 테러의 공포는 다른 사람을 적대시함으로써 자기를 폐쇄하는 극단적 감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외양은 닮았어도 본질도 방향도 완전히 다르다.

 

셋째, 테러는 자기의 퍼포먼스를 올릴 무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에게 분명히 보일 수 있는 무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테러는 한 편의 연극과 같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연극’의 무대는 다름 아닌 미디어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미디어가 없었다면 어느 한 지역에서 일어난 테러가 이렇게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될 수 있었을까. 텔레비전과 신문과 인터넷에서 테러의 장면은 극적으로 재현되고 반복된다. 테러를 직접 겪지 않아도 테러의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미디어는 테러의 스펙터클을 ‘화려한 무대연출’로 관객에게 노출한다. 관객의 몰입은 높아지고 감정의 확산은 빨라진다. 미디어라는 무대 덕에 퍼포먼스의 형식은 그 강도를 더해간다. 관객의 시선을 단번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잔혹해질 필요가 있는 거다. 더 많은 사람이 볼 뿐 아니라 더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확산시킬 수 있으려면, 전 세계 사람들을 관객으로 만드는 이 엄청난 ‘무대’를 전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데 능숙해져야 한다.

쿠이 보노; 누가 이득을 보는가

이 연극의 서브 텍스트는 무엇인가

모든 연극은 장르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테러의 장르는 비극이요 잔혹극이 아닐까. 잔인하고 끔찍한, 예측할 수 없는 이벤트성 퍼포먼스이니 말이다. 잔혹한 폭력으로 점철된 테러를 정의하기에 잔혹극이라는 개념은 언뜻 잘 어울려 보인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 테러는 결코 잔혹연극이 아니다. 잔혹성은 20세기 연극의 혁명가인 앙토냉 아르토가 말한 새로운 연극의 개념으로, 예측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우연만이 삶의 유일한 필연임을 인식하는 연극적 세계관이다. 이런 삶의 본질에 다다르기 위해 형식이 됐던 생각이 됐든 고정된 모든 것을 부수고 위험할지언정 새롭게 창조될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잔혹연극인바. 그래서 잔혹연극의 목적은, 비록 거칠고 불편한 장면을 담아낼지언정, 자아와의 만남 그리고 타자와의 만남을 향한다.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을 전시함으로써 사람들을 공포 속에 고립시키는 테러라는 연극과는 애초에 거리가 먼 개념인 것이다. 아르토의 잔혹과 테러의 잔혹은 표면은 비슷하지만, 서브 텍스트가 완전히 다르다.

 

맞아, 연극의 핵심은 언제나 서브 텍스트에 있었지. 진짜 이야기는 표면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감춰져 있는 서브 텍스트에 담겨 있는 법이니까. 연극을 이해하려면 먼저 서브 텍스트를 찾아내야 한다. 테러의 표면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잔혹한 퍼포먼스라면, 숨어 있는 서브 텍스트를 찾아내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은 여러 개다. 누가 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거지? 공포를 확산시키는 사람은 누구지? 왜 공포를 확산시키려고 하지? 그래서 결국 누가 이득을 보는 거야? 누가 이 연극의 진짜 승자인 거지? 서브 텍스트를 분석하는 순간부터 표면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적군 테러리스트라고 쳐도, 연일 테러의 장면을 화면에 보여주면서 공포심을 조장하는 이들은 아무리 봐도 우리 쪽 사람들이니 말이다. 안전함을 느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건만, 어찌 된 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테러의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정체불명의 공포심에 부채질하는 모양새다. 이런 식으로 부추겨진 공포심은 낯선 사람을 향한 적대감이 되기도 하고, 자기 안에 움츠러드는 무력감이 되기도 한다. 공포에 사로잡힐 때 제대로 된 판단력이 작동할 리 없다. 시민적 분별력이 힘을 잃은 사이 시민이 가져야 할 자유와 권리와 이득은 누군가에게 독점된다. 도대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일까.

 

연극 '두 개의 방'의 표면에는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남자가 있지만, 심층에는 테러의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여자가 있다. 이유는 달라도 그들은 모두 갇힌 사람들이다. 테러를 인간을 향한 재앙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료로 보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에게 진짜 재앙은 복면을 쓴 낯선 사람이 아니다. 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지지만, 의도된 재앙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악해지던가. 그 악의 표면에는 정의라는 명분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것이 도사리고 있다. 답은 철학자 슬라보예지젝이 던진 탁월한 질문 안에 있다. 쿠이 보노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테러를 통해 이득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이야말로 우리를 겨냥한 진짜 테러리스트일 것이다.

 

글 정수연 (연극학 연구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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