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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독립 위해 목숨 바친 윤봉길 의사 의거 85주년

by서울신문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 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어 떠나가오.”

독립 위해 목숨 바친 윤봉길 의사 의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전시된 김구 선생과 윤의사 기념촬영 사진. 1932년 4월 26일 상해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 후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었다.

1908.6.21~1932.12.19. 조국의 독립을 위해 25세의 나이로 자신의 청춘을 바친 윤봉길 의사.

 

그는 19세의 나이에 1920년대 농민계몽운동에 힘쓰다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남기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 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했다.

 

1932년 4월 29일 스물네살 청년 윤봉길은 일본군이 일왕의 생일을 맞아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상하이 점령 기념식을 거행하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지도부들을 폭살했다. 이 의거로 당시 중국 지도자 장개석은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했다’는 찬사와 함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는 우리의 아픔을 세계에 알린 윤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같은 해 5월 일본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2월 19일 가나자와 일본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순국했다.

독립 위해 목숨 바친 윤봉길 의사 의

윤봉길 의사 서거 직전 일 군경에 연행되어 가는 모습 - 서거 직전 일 군경에게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거사 직후인 1932년 4월 30일 North China Daily에 실렸다. 국가보훈처

1994년에 일본의 시민 운동가인 야마구치 다카시가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라는 책에 의하면 일본군은 윤봉길을 현장에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윤봉길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고 일본군이 침략군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질 수 있을 것을 염려해, 일본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시카와 현 카나자와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그는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라는 시를 남겼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5주기 추모식은 19일 오전 11시 서울 효창공원에서 거행된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이번 추모식에는 박유철 광복회장과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을 포함한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