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을 이루다

[컬처]by 예술의전당
생각의 숲을 이루다

나는 책방 주인이다. 작년 8월, 후배와 둘이 선릉역 가까운 곳에 책방을 열었다. 책을 읽지 않고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어쩌자고 책방을 열었을까. 그것도 임대료 비싼 강남에. 다들 궁금해하고 의아해한다. 한데 정작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분명하게 자각하지 못했을 뿐 그 무렵 우리는 거의 책방 주인에 다가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당시 나는 오래도록 다니던 광고 회사에서 은퇴 같은 퇴직을 하고 ‘놀고’ 있었다. 짧게나마 대학원을 다녔으니 학생이었다 말해도 되겠다. 나는 더 일할 생각이 없었고 남은 인생을 전부 학생으로 살 작정이었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던가. 퇴직 후 2년이 지나자 일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디에든 쓰이고 싶었다. 그러면 방법이 없다. 하는 수밖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내 안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따라서 살았는데, 두 번째 인생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엔 광고로 돌아가려 했다. 평생의 일이 광고였으니 다시 사회로 나간다면 당연히 광고를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몇몇이 모여 광고 회사 창업을 준비하던 어느 날, 프로젝트가 먼저 들어 왔다. 운명의 프로젝트가! 왜 운명인가 하면, 사람들이 좀더 책을 많이 읽게 하는 해법을 달라는 프로젝트였다. 세상에! 그날 우리는 책을 더 많이 읽게 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대신 우리의 두 번째 인생을 전격적으로 결정해버렸다. 클라이언트의 과제를 대행하는 거 그만하고 이 일은 우리가 직접 해보자고, 우리의 책방을 열자고!

 

그렇게 우리는 책방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하게 되었다. 물을 끓이면 50도, 60도, 90도로 온도가 올라가다가 98도, 99도를 거쳐 100도가 되면 액체에서 기체가 되어 날아간다. 임계치를 넘는 거다. 책 관련 일을 하고 싶어 하던 우리 마음도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어느 맞춤한 때 마땅한 파트너와 계기를 만나 큰 소리를 내며 우리를 책방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느낀다. 인생사란 억지로 되는 것도 없고 거저 되는 것도 없음을.

 

책방을 하기로 한 다음 고심한 것은 어떤 책방을 하느냐였다. 몇 차례 회의를 거쳐 생각이 정리되었다. 말하자면 책방을 하는 이유이자 출사표이고 미션 스테이트먼트(mission statement)인데, 우리는 이 생각을 손 글씨로 적어 큰 액자로 만들었다. 책방 중간쯤 잘 보이는 곳에 액자를 두었다. 우리 책방에 오는 손님들은 이 액자 앞에 서서 찬찬히 내용을 읽어보곤 사진을 찍어 간다.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여기에 옮긴다.

아는 것이 힘이던 시대로부터
생각이 힘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나 새로운 가치들은
생각하는 힘으로부터 나오고
일터에서의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지금까지의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컴퓨터로 치면 새로운 OS가 필요해졌다고나 할까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생각 말입니다.

 

상상력, 창의력, 혹은 기획력, 문제 해결력….
생각하는 힘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최인아책방은 책을 통해, 책방을 통해
앞으로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산인 ‘생각의 힘’을
북돋우고 끌어내며 퍼뜨리고자 합니다.

 

하나의 생각이 또 하나의 생각과 만나
깊고 다양한 생각의 숲을 이루는 광경을
즐겁게 기대하고 상상합니다.

 

생각의 숲을 이루다
최인아책방

생각의 숲을 이루다

최인아책방 내부 전경

작년 여름에 문을 열어 아직 채 다섯 달이 안 되었지만 해가 바뀐 만큼 2016년 우리 책방의 베스트셀러를 집계했다. 50위까지 뽑아보고 흐뭇했다. 우리가 추천한 책이 많이 팔린 거다. 책방 주인의 추천을 손님들이 잘 받아주신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추천도 조금씩 달라졌는데 작년 늦가을부터 부쩍 많이 추천한 책이 있다. ‘촛불’과 관련이 있다. 작년 10월 말부터 몇몇 이름들이 매일같이 뉴스를 달구고 있다. 대통령의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최모 여인 말고도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을 볼 때마다 의구심이 들었다. 장·차관과 검사, 청와대 수석…. 하나같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다. 공부 잘해 좋은 대학 나와 출세한 그들은 한때 부모의 자랑이었을 테고 마을의 자랑이었을 거다. 그런데 왜 시민의 자랑은 못되었을까. 국가의 자랑은 왜 못되었을까. 자랑은커녕 우리 사회가 길러낸 엘리트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저렇게 비루한 걸까. 목숨을 위협받은 것도 아니고 80년대 독재 정권 때처럼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 고문을 당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다 저지경에 이르렀을까.

 

30여 년 전 미국의 한 대학도 이런 고민을 했다. 미국의 최고 명문, 하버드 대학이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면서 윤리적 가치는 뒷전으로 밀렸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환자에 앞서 돈을 먼저보는 의사, 검은 손과 결탁하는 부정한 거래.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는 그들의 졸업생, 하버드 출신이다. 그들은 심각하게 자문했다. 우리의 교육에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게 아닌가. 한국의 명문 대학들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까?

예수 하버드에 오다

생각의 숲을 이루다

대학 스스로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도 부럽지만 찾은 해법도 인상적이다. 그들은 지식을 가르쳤을 뿐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자성했다. 즉, 학생들은 사실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되고 있었지만 가치관에 있어서는 엉터리로 남아 있었다고 보고 ‘윤리적 사유’라는 수업을 개설한 거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사유하지 않은 것이, 가치가 실종된 잘못된 현상을 낳았다고 본 것이다. 유명한 신학자인 하비 콕스가 고민 끝에 이 수업을 맡는다. 그러고는 20여 년 동안 이 수업을 진행했고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 「예수 하버드에 오다」(오강남 옮김, 문예출판사, 2004).

 

지금 우리야말로 이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공부 잘한다고 부모님과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던 아이들이 커서 사회의 공적公敵이 되는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거창하게 엘리트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좋다. 더 많이 알고 더 좋은 대학 가서 출세를 하면 행복한지, 제대로 사는 것인지에 대해 이제는 진지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하비 콕스는 ‘윤리적 사유’라는 과목 중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는 수업을 맡았는데, 그는 예수를 이천 년 전 유대땅에 살았던 랍비라 생각하고 수업을 진행한다.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 판단을 요하는 물음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그때 랍비,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가며 생각을 전개하도록 했다. 랍비들은 인생의 여러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기존 전통의 고정된 윤리 강령을 강요하지 않고, 이야기나 비유, 질문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 결과로 새롭게 자기 삶과 세계를 볼 수 있게 하고 스스로 윤리적 결단을 내릴 힘을 길러주는 거다. 이 수업을 그런 식으로 진행했다. 그러자 한 번도 그런 주제에 관해 생각해 본 적 없던 학생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곤 그런 자신에 감격해하며 하비 콕스 교수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은 과학도로서 실험을 주로 하며 살았는데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내 문제로 생각하고 고민해보게 되었다고.

 

이쯤에서 생각나는 이가 한 사람 더 있다. 유대인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 그녀의 책도 요즘 즐겨 추천하곤 하는데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유한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옳은 것과 그른 것,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그러므로 악惡이란 저 멀리 별도로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 아니며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는이라면 누구라도 악을 범할 수 있게 된다고.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에 관한 얘기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우리 현실이야말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그대로가 아닌가. 보는 것만으로도 참담해지는 영혼 없는 고위 공직자와 엘리트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나는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아이들에겐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지를.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읽어볼 일이다. 「예수 하버드에 오다」를.

생각의 숲을 이루다

글·사진 최인아

연재필자 소개

카피라이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전 제일기획 부사장.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서울 강사. 저서로는 「프로의 남녀는 차별되지 않는다」가 있으며, 작년 8월 선릉 역 인근에 최인아책방을 열었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7년 2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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