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 ‘팩션’ 영화들에 분노하는 진짜 이유 (나랏말싸미 역사왜곡 논란)

[컬처]by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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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 스틸컷/제공=메가박스 플러스엠

지난달 24일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악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을 그렸다는 영화는 믿고 보는 배우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등이 출연해 하반기 기대작으로 주목받았지만, 개봉 첫주부터 심각한 ‘역사 왜곡’ 논란에 빠지며 끝없이 추락 중이죠. 별 하나도 아깝다는 네티즌 평가가 난무하는 가운데 상영과 해외 개봉을 막아달라는 국민청원까지 등장했습니다. 개봉 일주일 만에 예매율이 처참하게 떨어지자 마침내 감독이 장문의 사과글을 발표하기까지 한 상황이죠.


하지만 영화계는 이런 논란이 있을 때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처음부터 ‘영화적 상상력’, 즉 허구(fiction)를 전제로 한 ‘팩션’ 영화인만큼 ‘영화는 영화로 봐달라’는 거죠. 하지만 돌이켜봤을 때 모든 ‘팩션’ 영화가 비판받았던 건 아닙니다. 예컨대 ‘암살’이나 ‘국제시장’, ‘왕의 남자’, ‘광해, 왕이 된 남자’ 등은 주인공이 가상의 인물인 등 허구인 지점이 오히려 더 선명했지만, 비판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받았죠. 반면 ‘덕혜옹주’, ‘군함도’, ‘자전차왕 엄복동’ 등의 영화는 역사 왜곡의 거센 비판에 시달린 끝에 흥행에서도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영화들은 대체 무슨 실수를 저질렀던 걸까요.

선을 넘은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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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 스틸컷/제공=메가박스 플러스엠

사실 역사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부분 ‘팩션’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로서 완벽히 검증된 자료 자체가 그리 많지 않기에 어느 정도 상상력이 가미될 수밖에 없죠. 반대로 역사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완벽한 ‘팩트’를 바라면서 극장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팩트를 찾아 헤맸다면 다큐멘터리나 역사서를 봤겠지, 왜 영화를 보겠습니까. 실제 한국의 천만 관객 영화 17개 중 9개가 이른바 ‘팩션’인데, 이중 상당수가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내세운 영화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영화들은 세부적인 고증 부분에서만 일부 지적을 받았지, 역사 왜곡 논란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았죠. 이유는 영화적 상상력이 작용한 부분과 정도에서 확연한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공한 팩션 영화들을 보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없는 단단한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 인물에 대해서는 역사의 내용에 오히려 충실한 경향이 높습니다. 상상력은 역사가 미처 쓰지 못한 지점, 기록과 기록 사이의 행간에서만 발휘된 거죠. 일례로 영화적 상상력이 가장 크게 발휘된 팩션 영화로 꼽히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경우 ‘사실은 왕이 두 사람이었다’는 완전한 픽션(허구)을 써넣기 위해 ‘광해’라는 양면성이 두드러진 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조선 15대 왕인 광해는 △폭정과 패륜을 일삼은 잔혹한 임금이었다는 평가와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실리 외교와 대동법 등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친 어진 임금이었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죠. 이런 역사적 사실의 틈새에서 ‘혹시 정말로 두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영화적 상상력이 발휘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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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스틸컷/CJ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이런 상상력이 실존 인물에 대한 평가와 정체성을 훼손할 정도로 선을 넘어버리면 곤란합니다. 관객의 현실 속 역사 인식과 지나치게 충돌해버리면서 몰입이 깨져버리는 거죠. 영화 ‘나랏말싸미’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아시다시피 세종대왕은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고.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한글 창제가 꼽힙니다. 하지만 영화는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을 창제했지만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승려 ‘신미’에 좀 더 집중하고 있죠. 물론 흥미로운 상상일 수는 있겠지만, 이 상상은 지나치게 현실과 충돌한 나머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혼란한 관객들은 영화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때때로 화까지 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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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스틸컷/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

‘덕혜옹주’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의 비극적 일생을 그린 건 좋지만 그를 독립투사로 미화했다는 지점이 관객들에 불쾌함을 남겼습니다. 대한제국의 일가들은 오히려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이 영화 보는 내내 떠올라 집중이 안 된거죠. ‘자전거 도둑’이었던 엄복동을 마치 항일 전사로 미화시킨 ‘자전차왕 엄복동’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성실에서 비롯한 고증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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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함도’ 스틸컷/CJ엔터테인먼트

핵심적 사건의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소한 역사적 왜곡이 많아지면 그것도 관객이 분노하는 원인이 됩니다. ‘고증 오류’라고들 하는데 주로 시대적 배경과 전혀 맞지 않은 의상이나 소품 등이 대거 등장하는 걸 뜻하죠. 예컨대 영화 ‘물괴’의 경우 조선 시대 중기를 배경으로 다루면서 군대 수색견으로 19세기 말에나 등장한 저먼 셰퍼드 품종을 등장시켜 화제(?)를 모았습니다. 일제 시대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군함도’ 역시 도무지 징용된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 근육질과 미모의 배우들이 대거 출현해 구설수에 올랐었죠.


물론 ‘팩션’인만큼 이 정도 상상력은 허용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팩션’이라는 단어가 개연성 혹은 인과 관계를 몽땅 무시해도 되는 전가의 보도로 이용돼서는 곤란합니다. 고증 오류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원인은 제작 비용 및 시간 절감 등인데, 영화 제작진의 이런 불성실과 게으름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팩션’을 남발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관객들을 분노케 합니다.

역사가 돈벌이 혹은 정치적으로 이용될 때

역사 왜곡 논란을 낳은 실패한 팩션 영화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를 볼거리를 위한 장치 정도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군함도’가 대표적인데, 영화는 군함도에 숨겨진 역사를 다루기보다 스펙터클한 탈출 영화를 만들기 위한 배경으로 군함도를 빌려 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군함도라는 장소가 그렇게 손쉽게 빌려올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의미의 장소가 아니었던 거죠. 영화는 감독의 주특기인 화려한 액션씬을 살리기 위해 근육질 배우를 동원하는 등 고증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잘 팔리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상업적 욕심이 팩션이라는 이름으로 슬픈 역사를 건드릴 때 관객들은 말 그대로 분노했습니다. ‘돈을 위해 군함도 팔아먹는 짓밖에 더 되냐’는 한 네티즌의 한 줄 평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나랏말싸미’도 다소 결이 다르지만 비슷한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신미 스님을 앞세워 불교를 선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거죠. 이런 의혹이 나올 법도 한 게 영화는 ‘신미 스님 도움 썰’ 정도에 불과한 야사(野史)를 마치 정사(正史)에 묻혀 빛을 못 본 진짜 진실인양 상당히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네티즌들의 의혹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불교계는 ‘나랏말싸미’를 극찬하는 여론을 조성하며 논란을 부추기는 중입니다.


팩션을 내세운 역사 영화는 천만 영화의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꼽힙니다. 한 영화 평론가는 “굴곡의 근현대사를 가진 우리 민족에게 매우 적합한 장르”라는 분석까지 내놨었죠. 지워졌던 역사를 다시 쓰고, 숨겨진 역사적 영웅을 다시 찾자는 관객들의 숨은 욕구가 흥행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관객들의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에 대해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굴곡의 근현대사를 가진 우리 민족’이기에 역사를 악용하려는 나쁜 의도와 상업 자본의 난무에 좀 더 예민한 것인 거죠. 영화계가 이런 의견에 좀 더 귀 기울여 좀 더 좋은 역사 팩션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김경미기자 kmkim@sedaily.com

2019.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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