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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화염방지기 손상의혹+잔디불 18분 무지…저유소 화재는 ‘인재’였나

by세계일보

[이슈톡톡]고양 저유소 저장탱크 화재폭발 사고 안팎

화염방지기 손상의혹+잔디불 18분 무

7일 경기도 고양시 대한송유관공사의 지하 탱크에서 불이 나 소방 당국이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풍등 하나에 기름 266만 리터가 날아갔다. 불길은 17시간 동안 잡힐 줄 몰랐다. 추산 피해액만 43억원이다. 화재가 발생한 지 2일 후 경찰은 스리랑카 노동자 A씨를 체포했다. 경찰은 “A씨가 저유소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풍등을 날렸다”며 그에게 단순 실화죄보다 처벌이 무거운 중실화죄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재신청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A씨는 의도 및 경위 등에 따라 방화죄 등 중범죄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지난 7일 발생한 경기도 고양시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저유소 화재 사건은 온전히 스리랑카 노동자 A씨의 책임일까. 모두가 경찰과 같은 의견은 아닌 듯싶다.


그가 검거된 날,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구속된 스리랑카 외국인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 ‘스리랑카인의 선처를 부탁합니다’ ‘구속된 스리랑카인에게 책임을 묻지마세요’ 등의 청원이 올라왔다. 제목은 다르지만 주요 내용은 같다.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의 주된 책임은 위험 관리가 부실했던 대한송유관공사에게 있지, 호기심에 풍등을 날려본 스리랑카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화염방지기 손상의혹+잔디불 18분 무

김대우 대표. 페이스북 캡처

“노후 시설 관리가 제대로 됐는지 미지수”

화재폭발 사고의 결정적인 원인이 저장탱크의 환기구(숨구멍)에 있는 화염방지기의 노화나 손상 때문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안전기술 전문가 김대우 PNS 대표는 지난 9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저장탱크의 환기구에는 외부의 불꽃이 내부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화염방지기가 설치되어 있다”며 “화염방지기가 손상을 입은 상태에서 잔디 등의 불꽃이 내부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공사 측이) 화염방지기 점검을 소홀히 한 것이 이번 사고의 핵심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양 저장탱크는 지난 2004년 설치된 것으로 화염방지기가 제대로 유지 보수 관리가 이뤄져 왔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네티즌들도 “풍등 하나 때문에 시설이 다 타버리면 그 시설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전쟁 시 폭탄이 아니라 풍등을 날려라” 등 비판적인 댓글을 달았다.

화염방지기 손상의혹+잔디불 18분 무

지난 7일 경기도 고양 저유소 CCTV의 모습. 고양경찰서 제공

잔디에 불붙은 후 18분...송유관공사는 몰랐다

고양 저장고에 설치된 CCTV는 45대이며, 당일 당직 2명을 포함해 6명이 시설에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니터링만 전담으로 맡은 직원은 없었다.


화재 외부 알림 장치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저유소 내부 온도가 800도 이상이 되면 사무실에 알림이 울리지만, 사무실 외부에 있다면 이를 알 수 없다. 잔디에서 탱크로 불길이 옮겨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18분. 대처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풍등이 떨어진 곳은 저유탱크 주변 잔디밭이다. 처음 잔디에 붙은 불씨는 시간이 흐른 뒤 탱크 내부로까지 진입했다. 전국 8개 저유소(판교-고양-천안-대전-대구-광주-전주-원주) 가운데 탱크 주변에 잔디가 깔린 곳은 고양 저유소가 유일하다. 다른 저유소는 모두 바닥이 아스팔트로 덮여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시설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화염방지기 손상의혹+잔디불 18분 무

풍등 날리기를 제한하는 실질적인 법률이 없다. 클립아트코리아

풍등 날리기 자체는 합법...법개정 실효성 있는지 의문

스리랑카인이 주워 날렸던 풍등은 근처 초등학교 행사에서 날린 풍등 80개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12월 개정된 국내 소방기본법(제12조1항1호)은 “소방서장이 화재 예방상 위험하다고 인정되면 불장난, 모닥불, 흡연, 화기 취급, 풍등 등 소형 열기구 날리기 등을 금지 또는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풍등 날리기 자체는 무조건 불법은 아니다.


다만 관할소방서장이 풍등을 날리지 말라고 명령했을 때 이를 준수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위반행위가 된다. 풍등 날리기와 관련해 별도의 금지 구역이 설정된 사례도 없고, 날리기 전에 신고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어 ‘껍데기뿐인 소방법’이란 지적이 나온다.

휴식시간 쏘아 올린 풍등에 무너진 ‘코리안 드림’

스리랑카인 A씨는 지난 7일 경찰 조사에서 “사소한 실수로 어마어마한 피해가 일어난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고양경찰서측은 전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알며 일용직 근로자로 월 300만원 정도를 번다.


네티즌들은 ‘코리안 드림’을 안고 정식 절차를 밟아 국내에 들어온 20대 외국인 근로자에게 화재 사고의 원인을 모두 떠넘기는 것은 가혹하다는 입장이다. 직장인 송모씨는 “저유소 관리자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스리랑카인이 화재폭발의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