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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김성현의 클래식 스캔들

과연 모차르트는
독살됐을까

by예술의전당

과연 모차르트는 독살됐을까

Wolfgang Amadeus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 용서해주게. 자네를 죽인 건 바로 나란 말일세.”

 

1985년 아카데미상 8개 부문 수상작인 영화 <아마데우스>는 빈의 궁정 음악가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가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살해했다는 독살설에서 출발한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살리에리는 흉기로 자살을 시도한다. 피투성이가 된 살리에리를 후송하는 영화 첫 장면에서 하인들의 잰걸음만큼이나 빠른 템포로 흘렀던 음악이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 1악장이다. 당시만 해도 대중적으로 낯설던 이 곡을 담은 영화 사운드 트랙은 빌보드 클래식 음반 차트 1위는 물론, 팝 음반 차트에까지 오르며 전 세계에서 650만 장 이상 팔려나갔다. 연주를 맡았던 지휘자 네빌 마리너와 악단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Academy of St. Martin-in-the-Fields는 영화의 인기 덕분에 클래식 음악계 최고의 ‘녹음단체’로 부상했다.

 

“오! 신이시여, 모차르트에게는 천재성을 주시고, 왜 내게는 그런 천재성을 알아볼 재주밖에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영화 속 살리에리의 대사는 천재天才와 범인凡人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살리에리가 ‘평범한 사람들의 수호자’를 자처한 반면, 모차르트는 ‘천재’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모차르트의 미완성 유작 ‘레퀴엠’의 창작 과정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독살설이 결부되면서 살리에리는 클래식 음악사 최고의 천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당 취급을 받았다. 살리에리가 빈 음악계의 실력자였을 뿐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재능을 일찌감치 눈여겨보고 가르친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은 부당한 평가이기도 했다. 바로크 음악 열풍이 되살아난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살리에리의 작품은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과연 모차르트는 독살됐을까

요제프 멜러가 그린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초상화

모차르트의 사인은?

과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을까. 그럴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높지 않다는 것이 음악학자들의 중론이다. 그런데도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 건, 거꾸로 모차르트의 정확한 사인을 밝혀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오늘날처럼 부검 결과나 진료 기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고인의 유해조차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1791년 9월 6일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초연을 위해 프라하에 머물던 도중에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됐다. 같은 달 30일에는 <마술피리>를 지휘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11월 20일에 이르자 양손과 발의 부종 때문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부분적인 마비와 고열, 구토 증세가 잇따랐다. 대체로 류머티즘열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술피리>와 <티토 황제의 자비>, 클라리넷 협주곡과 미완성 유작인 ‘레퀴엠’ 등 말년의 걸작들을 단기간에 쏟아낸 것도 건강 악화를 부채질한 요인으로 보인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리하게 피를 뽑아낸 방혈防血 요법이 오히려 죽음을 앞당겼다는 분석도 있다. 프랑스의 내과 전문의 뤼시앙 카로젠은 1998년 논문에서 “모차르트의 증세를 통해서 추정해볼 수 있는 사인은 최소 118개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윌리엄 도슨 미국 노스웨스턴 의대 명예교수는 모차르트의 사인을 독살, 감염, 심혈관 질환, 신부전 등 크게 네 갈래로 추정했다. 사실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관련 논문과 학설은 지금도 쏟아진다.

과연 모차르트는 독살됐을까

요제프 하이케가 그린 모차르트 운구 마차

결국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자정을 50분 정도 넘긴 시각에 숨을 거뒀다. 모차르트의 처제인 조피는 작곡가의 임종 순간에 대해 “그는 입으로 레퀴엠의 팀파니 구절을 표현하려고 애쓰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 소리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틀 뒤 작곡가는 빈 근교의 성 마르코 묘지Sankt Marxer Friedhof에 묻혔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처럼 모차르트의 시신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다른 시신들과 함께 구덩이에 묻힌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하지만 미국의 사학자 피터 게이는 “멜로드라마의 재료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호화로운 장례를 금지한 황제 칙령에 따라서 장례 절차는 검소한 일반적인 중산층 수준과 비슷했다는 주장이다. 다만 당시 평민들의 무덤은 10년이 지나면 파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모차르트의 정확한 무덤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설명도 있다. 지금 묘지에 들어선 비석은 1950년에 건립된 것이다.

과연 모차르트는 독살됐을까

성 마르크 묘지의 모차르트 비석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전성기가 도래하면서 ‘모차르트 독살설’도 함께 부각됐다. 예술가는 시대적 한계는 물론이고 자신의 운명과도 맞서 싸우는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모차르트도 비운의 예술가이자 불멸의 천재로 격상된 것이다. 미국 음악학자 데이비드 부흐는 “작곡가 사후에 독일의 위대한 대가들 가운데 하나로 신격화됐고 당시 싹트던 독일 민족적 정체성과의 연관성 때문에 칭송 일색의 전기가 쏟아졌다. 모차르트 전기의 균열도 봉합됐고, 소문과 상상력이 그 간극을 채웠다”고 말했다. 모차르트가 신적인 존재로 부상하면서, 그의 죽음도 한층 비극적으로 윤색됐다.

 

러시아의 시인이자 극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의 1831년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잠복하고 있던 독살설이 수면 위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 작품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서 “나는 더 이상 내 운명에 거역할 수가 없어. 나는 그를 제거하도록 선택된 인간”이라고 다짐하기에 이른다. 결국 살리에리는 샴페인 잔에 독약을 붓고, 모차르트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잔을 비우고 잠들고 만다. 결국 <아마데우스>는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1926~2016)의 순수한 창작이라기보다는 푸시킨 작품의 현대적 각색이었던 셈이다.

과연 모차르트는 독살됐을까

영화 '아마데우스' 사운드트랙

여전히 진행형인 살리에리의 명예 회복

‘모차르트 독살설’의 이면에는 살리에리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악파樂派와 모차르트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음악가들의 라이벌 구도와 신경전이 존재했다. 실제 모차르트는 1781년 빈으로 상경할 무렵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제의 눈에 중요한 단 한 사람은 살리에리”라는 편지를 보냈다. 같은 해 모차르트는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엘리자베트 공주를 가르칠 음악 교사에 지원했지만, 당시 성악 교사로 명성이 높았던 살리에리에게 밀려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1783년에는 살리에리의 술책을 비난하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둘을 경쟁자로만 간주하는 시각은 어디까지나 일면적이고 일방적인 관점일 뿐이다. 반대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협력 사례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궁정 음악가였던 살리에리는 1788년 자신의 오페라를 고집하는 대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과 피아노 협주곡 22번, 클라리넷 5중주 등 후기 걸작들도 살리에리의 주선으로 초연됐다. 일부 작품은 살리에리가 직접 지휘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791년 10월 <마술피리> 공연을 관람한 살리에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작품을 칭찬했다는 사실을 모차르트는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결정적인 건 2015년 11월 체코 음악 박물관에서 발견된 악보였다. 독일의 음악학자 티모 주코 헤르만이 찾아낸 이 악보는 1785년 초연 이후 230여 년간 유실된 것으로 추정됐던 칸타타 <오펠리아의 회복을 위해Per la ricuperata salute di Ofelia>였다. 당시 신경 쇠약으로 활동을 중단한 채 요양하던 영국 출신의 소프라노 낸시 스토라체의 무대 복귀를 축하하기 위한 작품이다. 이 칸타타의 공동 작곡가가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스토라체는 1786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초연 당시 수잔나 역을 맡았다. 그러고 보면 모차르트가 숨을 거둔 해에 태어난 막내아들 프란츠 크사버 모차르트(1791~1844)를 가르쳤던 스승 역시 살리에리였다.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이 필요한 건 모차르트가 아니라 오히려 살리에리일지도 모른다. 실제 살리에리의 음악적 명예 회복은 더디지만 꾸준하게 진행 중이다. 이탈리아의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예전에 녹음된 적이 없던 살리에리의 오페라 아리아 13곡을 모아서 「살리에리 앨범The Salieri Album」을 2003년 펴낸 것이 시발점이었다. 2008년에는 독일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아리아를 함께 부른 음반을 발표했다. 살리에리는 질투심으로 가득한 흉악한 살인범이 아니라, 모차르트 생전에는 작품을 함께 썼고 사후에는 아들을 가르친 음악가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살리에리의 신원伸寃과 복권復權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모차르트는 독살됐을까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살리에리 앨범」

글·사진 김성현

연재필자 소개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졸업.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인 사이먼 래틀과 피아니스트 겸 명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다. 그외에도 「클래식 수첩」, 「오늘의 클래식」, 「365일 유럽 클래식 기행」, 「시네마 클래식」 등을 썼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7년 2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