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展

[컬처]by 예술의전당

12.3(토) - 2017.3.5(일) 한가람미술관 3-4전시실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알폰스 무하
ALPHONSE MUCHA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조국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The artist must remain faithful to himself and to his national roots.
- 알폰스 무하

알폰스 무하는 누구인가? 무하는 사실 국내에선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장식 미술가로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체코의 화가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던 슬라브 지역 중 모라비아 남쪽마을 이반치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온두루 제인은 지방법원에서 안내원으로 일했고, 어머니 아멜리아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무하는 매우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무하는 많은 천재 화가들이 그러했듯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미술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어린 무하가 기어 다니면서 마룻바닥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목에 연필을 묶어주었다.

 

종교적인 영향으로 유년기에는 성화를 주로 그렸는데, 피카소처럼 여덟 살 때 그린 예수의 '십자가' 작품이 보관되고 있을 정도로 그의 천재성은 빛을 발했다. 훗날 “나에게 성당과 회화 그리고 음악의 개념은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성당의 음악 때문에 성당을 좋아하는 것인지, 성당이 내포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무하의 세계관은 종교적이었다. 아름다운 알토 목소리를 가진 그는 뛰어난 노래 실력 덕분에 성 베드로 성당의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이때 접한 성당의 건축물과 프레스코화 조각 등은 무하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열다섯 살 때는 아버지처럼 법원 서기로 근무하며 드로잉을 배웠고, 열일곱 살 때는 프라하 조형미술 아카데미 입학을 거절당한 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 무대장치 보조로 일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꿈을 키우던 그는 극장에서 무대 배경을 그리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초상화를 그렸다.

한 장의 그림으로 바뀐 알폰스 무하의 삶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그는 쿠헨 벨라시 백작의 눈에 들어 성의 장식을 맡았고, 백작의 후원으로 스물네 살에 뮌헨 아카데미에서 정식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스물여덟 살에 파리로 건너가 잡지의 삽화를 그리며 판화 제작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삶을 뒤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1894년 인쇄소에서 일하며 궁핍한 삶을 이어가던 무하는 크리스마스이브 밤, 홀로 남은 인쇄소에서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 사라베르나르가 출연하는 연극 '지스몽다Gismonda'의 포스터가 급히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이때 무하는 세로로 긴 포맷에 지스몽다의 분위기를 극도로 살린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포스터와는 완전히 다른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Alphonse Mucha, Poster for ‘Gismonda’, 1894

다음 날 포스터를 본 베르나르는 미친 듯 기뻐했으며, 사람들이 길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암거래를 할 정도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무하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포스터, 광고, 패키지 등 거의 모든 매체를 제작했고, 우아한 여성상을 세련되고 아름답게 그린 포스터로 세기말 아르누보의 일인자로 떠올랐다. 그의 나이 30대 후반이었다.

 

이런 열광에 힘입어 무하는 사라 베르나르의 공연에 필요한 장신구와 의상, 무대 디자인, 포스터를 모두 도맡으면서 일약 대중의 우상이 되었고, 지스몽다 그림 하나로 당대 최고의 배우와 6년 계약도 맺게 되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만나면서 조각도 만들었다. 그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어서 쏟아지는 장신구 디자인 주문에 지친 무하가 콘셉트 디자인을 담은 책인 「공식 자료집」을 출판할 정도였다.

 

국제적 명성을 얻은 알폰스 무하는 20세기에 접어들어 아르누보와 함께 시각예술 시장의 트렌드로 통용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이 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다양한 전시 및 프로젝트에서는 은메달을 수상하고, 1904년에는 드디어 미국 땅을 밟는다. 조국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무하를 ‘포스터 예술가들의 별’ 혹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식 예술가’라고 극찬했다. 무하는 자신의 그림에 매료된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뉴욕과 시카고에서 강의와 전시회를 열었다.

2016년에 다시 만나는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알폰스 무하의 전시는 201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후 이번이 두 번째다. 여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 이번 전시는 이전 전시에서 감상하기 어려웠던 초기작부터 말년작까지 무하의 생애와 예술적 흐름을 한곳에서 감상하며 그래픽 아티스트의 명작을 접할 좋은 기회다. 이것들은 당시 벨 에포크BelleEpoque(아름다운 시기) 때 파리에서 번성하던 새로운 장르의 시각예술 작품들로, 이른바 ‘무하 스타일Le style Mucha’로 불리는 아르누보 아이콘의 결정체들이다. 이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는 1890년대 컬러 석판화의 발달과 상업문화 속 광고 등 예술가들의 새로운 예술 형태를 엿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이상화된 여성과 장식에 보이는 상징적인 이미지의 오리지널 석판화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가장 크게 주목받은 '지스몽다' 포스터도 결코 빠뜨려선 안 되는 작품이다.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The Precious Stones: Ruby, 1900 (좌), The Precious Stones: Topaz, 1900 (우)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가로 성장한 무하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된 1890년대를 보여주는 섹션도 있다. 사라 베르나르를 디자인한 작품을 포함해 상징적인 포스터들과 다양한 상업 제품 등 대중적인 ‘브랜드’ 이미지로의 소통을 위한 무하의 디자인 전략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생활 속의 아름다운 영감’ 섹션에서는 아르누보 양식의 이해와 현대 디자인에 끼친 무하의 영향이 어떠했는지를 재평가하는 동시에 무하가 디자인한 제품과 패킹 디자인, 파리에서 활동한 보석세공사 조르주 푸케와의 컬래버레이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구성에서는 무하의 영향을 받은 한국과 일본의 만화가들이 소개된다. 특히 무하 특유의 화려한 장식성과 인물을 중심으로 한 구성은 전 세계 많은 일러스트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다양한 만화와 캐릭터로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우리는 그 흐름을 무하의 작품을 통해 생동감 있게 확인할 수 있다.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Poster for ‘Chocolat Ideal’, 1897 (좌), Poster for Lance Perfum ‘Rodo’, 1896 (중), Poster for ‘Cycles Perfecta’, 1902 (우)

무하는 예술가로서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유명한 예술가로 성공했지만 늘 가슴속에는 조국과 순수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가지고 살았던 애국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그 증거가 말년에 제작한 '슬라브 서사시' 시리즈이다. 무하는 찰스 크레인을 후원자로 만나면서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었는데, 자기민족 슬라브의 역사를 그리고 싶다는 무하의 오랜 소망을 듣고 경제적 지원을 자청한 것이었다. 크레인은 또한 무하가 가족과 함께 체코에 다시 정착하도록 도와주고, 20여 폭의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슬라브 서사시'를 그릴 수 있게 한 후원자이자 조력자였다.

 

'슬라브 서사시'는 1908년 무하가 보스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감상한 후 슬라브 역사와 문화를 작품에 담는 데 헌신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만든 작품이다.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통해 ‘슬라브 동포의 정신적인 통합과 모든 슬라브 국가의 바람인 정치적 독립을 이루자’는 조국을 위한 충성심만으로 오랜 시간 동안 공들인 기념비적인 작품인 것이다.

 

무하는 79세 생일을 열흘 남겨 둔 1939년 7월 14일에 폐렴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였는지는 그의 장례식 연설문에서도 알 수 있다.

“가장 고귀한 장소 슬라빈의 가장 성스러운 이곳 비셰흐라드에 체코와 프라하는 당신을 묻는다. 당신은 이곳에서 히라드차니와 성 비투스 대성당을 보게 될 것이다. 어두운 가을에 구름이 당신의 머리 위를 지나고 겨울에는 흰 눈이 슬라빈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곧 봄이 다시 올 것이고, 체코 영토의 목초지와 숲은 온통 꽃으로 덮일 것이다. 영원한 평화 속에서 편히 쉬거라!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글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진 컬쳐앤아이리더스
© Mucha Trust 2016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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