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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취재파일

'미국 공주'의 방한…110여 년 전 아픈 역사 닮은꼴?

bySBS

'미국 공주'의 방한…110여 년 전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는 을사늑약 두 달 전인 1905년 9월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21살 딸로 '워싱턴 사교계의 공주'로 불리던 앨리스 루스벨트가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당시는 열강들의 예상을 깨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화했던 때입니다.

 

그동안 밀사를 보내는 등 미국 대통령에게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애타게 호소해 온 고종 황제는 구원의 천사가 왔다며 앨리스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앨리스가 지나갈 도로는 미리 보수했고, 황제 전용열차를 내줬으며 황실 가마에 태워 왕릉을 관람까지 시켰습니다. 황실악단이 미국 국가를 연주했고 떠날 때에는 각부대신들이 남대문 정류장까지 나와 직접 배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방카 방한…110여 년 전과 닮은꼴

110여 년이 지난 지금, 역시 '미국 공주'라 불릴 만한 인물이 한국을 찾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녀이자 백악관 선임 고문인 이방카 트럼프입니다. 앨리스 루즈벨트가 '사교계의 공주' 정도였다면 이방카 트럼프는 트럼프 대통령의 '1급 참모'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오는 25일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에 참석할 예정인 이방카 고문에게 정상급 의전을 제공한다는 방침입니다. 이방카 선임고문이 미국을 대표해 방한하는 점, 개회식과 달리 폐회식에는 정상급 인사들이 많이 오지 않아 여력이 있는 점 등을 감안한 조치라는 설명입니다. 정부 당국자는 "의전의 구체적인 내용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정상급 의전 TF에서 맡는 만큼 보통 때보다 세심한 지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장 이방카 고문의 입국 순간부터 일반적인 관행을 뛰어넘는 의전이 예상됩니다. 우리 측 고위급 인사가 직접 영접하고 경호도 경찰 대신 청와대 경호처가 맡는 등 국가 정상에 준하는 의전을 검토 중인 걸로 알려졌습니다. 의전 규범상 미국 정상의 가족은 물론 미국 대통령 대표단의 단장도 국가 정상급 예우 대상은 아니라고 하니 파격적인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공주'의 방한…110여 년 전

'이방카'에 기대 거는 정부

우리 정부가 이방카 고문에 대해 이런 특별 예우를 준비하고 있는 이면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미국의 지지'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했듯이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위해서는 여건 조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가 미국의 지지입니다. 한·미 동맹을 토대로 대화를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풀겠다는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절박한 현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방카 고문은 적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교 안보 분야에서 이방카 고문의 영향력은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의 차남 에릭은 지난해 4월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미국의 시리아 폭격은 누나 이방카의 반응이 (아버지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카 고문을 겨냥한 외교전은 다른 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 지난해 11월 방일 때 아베 총리가 직접 관련 행사부터 만찬까지 챙기는가 하면 나흘이 지난 이방카 고문의 생일을 축하하겠다며 꽃다발과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인도도 같은 달 인도를 찾은 이방카 고문을 위해 모디 총리가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정상급 의전을 밀어붙이기도 했습니다.

110여 년 전과 닮은꼴…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110여 년 전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모두 외교 안보적 위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국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 또한 같습니다. 각국의 상황과 여건이 완전히 다르기는 하지만 얄궂게도 일본이 연계돼 있는 점 또한 비슷합니다.

 

110여 년 전 열흘간 서울, 대구 부산 등을 돌아보고 귀국길에 오른 앨리스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감명은 없었고 황제가 서글프고 애처로웠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속내는 고종의 간절한 바람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미 앨리스 방한 두 달 전, 자신들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한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습니다.

'미국 공주'의 방한…110여 년 전

현재 상황은 어떨까요?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찰떡 공조'라는 평가입니다. 공통의 견제 대상인 중국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북핵 문제 해법을 놓고 때때로 긴장 국면을 맞는 한·미 관계보다는 공고해 보입니다. 물론 외교에서 양국 간 이견이 있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우리 당국자의 말처럼 오히려 일본의 대미 외교가 비정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 이방카 고문의 인식입니다. 지난해 2월 일본 아사히 신문은 총리 관저 관계자를 인용해, 며칠 전 있었던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의 통화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이방카 고문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베 총리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다. (동북아 외교 안보에서) 따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 측 보도인 만큼 가려들어야겠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공고한 미·일 관계, 여기에 더해 미국이 동북아 정책에서 일본의 조언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에게는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강경 메시지를 쏟아낸 펜스 부통령과 아베 총리가 평창 올림픽 개회식 리셉션에 '우연히' 함께 지각 등장한 것도 이런 불안감을 키우는 대목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방카 고문을 맞이하는 우리의 준비가 110여년 전처럼 '미국 공주' 영접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남승모 기자 smnam@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