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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모래위에 쌓은 '갭투자'의 공포

보증금 먹튀에 무너진 40대 가장…딸 셋 모습 보며 ‘한숨’

by세계일보

"어리석어 당한 게 아닙니다"

건물주가 파놓은 ‘개미지옥’

건물 한 채 돈으로 10여채 매입

이자 감당 못하고 주저앉는 순간

세입자는 전 재산 고스란히 날려

영등포구 갭투자 사건

신탁사 공문서 믿고 임대차계약

금융사 근저당권 우선 인정 충돌

주민 100여명 1년 넘게 법적 싸움

풍비박산 난 신혼부부 꿈

고시원 살면서 모은 전세보증금

집주인은 자취 감추고 돈만 떼여

하루하루 고통… 아이계획도 미뤄

세계일보

14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R하우스 건물 입구에 ‘갭투자’ 피해 관련 소송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이제원 기자

갭투자자는 건물주의 꿈을 꿨겠지만 다수 임차인은 마음놓고 생활할 공간이 절실했다. 갭투자 한 명이 대출금이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주저앉는 순간 세입자 다수는 전 재산을 잃는다. 3∼4년 전 우리 사회를 열풍처럼 휩쓴 갭투자 폐해가 시한폭탄처럼 터지면서 큰 상처를 내고 있다. 세계일보가 최근 분쟁에 휘말린 서울시내 부동산 3곳의 현황을 파악한 결과 피해 세입자만 1000여명, 피해액은 12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피해자들은 평범한 가장,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취업준비생들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공인중개사를 통해 적법하게 임대차계약을 했으나 건물주가 파놓은 ‘개미지옥’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고 있다.

다자녀 가장=“딸 셋 데리고 어디로…”

“집이 공매로 넘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날, 잠든 딸들의 모습만 밤새 바라봤습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44)씨는 피해자만 142명, 피해 보증금 100억원대의 ‘영등포구 갭투자 사기’ 사건을 맨 먼저 알게 된 임차인이다.


그는 지난해 3월 말 자신이 사는 영등포구 ‘R하우스’가 공매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둘러 임대차계약서와 등기부등본 등 자료를 가지고 법무사를 찾아갔다. “전세보증금을 찾기 어렵고 그냥 내쫓길 수 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가 집주인에게 낸 전세보증금은 2억2000만원, 입주자 중 가장 많은 액수다. 이 중 절반은 은행 대출로 마련한 보증금이었다.


그날 밤 김씨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딸들을 바라봤다. 당시 중학교 3학년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던 딸들이다. 집에서 쫓겨나면 얘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세계일보

14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R하우스 건물 입구에 ‘갭투자’ 피해 관련 소송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이제원 기자

2017년 3월 임대차계약을 할 때 신탁회사 공문서를 철석같이 믿었다. R하우스는 ‘담보신탁’ 물건이라서 법적인 소유주는 신탁사였다. 건물주 이모(59)씨는 건물감정가 32억원인 이 건물을 담보로 더 많은 대출을 받아 다른 곳에 갭투자를 하려고 신탁계약을 한 것이었다. 미심쩍어하는 그에게 공인중개사는 신탁회사 대표의 직인이 찍힌 공문을 보여줬다.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을 우선적으로 보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건물이 공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걸 알고 확인해 봤더니 신탁사 공문은 전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문서였다. 새마을금고의 근저당권을 우선적으로 인정한다는 신탁계약서와 권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건물주 이씨는 다른 사건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이씨가 고용한 공인중개사가 신탁사 공문으로 임차인들을 끌어 모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같은 상황의 주민 100여명을 모아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지금껏 법적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1년 넘게 생존권 투쟁을 하면서 우리 가정에서 웃음소리가 사라졌어요.”


살던 집이 위기에 처한 이후 가족 구성원들은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유학 중이던 둘째 딸은 조기 귀국했다. 여행이나 외식은 사라졌다.


“둘째 딸이 귀국해서는 ‘돈 많이 버는 게 꿈’이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가장 아팠어요. 건축사를 꿈꾸던 딸이었는데, 내 탓인 듯해서….”

세계일보

신혼부부=“아이 가질 계획 미뤄야겠어요”

이모(62)씨는 서울 남서부지역의 오피스텔이나 다세대주택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갭투자자로 소문나 있다. 그의 끝없는 욕망에 신혼인 30대 중반의 A씨는 어렵게 장만한 보금자리를 잃을 판이다.


평범한 직장인인 A씨의 전세보증금은 1억5000만원, 서울에서 10년간 일해 모은 돈이다. 결혼 전 보증금 200만원, 월세 30만원짜리 고시원에 살면서 악착같이 모았다. 미래를 약속한 사람과 함께 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짠돌이 소리를 들으면서 절약했다. 2016년 전세로 지금의 집으로 들어왔다. 절반 이상은 대출이었으나 신혼 보금자리를 꾸민 것에 행복해했다.


지난해 11월 그는 집주인이 건설사에서 이씨로 바뀐 사실을 알게 됐다. 새 집주인은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을 떠안고 적은 투자금으로 부동산을 추가 구입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지난달 아내와 결혼식까지 올렸다.


그의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집주인이 행방을 감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피해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강서·양천·구로구 등에 있는 건물 600여 가구 세입자들이 같은 처지였다. 피해 보증금 액수만 1000억원 상당이었다. 아들의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입원까지 했다.


“어머니한테 차라리 알리지 말 걸 그랬어요. 매일 후회가 몰려와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아야 할 신혼부부 집에는 침묵만 가득하다. 집에서 아내와 부둥켜안고 우는 날이 많다.


“아이 계획도 기약없이 미뤄야겠어요. 지금 같이 힘든 상황에서는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세계일보

사회 초년생=“악착같이 모은 재산인데…”

“대학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취직한 뒤에는 악착같이 모았어요. 전 재산인데 어떡해요.”


서울 상도동 T빌리지에 사는 30대 초반의 박모씨는 사회 생활 출발부터 쓴맛을 보는 중이다. 그가 건물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집주인 오모(65)씨가 받은 부채는 많지 않았다. 다른 곳에 쓸 돈이 궁해진 오씨가 전세보증금을 올리고 대출도 더 받으면서 위험 물건으로 전락했다. 오씨는 추가 대출을 받기 위해 전세계약서까지 위조해 금융기관에 낸 것으로 드러났다.


2017년 2월 이 집을 선택할 때 오씨가 꺼림직한 게 있기는 했다. 전세보증금 6000만원에 임대차계약을 할 당시 해당 부동산에 담보신탁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법적으로 신탁사 소유니 별 문제가 없을 걸로 여긴 게 잘못이었다. 집을 소개한 공인중개사도 담보신탁에 대해 잘 몰랐다.


오씨가 근저당 이자를 제때 내지 못하면서 건물이 공매로 넘어가면서 박씨는 보증금을 모두 잃을 처지다. 규정상 박씨의 임대차계약서를 오씨가 신탁사에 보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씨가 새마을금고에서 대출을 더 받으려고 계약 사실을 감춘 것이다.

세계일보

최악의 경우 박씨는 임차인 인정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신탁사는 박씨의 임대차계약서를 받지 못했으니 박씨의 보증금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박씨와 같은 상황에 놓인 T빌리지 주민만 30여명이다.


오씨는 현재 회생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회생절차가 이뤄지면 박씨는 오씨한테서 보증금을 5년간 조금씩이라도 돌려받게 된다. 하지만 회생절차가 이뤄질지 미지수다. 오씨와 얽힌 채무자가 많아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회생절차가 실패하면 박씨가 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은 요원하다. 약 26억원의 새마을금고 근저당을 변제하고 나면 박씨에게 돌아갈 돈은 없다. T빌리지는 임대차보호법이 아니라 특별법인 신탁법 적용을 받기 때문에 소액임차인의 보증금 일정 부분을 보장해 주는 ‘최우선변제’ 대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배당이의소송 재판 결과가 나오려면 2∼3년 걸린다. 하지만 재판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박씨는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김범수·이희진 기자 swa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