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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충무로 여성영화, 기승전
'모성애'…"최선입니까?"

bySBS funE

"벡델 테스트라고 들어보셨어요?"

충무로 여성영화, 기승전 '모성애'…

최근 영화 '침묵'의 인터뷰를 가진 정지우 감독은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를 언급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나온 말이었다. '침묵'에는 네 명의 여성 캐릭터 희정, 유나, 미라, 로백이 등장한다.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은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를 계량하기 위해 성 평등 테스트를 만들었다. 테스트의 요건은 단 3가지로 ▲이름을 가진 여자가 2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이다.

 

이런 간단한 내용이 테스트의 요건이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올해 개봉작 중 이 조건에 부합한 한국 영화가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계가 남성 중심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카메라 밖의 스태프나 카메라 안의 배우나 남성 중심의 인력이 꾸려져 있다. 영화 속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남성 캐릭터가 극을 이끌고 여자 캐릭터는 있으나 마나 한 역할로 등장한다. 아예 남자 배우들만 나오는 영화도 허다하다. 이런 경향을 비하하는 '알탕 영화'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얼마 안 되는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캐릭터와 감정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여성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것뿐 깊이와 다양성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른바 '기승전모성애'로 귀결됐다. 여자 배우가 맡아야 할 역할은 엄마밖에 없으며, 분출해야 할 감정은 모성애뿐일까.

"모성애 빼면 여성 이야기 없나?"

충무로 여성영화, 기승전 '모성애'…

"모성애 캐릭터가 나올 때마다 여성 캐릭터에 어머니라는 키워드를 제외하면 할 이야기가 없나? 그런 생각을 했죠."

 

영화 '미옥'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김혜수는 일갈했다. 한국 여성 영화의 다양성에 대해 목마름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영화도 예외일 수 없는 '셀프 디스'를 한 것이다.

 

올해 충무로에는 '악녀', '장산범', '희생부활자', '채비', '미옥' 등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영화가 몇 편 있었다. 액션, 공포, 가족극, 누아르 등 장르는 달랐지만,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한결같았다. 모성애였다.

 

남성 수십 명을 때려눕히던 여성 킬러는 사랑과 모성애 앞에서 나약함을 드러내고('악녀'), 아이를 잃은 엄마는 집을 잃어버린 아이에게 모성애를 느끼면서 희생하며('장산범'), 범죄 조직의 2인자인 여성은 성장한 아들과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모든 것('미옥')을 건다.

충무로 여성영화, 기승전 '모성애'…

서로 다른 환경과 색깔을 가진 캐릭터였고, 각자의 사연이 있었으나 관객이 캐릭터에 감정적으로 공감해야 하는 정서는 '모성애'였다. 모성애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데 있어 갈등의 시작이나 정서적 귀결점처럼 관습적으로 꺼내 드는 게 문제다. 게다가 여성과 모성애에 대한 이해와 깊이가 부족한 각본과 연출 탓에 배우의 연기력에 의존한 경향도 강했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공감은 물론이고 연기를 수행해야 하는 배우도 설득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한때 "세상엔 남성, 여성, 아줌마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지만, 한국 영화에서는 '남성 그리고 엄마'로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성인 여성의 절반 이상은 엄마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 모든 여성의 삶이 엄마에서 시작해 엄마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보편화됐고 여권 신장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영화는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능력 있는 여성 배우들도 영화 안에서 소비되는 역할을 택하거나, 긴 휴업을 하기가 일쑤다. 마찬가지로 관객도 진부함과 식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배우도 감탄한 여성 영화 두 편

충무로 여성영화, 기승전 '모성애'…

여성 영화의 부재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저 멀리 할리우드나 유럽 영화계도 이런 경향은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계속해서 다양한 기획과 의미 있는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다. 올해 개봉한 두 편의 영화는 관객뿐만 아니라 충무로 여배우들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다.

 

제시카 차스테인이 주연한 '미스 슬로운'과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엘르'다. '미스 슬로운'은 승률 100% 로비스트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이 거대 권력과 로비 전쟁을 펼치는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 이 작품에서 제시카 차스테인은 쟁취와 좌절을 경험하는 로비스트 슬로운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남성 중심의 정치계에서 여성 로비스트로서 살아남는 슬로운의 고군분투기를 시종일관 흥미롭게 그린다. 영화 속에서 슬로운은 '독한 여자'라는 시기 어린 비아냥을 듣지만, 그녀는 게의치 않고 자신의 역량을 펼친다. 슬로운은 일의 성취감을 최대 목표로 삼으며 섹스는 기분 전환쯤으로 여기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저 성(性)이 여자일 뿐 '슬로운'이라는 자아로서 오롯이 서고,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주는 전복의 매력이 상당한 작품이다.

충무로 여성영화, 기승전 '모성애'…

프랑스 영화 '엘르'도 기억해야 할 여성 영화 중 한 편이다. '엘르'는 집에 침입한 복면 강도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가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이자벨 위페르는 파괴적인 내면과 뒤틀린 성 의식을 가진 여성 미셸을 연기해냈다.

 

이 영화는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온 여성의 이야기에 반기를 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여성의 성폭행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파장은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설정이다. '엘르'는 여성을 비운과 절망에 몰아넣는 게 아니라 상황을 인지하고,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미셸은 평범한 여성이 아니다. 국민적 공분을 산 범죄자의 딸로 자라면서 삐뚫어진 자아와 가치관을 형성했다. 상처와 시련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이자벨 위페르는 입체적인 연기로 보여준다.

충무로 여성영화, 기승전 '모성애'…

이 영화는 파격적인 스토리와 난해한 여성 캐릭터로 인해 할리우드의 투자를 받지 못했다. 비슷한 이유로 니콜 키드먼과 샤론 스톤은 여주인공 제안을 고사했다. 유럽 자본, 프랑스 국민배우의 힘을 빌린 영화는 개성과 깊이를 더한 수작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특히 여성 캐릭터는 이자벨 위페르의 독창적인 해석과 자유로운 연기 덕분에 돋보였다. 베테랑 배우에게도 쉽지 않을 연기였지만 해볼 만한 시도, 나눠볼 만한 주제라는 확신을 갖고 도전에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현실 반영한 기획, 계속되어야…

문소리는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개봉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와일드'(엄마의 죽음 이후 인생의 상처와 고통을 잊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걷는 한 여성의 내적 성장을 그린 영화)라는 영화를 제작하고 출연했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저긴 할리우드니까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지'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겠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나도, 여러 가지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문소리는 여배우의 삶과 인생을 그린 '여배우의 오늘도'를 연출하고 출연하기까지 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넓고 깊이 있게 다루기 위해서는 여배우가 직접 메가폰을 드는 방법밖에는 없을까. 반드시 여성이 여성 영화를 잘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그러나 올해 개봉한 'V.I.P'나 '청년 경찰' 등은 남성의 편협한 시각으로 여성을 그려 관객들의 공분을 샀다. 한 여성 평론가는 "젠더 감수성이 부족했다는 말로 사과를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면 그런 영화를 섣불리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충무로 여성영화, 기승전 '모성애'…

지난 10월 열린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깜짝 방문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공효진, 엄지원 주연의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를 관람했다. 그리고는 "우리 사회의 여성 문제를 보여준 영화였다. 지선(엄지원)과 한매(공효진)가 고용인과 피고용인이기도 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관계이기도 한데 여성이라는 처지, 그 여성도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라진 여자'라는 부제'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이런 의미도 담고 있는 것 같다"고 감상평을 내놓았다.

 

물론 이 영화도 중반을 넘어서면 모성애에 지나치게 함몰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모든 것을 떠안은 한매의 마지막 선택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조선족 여성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과, 워킹맘을 바라보는 사회적 고정관념을 다루며 보다 다층적으로 여성 문제를 다뤘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다양성 차원에서라도 여배우를 제대로 활용하는 영화의 기획은 계속되어야 한다. 남자 영화, 여성 영화를 나누는 것을 이분법적 사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뭉뚱그리기에는 상업영화에서 여성의 역할은 지나치게 미비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국내 관객의 절반 이상은 여자다. "여성 관객들이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안본다"는 것도 예전 말이다. '써니'(736만), '암살'(1,270만)과 '아가씨'(428만)와 같은 제대로 된 기획은 큰 성공을 거뒀다.

 

김혜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영화를 보겠다는 의사 결정권은 여성 관객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여배우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고, 멋지게 그려지는 영화를 볼 준비가 돼있다. 이번 영화를 개봉하는 과정에서 응원하는 마음을 많이 느꼈다. 물론 환경적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기대들에 부응할 수 있는 기획과 영화는 계속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배우를 작품에 전면에 내세웠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여성이 그렇고 그런 캐릭터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캐릭터 자체로 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연기자로서 뭔가를 해볼 여지가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 배우를 욕망하게 하는 역할이라면 비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늘 기다리고 있다."

SBS funE | 김지혜 기자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