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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취재파일

불 끄다 부서진 차량도 사비 털어 변상…소방관 발목 잡는 '과실' 책임

bySBS

발묶인 소방기본법 개정안…소방관 '면책' 조항 도입 서둘러야

불 끄다 부서진 차량도 사비 털어 변

최근 소방관들의 '자비 변상' 문제가 논란입니다. 화재가 발생해 불을 끄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혹은 긴급 구조 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문이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졌는데 이를 소방관들이 사비를 털어 변상하는 게 현실이란 겁니다.

 

왜 이런 답답한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미국 사례는 어떨까요? 영화에서 보면 미국 소방관은 긴급 출동에 방해가 되면 앞서가는 차량을 밀어버릴 만큼 적극적인 현장 대응으로 잘 알려져 있죠.

 

미국 소방관들의 이런 과감한 행동의 원동력은 법적으로 보장된 면책 조항 덕분입니다. 정당한 공무 과정에서 빚어진 물적 피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도록 법으로 보호한다는 겁니다. 비록 공무 과정 중에 소방관의 과실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미국 뉴저지 주법에서는 긴급상황에서 소방관이 선의로 행한 작위나 부작위로 발생한 민사상 손해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도록 면책 조항을 규정합니다. 단 중대과실에 대해서는 면책되지 않는다는 단서가 있습니다. 일리노이주 주법에서는 소방관 등 공공 종사자가 화재 예방이나 소방 장치 시설에 의해 발생된 피해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이 있습니다. 또 소방조치와 관련해 공공 종사자의 작위 부작위로 인하여 발생한 피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이렇게 소방관들의 긴급 상황시 활동을 적극 보장해주는 덕분에 사고 현장에서 강력한 현장 대응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불 끄다 부서진 차량도 사비 털어 변

반면 우리는 위급 상황에서 소방관들의 면책 권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소방기본법은 소방관이 위급 현장에서 소방 활동에 방해가 되는 차량, 물건 등을 제거하거나 이동할 수 있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소방활동에 종사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소방관의 강제처분 권한을 인정하는 것이죠. 또 이런 강제 처분 과정에서 손실을 입은 자가 있는 경우에는 시도지사가 그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소방기본법 25조)

 

소방관의 강제처분권을 인정하고 이로 인해 피해입은 시민들의 손실을 보상해준다면 언뜻 봐선 민사상 면책을 인정해주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실'이라 함은 정당한 공무수행 과정에서 빚어진 피해를 말하는데, 소방관의 과실이 있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 끄다 부서진 차량도 사비 털어 변

과실이란 개념이 왜 갑자기 등장할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해 8월 전라남도에서 한 소방관이 벌집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벌집 제거를 위해서 가스 토치를 썼는데 불꽃이 옮겨붙는 바람에 화재가 났습니다. 산주의 거듭된 변상 요구가 있었고 소방관은 결국 자비로 1천만 원을 물어줬습니다. 구급환자 이송도중 행인을 치어 다치게 한 소방대원은 개인보험으로 배상한 사례도 있습니다. 빌라에 난 불을 끄다가 낡은 방범창이 떨어지면서 주차된 차량이 파손되자 사비로 물어준 경우도 있습니다.

 

위 사례들 모두 정당한 공무수행 과정에서 빚어진 피해였지만, 법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소방관의 과실이 일부 있었다는 점을 피하기 어려워집니다. 불꽃이 옮겨붙지 않도록 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냐거나 구급차 운행도중 상대편에서 튀어나온 행인을 왜 미처 피하지 못했냐는 겁니다.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식이죠.

 

소방기본법은 이처럼 소방관 과실이 개입돼 있는 경우 피해 보상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결점이 없는 '무결점' 공무수행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만 보상을 해준다는 겁니다.

 

물론 소방관 과실에 따른 손해 배상을 위한 제도가 없는 건 아닙니다. 11개 광역 지자체가 지방재정공제회를 통해 행정종합 배상 공제제도에 가입돼 있고, 이밖에 서울 등 6개 지자체는 별도 제도를 통해 소방관 과실 손해를 배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많습니다. 행정종합 배상 공제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활용률이 극히 낮아 실효성 논란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 지자체의 경우 구조구급 부분에 대해서만 손해배상을 지원하는 만큼 소방활동중 과실 피해는 보장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위급상황시 소방관의 적극적인 대처를 보장하고 소송에 휘말리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선 원천적으로 과실 책임을 묻지 않는 면책 조항의 신설이 중요합니다. 다행히 고의나 중대 과실이 없는 경우 소방관의 민형사상 면책 조항을 신설한 소방기본법 개정안이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의해 지난해 발의됐습니다만 1년 넘게 상임위 소위에 발이 묶여 있습니다.

 

면책 조항 도입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면책 권한 남용 우려 탓이죠. 하지만 이미 비슷한 법률에서는 일부 면책 조항이 도입돼 있습니다. 119 구조ㆍ구급에 관한 법률은 "구조·구급활동으로 인해 요구조자를 사상에 이르게 한 경우 그 구조·구급활동 등이 불가피하고 구조·구급대원 등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때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또 면책이 보장되는 종류와 범위를 명확히 특정한다면 그같은 우려를 불식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영웅으로까지 대접받는 미국 소방관 스토리 이면에는 면책 조항과 같은 강력한 법적 뒷받침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열악한 소방관 처우에 대한 논의가 몇년째 계속돼 왔지만 나아진 게 없습니다. 면책 조항과 같은 소방관의 근본적인 권한과 책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돼야 할 때입니다.

 

[장세만 기자 j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