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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책과 알코올과 밤의 시간,
책바(CHAEG BAR)

by어반폴리

일본 도쿄의 시모기타자와역 근처에는 ‘B&B(Book&Beer)’라는 작은 동네 서점이 있다. 책(Book)을 읽으며 맥주(Beer)를 마시는 서점 겸 술집으로 2012년부터 지속적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술 마시는 책방’이 우리나라에도 1, 2년 전부터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근래 책과 술을 페어링(pairing)하는 영업 방식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는 도서정가제로 인하여 침체된 온 · 오프라인 출판 시장을 타개하고자 시도되고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을 때 술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약간의 알코올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독서’에 보다 쉽게 빠져들 수 있도록 북돋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바(CHAEG BAR)’는 그러한 ‘책과 술의 시너지’를 믿는 공간이다.

책과 알코올과 밤의 시간, 책바(CH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지만 ‘책바’는 술을 즐길 수 있는 바(bar)이자 심야에도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서점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저녁 7시에 문을 열어 평일에는 새벽 1시 30분, 금요일과 토요일은 새벽 3시까지 문을 연다. 대부분의 ‘술 마시는 책방’에서는 술이 독서를 하며 가볍게 곁들이는 요소에 가까웠던 반면에, ‘책바’는 서점의 주인장이 바텐더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여타의 책방들보다 책방 콘텐츠 중 ‘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밤, ‘책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쿠바 리브레’ 한 잔을 주문했다. 차가운 칵테일 한 모금을 들이키자 ‘쿠바 리브레(자유로운 쿠바)’라는 이름에 걸맞는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내부의 약간 후덥지근한 온도조차 알코올이 주는 가벼운 열기와 자연스레 어우러지면서 나는 ‘책바’의 분위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책과 알코올과 밤의 시간, 책바(CH

바(bar)라는 공간의 목적과 ‘심야’라는 시간적인 컨셉으로 인하여 인테리어가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하지만(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독서를 위한 조명등이 테이블 마다 섬세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실내 곳곳에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중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키가 높은 책장에 진열된 ‘술이 등장하는 책’과 ‘책 속의 그 술’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옆에는 ‘압생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옆에는 ‘보드카’가 나란히 놓여 각각의 책과 술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책과 알코올과 밤의 시간, 책바(CH

‘책바’의 주류 메뉴는 독특하게도 시, 소설, 에세이, 계간지 등으로 항목이 나뉘어 있었다. 시 한 편을 천천히 음미하기에 좋은 도수가 높은 술, 에세이에 어울릴만한 적당한 도수의 술, 소설 한 권을 느긋하게 읽으며 마시기 좋은 도수가 낮은 술 등으로 구별한 ‘책바’만의 감각이 재미있었다. 특히 ‘책 속의 그 술’이라는 메뉴가 인상적이었는데, 일반적인 메뉴의 형식처럼 술의 명칭과 가격만이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특정 주류가 등장한 문단을 고대로 인용하여 적어두었다. 술이 등장하는 책 속의 한 장면을 실제로 재현해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추측하건대 ‘책바’의 주인장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로망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책과 알코올과 밤의 시간, 책바(CH

두 번째 잔으로는 어쩐지 글귀가 땡기는 ‘칼바도스’와 ‘쿠르브아제’를 골랐으나, ‘브랜디가 들어가서 알코올 도수가 40도를 넘는 칵테일들’이라는 설명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집까지는 두 발로 걸어가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고민에 빠진 나에게 주인장은 평소 어떤 술을 좋아하느냐고 물어왔다.

 

“평소 모히토, 진토닉, 하이볼 같이 청량한 류를 좋아해요. 미도리사워처럼 너무 단 칵테일은 싫어하는데 오늘은 왠지 약간 달달한 게 마시고 싶어요.”

 

주문을 주의 깊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주인장은 ‘꼭 책 속의 그 술을 마시고 싶다’는 덧붙임에 ‘진&파인애플’을 덜 달게 조절한 ‘맞춤 칵테일’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술을 추천 받기 위한 자연스러운 대화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생각해보니 나는 ‘책바’의 주인장에게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술 취향을 술술 불어버린 셈이었다. 평소 낯선 누군가에게 스스로의 취향을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 거부감이 있는 편이건만, 좀 전의 나는 ‘사실은 말이죠’하며 그대로 마음 속 비밀 얘기까지 꺼내놓았을지도 몰랐다. 과연 이것은 주인장의 마성 때문인가 아니면 알코올의 힘 덕분일까, 혹은 ‘책바’라는 공간의 편안하면서도 내밀한 분위기 탓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에 샛노란 색의 ‘진&파인애플’이 나왔다. 소설 ‘롤리타’에 등장했다는 ‘진&파인애플’은 여름에 어울리는 청량함에 적당한 단맛과 신맛이 조화로운 칵테일이었다.

책과 알코올과 밤의 시간, 책바(CH

주인장과 단골 손님이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중간중간 주인장에게 각자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소통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책바’는 본래 ‘혼자 오신 분 더욱 환영’을 표방하는 곳이고 4인 이상 무리 지어 들어올 수 없는 심야서점이자 술집인데, 특히 내가 방문했던 날은 나를 포함한 손님 모두가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혼자 와서 술을 벗 삼아 조용히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했다.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즐기고 있었고 나 또한 책 그리고 술과 함께 하는 이 밤 속에서 더없이 행복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곳을 분명 좋아할 사람을 떠올리며 웃음지을 수 있었고, ‘책바’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좀 더 알아가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기분 좋은 기대에 설렜다. 마감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다 보면 ‘책바’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감송을 신청할 수 있었다. 다른 손님들이 작성한 신청곡 목록에 꼬리를 물듯이 신청곡을 적어 넣고 책을 마저 읽다 보니 어느새 직접 신청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조용히 책을 덮고 노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책바’는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고 친밀함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려 깊은 공간이었다. 첫 방문만으로도 책바의 단골이 되어버린 나는, 다음 방문 때 마실 ‘모스코뮬’에는 어떤 책이 어울릴지 벌써부터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다.

책바(CHAEG BAR)

 

02-6449-5858

 

Mon-Thu: 19:00 – 25:30

Fri-Sat: 19:00 – 27:00

Sun: Closed

 

chaegbar.com

chaegbar@gmail.com

@chaegbar

 

에디터. 이지현