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뮤지컬을 120번 본다고?!

[컬처]by SBS

한국 뮤지컬의 성장 호르몬, '뮤지컬 덕후'의 세계

똑같은 뮤지컬을 120번 본다고?!

'회전문 관객'


한 번 관람한 공연을 다시 돌아와 관람하고, 보고 또 보고, 열과 성을 다해 지지하는 관객. 이젠 뮤지컬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용어입니다. 요즘은 '뮤지컬 덕후('오타쿠'의 한국식 변용 신조어)'라고 많이 부르죠.


우리나라에선 해마다 300편 안팎의 뮤지컬이 제작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기록적인 숫자입니다.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에서처럼,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스테디셀러들이 있어서 전용관이 만들어지고 상시 공연을 하는 구조는 아닙니다. 하지만 소극장 창작 뮤지컬들도 끊임없이 새로 나오고, 그중에서 사랑을 받은 작품들은 시즌마다 꾸준히 다시 만들어지고, 해외 유명 뮤지컬들의 라이선스 수입도 계속돼서 한국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우리 인구 규모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의 '부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뮤지컬계의 이 '부흥'에 '회전문 관객'들의 몫이 컸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한 번 볼 작품을 세 번, 네 번, 수십 번씩 보고 있기 때문에, 이 '뮤지컬 덕후'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일정 이상의 매출을 담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메가 히트까지 노려볼 수 있는 덕분에, 뮤지컬 시장이 이렇게까지 양적으로 팽창해 왔고 이른바 '판돈'이 커질 수 있었던 거죠. 순전히 규모의 측면만 생각해 봐도 그 공이 지대합니다. 그렇게 규모가 커지면서 다양한 작품, 새로운 시도, 질적 성장이 뒤따르고, 그럼으로써 또 새로운 관객들이 유입되는 선순환이 비로소 가능한 거죠.


그럼 도대체, 뮤지컬 얘기가 나오면 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회전문 관객'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사랑하는 뮤지컬에 대해서 무엇을 바라고, 또 어떤 영향들을 미치고 있나.


뮤지컬 팬들을 취재하던 중에, 일단 그 규모의 실체가 궁금해져서, 인터파크에 집계를 의뢰했습니다. 국내 공연 티켓 온라인 판매에서 70%가량을 차지하는 데다, 개개인 '덕후'들이 선호하는 '좋은 자리'를 '예매'하는 사람들은 거의 100%에 가깝게 인터파크를 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파크 측과 의논해 정한 기준은 동일한 공연을 모두 다른 날, 3번 이상 예매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기업 차원에서 표를 단체 구매하거나 이른바 '접대용 선물'로 구입하는 사람들 중에도 인터파크 이용자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그런 구매는 대부분 뮤지컬 기획사를 직접적으로 통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티켓팅을 하고 있다면 대개 개인 관람객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또, 공연을 누군가와 함께 관람하기 위해 특정한 하루의 표를 여러 장 예매하는 게 아니라 각각 다른 날들에 걸쳐 3번 이상 구매한다면 본인이 3번 이상 공연장을 찾고 있는 경우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봤습니다.


며칠에 걸친 집계 끝에 나온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똑같은 뮤지컬을 120번 본다고?!

올해 1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인터파크에서 뮤지컬 티켓을 예매한 사람은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ID/모두 다른 날 구매를 기준으로 한 집계입니다. 동반자 티켓 구매 여부, 즉 동일한 날 복수의 표를 구매하는 경우의 티켓 수는 따로 뽑지 않았습니다.)


이 가운데, 동일 ID로 동일 작품을 모두 다른 날 3번 이상 관람(구매)한 사람은 모두 37,958명이었습니다. 최소한 올해, 회전문을 세 번 이상 밀었던 분들은 3만 8천 명 정도 있다고 추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건 일반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의 '열성 팬'이고요. '덕후'들 사이에서도 "저 정도면 인정!" 할 만한 경우 역시 따로 뽑아봤습니다. 뮤지컬 열성 팬들에게 질문해 보면, 10번 가까이 보는 걸로도 유독 인기 있는 작품들에선 '많이 본 축'에 끼지 못한다고 얘기하니까요. "아휴, 제 경우 정도는 진짜 회전문도 아니에요. 대단한 사람들 많아요."라고 입을 모읍니다.


정말 기록적인 숫자들이 보이죠? 한 작품을 50번 이상 관람한 사람이 15명. 그리고, 한 분은 같은 작품을 120번 관람했습니다! 아마 공연 첫날부터 '막공(마지막 공연)'까지 이른바 '출석체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프라이버시 노출을 우려해 이렇게 뜨거운 사랑을 받은 '행운작'이 무엇인지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럼, 올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은, '회전문 관객들의 선택'은 어떤 작품들일까요. 1위부터 10위까지입니다.

똑같은 뮤지컬을 120번 본다고?!

1위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1818년 고딕 소설을 바탕으로 한 창작 뮤지컬로, 2014년 초연부터 인기를 끌면서 일본에 라이선스 수출되기도 한 작품입니다. 이른바 '뮤지컬 한류'를 이끈다는 평가를 받는 연출가 왕용범에 류정한, 민우혁, 박은태, 카이를 비롯한 스타 출연진들로 화제성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2위 '웃는 남자'는 일종의 '공동 1위'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2위와 10위가 똑같이 '웃는 남자'입니다. 극장별로 집계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인데, 10위인 블루스퀘어에서의 공연은 '웃는 남자'의 예술의전당 공연이 연일 매진 사례를 빚는 바람에 나중에 기획된 연장 공연입니다. 그런데 이 연장공연까지, 연간 300여 편의 작품 가운데 전체 10위에 올랐습니다.


'웃는 남자'는 올해 처음 선보인 창작 뮤지컬로, 역시 일본 라이선스 수출이 확정됐습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던 대작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사회주의적 로맨티시즘'이 흠뻑 살아있는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됐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귀족들의 노리개가 되도록 소년 시절부터 얼굴이 기이하게 변형된 광대가 주인공으로, 박효신 수호 박강현 정성화 정선아를 비롯한 초호화 출연진을 자랑했습니다.


대작들만 사랑을 받은 건 아닙니다. 유달리 열성적인 관객이 많은 걸로 유명한 '회전문 계의 스테디셀러', 소극장 뮤지컬 '마마돈크라이'가 (올해도) 3위에 올랐습니다. (가끔 뮤지컬을 보러 가시는 분들은 뮤지컬 표값이 여전히 너무 부담스럽다고 입을 모읍니다. 분명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했을 때, 소극장 뮤지컬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고 할인 옵션도 다양하게 나옵니다. 대작의 화려함과 스케일은 부족할지언정, 관객과의 간격이 좀 더 가깝고 관객들이 '함께 호흡하며 키워가는 맛'이 쏠쏠합니다. 이렇다 보니 관록이 쌓인(?) '뮤지컬 덕후'들은 오히려 소극장 뮤지컬의 회전문을 더 자주 밀면서 아낌없는 애정을 쏟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국(유럽) 배경, 고딕 또는 로맨틱 위주의 작품들 사이에서 시인 이상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국의 근대를 그린 '스모크'도 5위에 올랐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를 제외하고는 5위 안의 작품들이 모두 국내에서 기획, 제작된 창작 뮤지컬이며, 1, 2위의 대작들은 우리 작품일 뿐 아니라 라이선스 수출까지 시작됐다는 것도 우리 뮤지컬의 오늘을 시사합니다.

똑같은 뮤지컬을 120번 본다고?!

적잖은 '회전문 관객'들은 단지 같은 작품을 여러 번 감상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2차 창작의 세계'가 또 하나의 서브컬처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게 '메모리북'입니다. 공연을 보러 가면 보통 1만 원 정도를 내고 안내 책자를 구입하죠? '덕후'들은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작품을 감상한 후기, '나 자신을 통한 재해석'을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즐거움으로, 아예 자신들이 공연 관련 책자를 통째로 만듭니다. 그 양과 질이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수준입니다. '대포 카메라'로 다양하게 찍은 배우들의 무대 위 모습, 캐리커처, 관람기, 의상 분석, 각종 인터뷰 모음 등등이 모여 공식 책자가 무색할 정도의 책 한 권이 만들어집니다. 기획사의 안내 책자가 일종의 프롤로그라면, '덕후들의 메모리북'은 그 공연을 관람하며 감동한 기억과 시간들을 갈무리한 에필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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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갖고 있는 특기, 재능을 모아서 다같이 만들어요. 기획자도 있고, 저 같은 경우는 출판사에서 디자인을 직업으로 했기 때문에 제가 디자인을 맡았어요. 글을 써서 리뷰를 싣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분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분도 있고… 배우들 분장 분석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직업인 분이 한 거예요. 이렇게 다같이 만들어서 나눠가지는 거예요. 공연이란 게 영화와 달리 남지를 않잖아요. 표를 열심히 모으는 것도 그런 게 안타까워서 그러는 게 있어요. '뭘 이렇게까지 하나'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저희는 즐거워요. 그리고 공연을 좋아하고, 배우들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하다 보면 같은 작품을 같이 좋아하는 '덕후'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그 즐거움이 참 커요. 종국엔 그 즐거움이 커서 창작이 이어지는 것 같아요." ('뮤지컬 덕후' 갱이 님. 올해의 3위 '마마돈크라이'를 바탕으로 한 보드게임을 고안해서 제작한 팬으로도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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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밖의 창작자'


2차 창작물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합니다. 뮤지컬의 등장인물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 무대 디자인을 미니어처로 재현하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뮤지컬의 이미지를 한 컷에 담는 '시그니처 컷'을 수를 놓아 표현하기도 하고 , 캐릭터들의 극중 명함을 만듭니다. '코스프레'를 함으로써 스스로의 1인극을 연출하는 팬들도 있습니다.


노래, 대본, 연기, 의상, 분장, 무대, 조명…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자, 이른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접점 어딘가쯤에서 양쪽을 아우르는 선물세트 같은 뮤지컬 장르의 특성상, 이렇게 스스로도 창작에 대한 욕구와 취향, 재능을 가진 팬들이 다수 생성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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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는 뮤지컬 캐릭터 인형을 만들기 시작해 유명해진 '뮤지컬 덕후 택이'는 아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캐릭터 인형 주문 제작을 업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재봉을 따로 배워본 적 없어요. 그냥 다 손으로 해요. 재봉틀 안 쓰고. 계속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며 만드는 거예요. 수입은 월급 받을 때보다 훨씬 줄었죠. 하지만 지금이 훨씬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요. 직장 다닐 때는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는 식으로 자존감을 깎아내리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있고, 내가 희소성이 있는 일을 하니까 수입은 적어졌어도 이 삶이 포기가 안 돼요. 이제는 업이니까 빨리빨리 만들어야 되는데(웃음) 욕심나는 캐릭터, 만들 수 있는 게 많은 캐릭터 주문 들어오면 ('록키호러쇼' 캐릭터 인형의 강렬하고 사이키델릭한 치장을 가리키며) 받은 것보다 더 쏟아부을 때도 있어요.

 

처음 본 게 오페라의 유령이었는데, 극이 진행되다가 샹들리에가 떨어지잖아요. 그 순간 그게 탁, 마음에 와서 박혔어요. 너무 멋있는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 이런 예술의 세상이 있구나. 인형은 그림이나 사진과는 달리 내가 좋아한 캐릭터를 일상에 스며들게 할 수 있어요. 같이 여행을 가거나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그 캐릭터가 나오는 공연장에 같이 가서 인증사진을 찍고. 이런 식으로 내 일상이랑 일치화시키는 거죠. 그 과정을 통해서 공연 전체에 대한 내 추억이 확장되는 느낌을 받아요." ('택이')


많이 보고, 본 만큼 눈과 귀는 더 트이고,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시야는 더 명확해져 갑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작품, 배우, 장르를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성장을 돕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됩니다.


좋은 작품이라면, '덕후'는 반드시 온다


"제 '최애(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은 '서편제'예요. 공연이 올라오는 해마다 늘 가서 봤어요. 서범석 배우나 이제 기획제작도 하시는 이자람 배우는 '서편제'에 나왔던 분들이라 계속 응원하고 있어요. 이자람 배우는 정말 천재라고 생각해요. 공연을 볼 때마다 이자람 씨가 점점 성장하는 모습이 계속 보이는 게 참 좋았어요. 재능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행복하더라고요. 그와 비슷하게, 저는 오히려 지금보다 2010년 전후에 지금 생각하면 진짜 '회전문 관객'이었는데(웃음) 한국 창작 뮤지컬이 발전해 가는 걸 지켜보는 게 한동안 참 즐거웠어요. 그래서 창작뮤지컬이 나왔다, 그러면 좀 있어 보다가 평이 좋다 하면 꼭 가서 보고 그랬어요." ('뮤지컬 덕후' 야기 님. 뮤지컬 캐릭터나 작품 전체의 이미지를 한 컷에 담는 '시그니처 컷'을 수를 놓아 제작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뮤지컬을 120번 본다고?!

(이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올해 제가 처음 공연 분야를 맡아 취재하면서 인상깊게 느낀 것은 잠재력이 큰 우리 젊은 국악인들이 참신하고 흥미로운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의 뮤지컬이 다다른 위치가 처음부터 이러했던 것은 아닌 것처럼, 저를 포함한 언론에서 좀 더 소개한다면, 아직은 젊은 대중이 폭넓게 접하고 있다고 보기 힘든 우리 국악도 그 같은 각광을 받을 날이 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겨 좋은 작품이나 시도를 보면 메인뉴스에 소개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그중 올봄에 공연됐던 '판소리 뮤지컬' <적벽>을 발견했을 때, 저는 정동극장에 이렇게 부탁했더랬습니다.


"이런 작품이라면 분명히 '회전문 관객'이 있을 거예요. 자주 오시는 분이 없는지 한 번 확인해 봐 주실래요?"


14번째 관람하고 있으며 '막공'까지 계속 '달릴' 예정인 분을 바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분과의 인터뷰가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잘 몰랐던 우리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참신한 극을 발견한 기쁨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원래 뮤지컬을 좋아해 왔는데, 이제 본인이 '발견'한 새 장르가 생긴 거죠. '적벽'을 좀 더 알릴 수 있는 기회라면 얼마든지, 라며, 만나기로 한 날은 퇴근도 일찍 하고 공연 1시간 전에 극장으로 와 주셨습니다. 그후에도 우리 국악에 뿌리를 둔 여러 공연이나 작품에서 비슷한 일들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똑같은 뮤지컬을 120번 본다고?!

일각에서는 20~30대 여성이 주를 이루는 '회전문 관객'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보냅니다. 배우 팬들 아냐? 배우 좋아해서, 이번에 나오는 아이돌 좋아해서, 자꾸 가서 보면서 스타 위주의 마케팅을 하게 하는 애들 아니야? 그런 경우도 분명 있겠죠. 하지만 그런 얘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 중에 '뮤지컬 덕후'들의 세계를 가까이에서 보고 있기는 커녕, 그런 말을 해도 될 만큼 다양한 작품의 "표를 사주며" 한국 공연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특히, 처음엔 배우를 좋아해서나 이런저런 이유로 '뮤지컬 덕후의 세계'에 입문했지만, 이후 같은 것을 좋아하는 팬들끼리의 교류와 소통, 2차 창작을 통해서 그 세계를 더 공고히 하고 있는 '덕후'들은 이제 '뮤지컬 바닥'이 개선해 나가야 할 것들에 대한 또렷한 소신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근거있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30대 여성들이 이른바 '먹여살리고 있는' 분야는 비단 뮤지컬 뿐만이 아니라는 걸 사실 모르는 문화계 종사자는 없을 겁니다. 출판, 음악, 무용… 한국 문화 시장의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주고객, 뮤지컬계에 바란다


"아직 온라인에선 '암표'가 불법이 아니잖아요. 인기있는 배우가 나오면 암표를 막 팔고, 대리티켓팅 하고 그래요. 그런데 그런 표, '덕후'들은 안 사요.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거니까요. 저희는 뮤지컬 커뮤니티나 트위터 같은 곳에서 소통을 하니까 만약에 제가 가려고 표를 여러 장 사뒀다가 못 가는 날이 생기면 동일가격에 양도하고 그래요. 저희가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환경이 망가지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올라오는 뮤지컬이 다 수작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대학로에서 '오랜만에 맘 먹고 뮤지컬 한 번 볼까?' 하고 나오신 분들한테는 이른바 '삐끼'들이 붙어서 표 팔고 그런 경우들이 많아요. 그런 작품 보고 '한국 뮤지컬 수준 여전히 별로야' 하시는 얘기들 들으면 좀 안타까워요. 우리 이렇게 잘 보고 있는 작품들 많아요!


그리고 공연장에서 소음이 좀 많은 분들(웃음), 시끄럽게 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주로 초대권 받고 온 분들이 많아요. 이 업계가 이상한 게, 표는 우리가 사는데, 그러면서 표를 사주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있는 것 같아요. 딱 봐도 초대권으로 온 관계자들이 가끔 관람 매너가 너무 안 좋은데 노골적으로 들리게 얘기를 해요. 쟤네 다 배우 보러 온 애들이다. 속된 말로 '빠순이'다. 남자 배우들 보러온 애들이다. 좀 어이가 없죠. 그리고 배우 팬이 나쁜 건가요?


정작 '덕후'들끼리는 여성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오는 극이나 여성 스탭들이 올리는 극 정보 서로 공유해요. 한 번 보러가자면서요. 여성이 너무 보조적인 위치나 희생자로만 나오는 극도 '저런 건 좀 그래' 하고 서로 의견 교환하고요. '베르나르다 알바'는 여성 배우만 10명이 나오는 극이잖아요. 초기에 매진됐고, 그래서 추가 오픈했다고 들었어요. 뮤지컬 많이 보는 사람들끼리 여성극에 힘을 실어주자고 많이 그래요. 물론 재미없으면 앞으로는 보지 않지만, 일단 시도를 하면 밀어주자고. '엘리자벳' 같은 경우도 여성주연극인데 정작 남자 아이돌 나오는 역 위주로 마케팅 하고 그러는 거 저희끼리도 좋게 보지 않아요. 저도 뮤지컬 병행하는 좋아하는 아이돌 있지만요. 그리고 이런 걸 저희끼리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의견도 내고 하는데, 기획사들이 받아들이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기자님 얘기하신 '적벽'도 극이 좋다며 제 주변에 좋아한 사람이 많았어요. 부채도 만들고 그러더라고요. 뮤지컬 좋아하다 보면 좀 더 실험적인 거 찾고, 우리 것도 찾고. 자기 좋아하는 것만 계속 봐도 되는데, 일단 좀 도와줘야지 하면서 그런 작품들 올라오면 일단 꼬박꼬박 챙겨보시는 분들 많아요. 그러다 극이 좋으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끄는 거고요. 국립극장 '향연'도 그렇게 입소문이 난 거잖아요. 배우도 좋아하지만, 이 장르가 잘 컸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커요. 그냥 극만 잘 올려주시면 좋겠어요, 저희는."(갱이)

"저는 기획사에서 '막공' 때 작은 선물을 받은 적도 있어요.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때 너무 많이 보다 보니까 그 시즌의 최다 관람객이라고 선정돼서 기획사가 선물을 주더라고요.(웃음)


요즘 공연계도 여혐 이슈가 크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너무 빨리 변하는 것 아니냐고 불만도 얘기해요. 그런데 저는 너무 잘됐다고 생각해요. 좋은 건 빠르면 좋죠. 더 인식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가끔 우리 같은 열성 팬들에 대해 '그냥 어떻게 해도 늘 여기 있을 팬들'이라고 여기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잃어봐야 정신을 차리겠죠?(웃음) 팬들이 좀 더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느 업계나 주고객을 가장 대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라고, 주고객을 대우할 필요 없다고 느끼는 것 같은 분위기는 싫습니다. 여혐하고,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들요. 여성 배우들에 대한 응원이나 '덕후'도 점점 늘고 있고요. 여성배우들 인형 주문이 점점 늘어요. 그래서 요새 '여캐'(여성 캐릭터) 인형 많이 만들어요. 여성 캐릭터는 디테일이 많아서 힘들어요!(웃음)"(택이)


"저희가 뮤지컬 시장을 키웠다기보다는… 그래도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뚜렷하게 받긴 했던 것 같네요. 진짜 경이로울 정도로 애정을 가진 분들 많아요. 사실 저는 그 축에 못 끼고요(웃음). 그런 분들이 키우셨다고는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한국 뮤지컬을 10년째 보고 있는데… 공연 뮤지컬은 이야기가 있잖아요. 저는 원래 디자이너였으니까, 작업을 할 때 노래를 들으면서 작업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뮤지컬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듣고 있으면 시간이 흐르는 게 작업과 함께 그 음악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좋아서 계속 듣게 됐던 것 같아요. 그렇게 반복해 듣다가 공연도 찾아서 보고, 새로운 공연도 찾아보고 하는 식으로. 또 이 장르 안에 굉장히 다양한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발견해 나가는 것도 너무 재밌었고.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가 생각한 걸 표현하면서 보고 싶어요."(야기)


"팬들이 만들어서 주시는 팬아트 선물들, 2차 창작물들, 부모님이 짜주신 장식장 안에 보관하고 있어요. 볼 때마다 제가 했던 공연을 좀 더 아름답고 선명하게 기억하게 돼요. 관객에 '귀천'은 없죠. 특정한 분들을 위해서 공연하는 건 아니지만요. 정말 자주 보시고 사랑해 주시는 분들, 제가 배우이고 제가 했던 공연인데도, 가끔은 저보다 극을 더 잘 알고 사랑해 주시는 것 같은 분들, 무대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들을 보면 저희가 조금 더 배우로서 긴장하게 돼요. 나태해지지 않고, 계속 노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뮤지컬 배우 송유택:)

2018.11.2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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